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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양양 낙산사 공중사리비와 사리탑

관음보살이 공중서 보낸 사리와 이를 기록한 천하명문

▲ 공중사리탑에 얽힌 신비로운 사연은 낙산사 대화재 다음해인 2006년 밝혀졌다. 사진은 스님이 탑에서 사리를 수습하고 있는 모습.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화려한 보석에는 열광해도 진흙 속의 진주는 잘 못 본다. 누가 원석을 잘 골라 멋지게 ‘커팅’해 보여주면 좋아하지만, 스스로 원석을 찾아나서는 수고로움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보석을 예로 들었지만 사찰에서 문화재를 대하는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로군요”하는 감식이 나와야 관심을 보이지, 스스로 나서서 문화재를 꼼꼼하게 들여다보려는 적극성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강원도 양양 낙산사(洛山寺)의 사리탑과 탑비가 그렇다. 홍련암 가는 길목의 언덕 한 귀퉁이에 삐뚜름하게 서 있던 이 빗돌과 그 옆에 자리한 사리탑은 매일 보아도 그냥 지나칠 만큼 평범하게 생겼다. 그래서 탑과 비가 세워진지 400년이 되도록 그 특별했단 의미를 알아채는 이 한 명 없었다. 그러다가 2005년에 일어난 ‘낙산사 대화재’ 이듬해가 되어서야 대중의 주목을 끌었다. 대화재로 인한 보수로 해체수리를 할 때 탑 안에서 진신사리 한 알이 나왔고, 그 옆의 비석에 그 사리가 나타난 전말이 자세히 적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낙산사 대화재 발생한 뒤
해체 수리 과정에서 발견

17세기 관음상 중수할 때
공중에서 사리 한 알 현신
관음굴 위에 탑 세워 봉안

춘천부사 지내던 이현석이
당시 상황 상세히 비문 기록

낙산사는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전국구’ 사찰이다. 국민 대부분 ‘낙산사’라는 이름 석 자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거라는 데 머뭇거림 없이 한 표 던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해수관음보살상이 높다랗게 우뚝 자리하고, 그 외에도 의상대·홍련암 등 이야깃거리와 볼거리가 아주 많은 명찰이다. 사시사철 관광지로 각광받는 입지조건 역시 낙산사가 유명해지는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절 어느 곳에서든 동해의 푸른 바닷물과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눈앞에 펼쳐져 보인다. 물론 역사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낙산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相)이 세운 화엄 10찰의 하나로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자못 큰 곳이다.

그런데 이곳이 우리나라 사리 신앙의 역사가 이루어졌던 무대였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의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편에 잘 나온다. 의상은 관음보살을 친견하겠다는 원을 세우곤 바닷물이 넘실대며 드나드는 굴속에서 수행했다. 칠일이 지나자 바닷물에서 수정 염주 한 꿰미가 저절로 솟아올라 의상에게 전해졌고, 이어서 동해의 용이 와서 ‘여의보주’ 한 알을 그에게 바쳤다.

의상은 자신의 원이 통한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칠일을 정진했고, 드디어 염원대로 관음보살을 뵈었다. 관음보살은 의상에게 굴 위에 법당을 지으라 하였다. 그는 이 말을 따라 ‘성전(聖殿)’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낙산사다. 의상은 절을 짓고 나서 굴에서 수행할 때 받은 수정 염주와 여의보주를 성전에 모시고는 길을 떠났다. 훗날 고려시대에 그의 자취를 따라 범일(梵日) 국사가 낙산사에 머물렀다. 그는 홍건적이 쳐들어온 난리통에 그만 의상 스님의 보배를 잃어버렸지만 기이한 인연으로 인해 극적으로 다시 되찾았다. ‘낙산이대성’이란 소제목은 바로 의상과 범일을 말한 것이니,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은 의상의 염원이 범일 국사에까지 이어진 거라고 본 것일까?

그런데 낙산사에는 위에서 말한 ‘두 보배[二寶珠]’ 외에 또 하나의 보배가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퇴락한 절을 중수할 때 하늘에서 사리 한 알이 내려오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기적의 전말이 바로 이번 테마의 주제 ‘공중사리비’에 자세히 나온다. 이 비의 정식 이름은 ‘낙산사관음공중사리비명병서(洛山寺觀音空中舍利碑銘幷序)’, 줄여서 ‘공중사리비’다. ‘낙산사 관음보살이 공중에서 사리를 보낸 일을 적은 비석’ 쯤으로 번역하면 될 것 같다. 조선시대에 홍련암의 관음보살을 중수할 때 공중에서 사리 한 알이 나타났던 일을 이현석(李玄錫, 1647∼1703)이 주옥같은 글로 풀어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지은 이수광의 증손이니, 그의 비범한 문장은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모양이다. 그는 1676년 8월 예문관(藝文館)에서 처음 관리의 길로 들어선 이후 30년 가까이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관직생활을 보냈다. 1690년 3월 강원도방어사 겸 춘천 부사(府使)를 맡았을 때 이 ‘공중사리비’를 썼다. 비문을 평하자면, 불교를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안 나올 글인 데다가 그 내용도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그 말고 다른 누가 과연 이만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까 싶게 잘 지은 글이다. 전체 813자 모두를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관계로 일부는 생략해야 되는 게 너무 아깝다. 비문의 시작은 의상 스님의 낙산사 창건과 당시의 이적(異蹟)을 말하면서 기다란 얘기를 풀어나갔다.

▲ 사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기록돼 있는 공중사리비.

“우리나라는 산수가 아름다워 천하에 이름을 드날리는데, 영동(嶺東) 지방은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영동 팔경’ 중 낙산사가 가장 유명해, 말하는 사람에 따라서는 팔경 중에서 으뜸으로 놓기도 한다. 이것은 선인들의 글에도 잘 나와 있다. 낙산사의 신령한 자취는 아주 뚜렷하며 특히 관음굴은 극히 보기 드문 곳이다. 의상과 원효 스님 등이 관음의 진신을 친히 배알했는데 특히 의상 스님에 관해서는 용이 구슬을 바치고 새가 비취를 건넸던 신비로운 자취가 전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문인들과 선승들이 그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관음굴 앞에 있는 전각에는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관음전은 만력 기미년에 중건되었는데 상량하는 날 파랑새가 날아와 울고 갔다고 한다.

(我東 以山水勝 名天下 而嶺東爲一國之最 嶺東稱八景 而洛山寺尤著聞 譚者 或以冠之 前輩之敍述備矣 寺之靈跡甚棠 而觀音窟極奇詭 義相元曉輩所云 親拜眞身者也 而龍珠翠鳥之異 文士名禪之記 固有不可誣者云 窟前有觀音像妥奉之殿 重建於萬曆己未 上樑日 有靑雀飛鳴焉)

위에 나오는 ‘만력 기미년’은 1619년이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400년 전이다. 다음에는 자신이 이 탑비를 쓰게 된 연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석겸 비구 등이 커다란 서원을 세운 뒤 관음굴 위에 탑을 세우고 그 명주를 봉안하기로 했는데 9년이 지나서야 공사가 끝났다. 그 다음해 계유년 여름 절에서 사람을 보내어 대관령을 넘어 수백 리를 달려와 나 수춘거사를 찾아와 글을 청했다. 내가 다 쓴 다음 한번 읽고 나서는 한바탕 크게 웃고 건네주었다.”

(比丘釋謙等 發大願 造石塔 據窟之頂 以藏神珠 越九年工始訖 乃於翌歲癸酉夏 踰大嶺 走數百里 乞銘於壽春居士 居士讀記而一笑)

이어서 이현석은, 불교에는 여러 가지 신이한 현상이 많이 발견되어 헛된 말 같지만 잘 따지고 보면 바로 그러한 점이 불교의 신령스런 점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전하는 말이 어떤 형식을 하고 있느냐로 불교를 바라볼 게 아니라 그 속뜻을 잘 헤아리는 게 중요하다고 했으니, 불교에 대한 그의 심오한 철학을 잘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유학자로서는 하기 참 어려운 말이었을 텐데 주저 없이 소신대로 말한 것이다. 그가 평소 불교에 대해 얼마나 깊이 성찰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일 것이다. 다음에는 이 문장의 결론이자 핵심인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사리라는 존재에 관한 솔직하면서도 철학적 해석이다.

“이른바 사리라는 것이 군자 입장에서는 어찌 그렇게 쉽게 입에 담을 말이겠는가? 그렇지만 사리에 대한 이해 역시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옛날에 어떤 여인이 배[船]를 타고 오가며 장사하는 사람과 정을 맺고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들어 죽고 말아 사람들이 화장을 해주었다. 나중에 보니 가슴 부분에서 푸르고 빛나는 구슬이 있었는데 그 생김새가 마치 배에 올라탄 형상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이 구슬을 들어낼 무렵 상인이 뒤늦게 도착했다. 상인은 사리 얘기를 듣자 한번 보고 싶다고 청했다. 아버지에게 사랑했던 이의 사리를 건네받은 그는 슬픈 마음에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이 사리에 닿자마자 사리는 부서졌다고 한다. 이것은 황탄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 내 말을 그치고자 하니, 부디 탓하지 말기를! 이에 다음처럼 읊어 비석에 새겨 넣었다.

‘부처님은 본디 아무 말 없었으되/ 명주로 대신 현묘함을 말하고/ 명주 역시 빛을 감추었으나/ 글을 빌려 미묘함을 드러내네/ 글자야 쉽게 사라지지만/ 돌에 그린 그림은 오래 가리/ 구슬인가 돌인가/ 어느 것이 거짓이고 어느 것이 참인가/ 도(道)는 이제 그만 떠나보내리/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가/ 이제 명주(明珠)를 얻었으니/ 중생도 신령함을 얻겠네’

가선대부 강원도방어사 춘천도호부사 이현석이 글을 짓고 썼다. 비석은 갑술년 5월5일에 세웠다.”

(第其所稱舍利者 豈君子之可語也哉 曰 此亦一理也 昔有女子繫情船上賈 意不遂而病死 火其屍 當心得靑瑩珠 隱然有乘船樣 其父異而收之 商客後至 聞而請見 淚滴而珠銷…遂以斯說 應謙之請 仍系以銘曰 佛本無言 現珠著玄 珠亦藏光 借文以宣 文之懼泯 晝石壽傳 珠耶石耶 誰幻誰眞 辭乎道乎 奚主奚賓 於焉得之 衆罔有神 嘉善大夫江原道防禦使春川都護府使李玄錫撰幷書篆 甲戌五月日立)

▲ 사리탑에서 나온 사리병과 진신사리.

지금껏 본대로 ‘공중사리비’는 공중에서 내려온 사리에 대한 일을 적은 글이다. 그런데 그동안 쭉 잊혀 왔다가 지난 2006년, 400년이 지나서야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났으니 보통 인연이겠는가! 진신사리는 신라시대 때부터 봉안되었을 것이라는 전문가의 의견도 있었다. 낙산사의 사리신앙이 무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다란 인연을 이어온 것이다. 사리장엄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가 봉안되어 왔다. 하지만 낙산사 탑비처럼 사리봉안의 과정과 의미가 소상히 전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 면에서 이 두 문화재는 세월의 이끼 속에 꼭꼭 묻혀 있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보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이제 새로 얻은 보배를 보며 열광하면 된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42호 / 2014년 4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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