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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순천 송광사 연천옹유산록 현판

화재로부터 사찰 지켜주는 동자상 기묘한 이야기 담겨

▲ 연천 홍석주가 어느 가을날 순천 송광사에 들려 스님들로부터 들은 동자상 얘기를 기록한 현판.

옛날 사람의 글은 기회 되는 대로 찾아서 읽는 편인데 주로 사찰의 역사와 관련된 사적기나 시(詩)들을 자주 본다. 지은이 중에는 스님도 있고 내로라하는 유명 문인들도 있다. 어떤 이는 마지못한 듯 약간 건성으로 쓰고, 어떤 이는 자신이 유학자임을 잊은 듯 불교와의 오묘한 이치에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했다. 진정한 마음은 어떻게든 드러나는 법이라 그런 글을 읽으면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밤새워 도란도란 얘기하는 느낌이 든다. 고금의 세월을 뛰어넘은 대화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인가 싶다. 지금 소개하는 이는 조선시대 후기 문예의 황금기로 불리는 18세기에 태어나 당대의 손꼽는 문장가였던 홍석주(洪奭周, 1774~1842)다. 그는 중년에 송광사(松廣寺)에 들렀다가 들었던 신기한 이야기를 꾸밈이 아닌 실제로 받아들이고 이 글을 남겼으니 얼마나 고마운 친구인가.
 

현판에 기록 남긴 홍석주는
좌의정 지낸 18세기 대학자
충청 관찰사 때 쓴 글 추정
송광사 섬세한 묘사 일품

송광사 나무로 만든 동자상
수호신처럼 화재 지켜주다
선암사 승려 탐내 가져간 뒤
송광사로 돌아온 사연 적어

먼저 이 글을 지은 홍석주부터 소개한다. 그는 영의정 홍락성(洪樂性)의 손자이자 우부승지 홍인모(洪仁謨)의 네 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손아래 아우 홍길주는 수양의 방법에 대한 ‘숙수념(孰遂念)’을 썼고, 여동생 홍원주는 시로 낙양의 지가를 올린 여류시인이다. 또 막내 홍현주는 정조의 둘째딸 숙선옹주(淑善翁主)와 결혼해 임금의 사위인 부마(駙馬)가 되었는데 그의 글 솜씨도 녹록치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가정적 분위기야말로 그가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성장하게 된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그의 학문과 문장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1795년의 전강(殿講)에서다. 전강이란 벼슬아치나 학자들이 임금 앞에서 자신의 학문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때 당당히 수석을 차지했다. 또 그 해에 관리들만 따로 보는 시험인 춘당대(春塘臺)에서도 수석에 올랐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고시 전관왕’이 되었다고나 할까. 관운도 좋아서 관직에 나선지 10년 만에 정3품 이조 참의(參議)가 되어 관료사회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당상관이 되었다. 이후 예순 무렵에 홍문관 대제학을 맡은 뒤 이조 판서와 좌의정까지 올랐다. 이렇듯 그는 학문과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거의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품이 고요하고 겸허해 지위가 정승에 올랐지만 평민처럼 처신했다 하니, 성공의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훌륭한 성격이 밑바탕 되었는가 보다. 그는 문장이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인격 수양이 된 다음에야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여유와 절제를 문장의 기본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 현판의 제목 ‘연천옹유산록(淵泉翁遊山錄)’의 ‘연천(淵泉)’은 홍석주의 호다. 시기로 보아 충청도 관찰사를 지낼 무렵에 지은 것 같다. 어느 가을날에 명찰 송광사를 찾아간 첫걸음부터 글은 시작한다.

“석곡원에서 왼쪽을 끼고 돌면 나오는 넓고 맑은 강을 끼고 30리를 갔다. 저녁 무렵 오미천(五美川)을 건너니 산과 물의 모습이 그야말로 밝고 아름다워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전에 묘향산의 절에 참배한 적이 있었는데, 송광사도 그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이미 어두워져 주위가 컴컴하건만 단풍나무 숲은 마치 횃불을 밝혀놓은 듯 붉은 빛을 발하고 있다. 시내 위에 삼청각(三淸閣)과 우화각(羽化閣)이 날아갈 듯 세워져 있고, 석문(石門)에는 달이 드리워져 있다. 그 아래로 물이 졸졸 흘러가는데 마치 은하수를 펼쳐놓은 듯이 맑디맑다. 건물 아래로 한 바퀴 돌아본 다음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온 주변이 티 없이 깨끗하여 한 폭의 그림 같아 별천지에 온 듯하다. 오랫동안 앉아 경치를 음미했다. 밤이 깊어 천왕문과 해탈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 용화당에서 묵었다. 방이 깨끗하고 잘 꾸며놓아 이게 바로 기원정사가 아니랴 싶었다.”(自石谷院左挾 廣淸江行三十里 車馬可馳 暮涉五美步 山容 水姿明媚 可喜 較詣妙香山門 無多遜焉 時已昏黑 楓林列炬 燁燁飜紅 三淸羽化閣 參差飛驚 石門偃月 下通流水 淸潺布漢 周于堂下 踏閣凭欄 灑落澄明 比朝畵所見 尤別區一大的 吟倚良久 夜深由天王門解脫門入 止宿龍華堂 淸房華幄 不類秪桓精舍)

석곡원을 출발하여 송광사에 이르는 노정과 그곳에서 본 아름다운 산하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전에 갔던 ‘묘향산의 절’이란 보현사일 것이다. 나는 송광사를 묘사한 숱한 글 중에서 이만하게 정취 있게 그려낸 글을 아직 못 봤다. 절과 자연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써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송광사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때였다. 비록 어둔 밤이기는 해도 삼청각과 우화각 주변을 서성거리며, 그 아래로 흐르는 물빛이 횃불에 반사되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는 홍석주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별천지에서의 ‘황홀한 배회(徘徊)’를 경험했을 그가 부럽다.

▲ 순천 송광사 전경.

이번에는 홍석주가 보고 들은 송광사의 역사 가운데 가장 기이한 내용이 나온다. 단순히 사전(寺傳)이라고 하면 분명 황당한 소리라고 할 테지만, 이 이야기는 불교도가 아닌 당시의 대표적 유학자가 듣고 전하는 말이니 그럴 수도 없게 생겼다. 홍석주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본다.

“서쪽으로 치우쳐 관음전이 있다. 기둥머리 위에 동자(童子)의 모습을 나무로 자그맣게 깎아 올려놓은 것이 보인다.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인데 두 무릎 이하는 훼손되어 있다. 그렇지만 몸체는 뚜렷하게 남아 있다. 괴이하여 물어보니 스님이 지난 정사년(1797)의 일이라고 하면서 대답해 준다. 한밤중에 삼청각에 불이 났으나 스님들은 잠들어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문득 마당에서 “삼청각에 불이야!”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스님들은 놀라 일어나 문을 열고 보니 깜깜하여 희미하지만 머리를 기다랗게 땋은 동자 하나가 회랑 주위를 돌며 외치곤 관음전 안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게 아닌가. 스님들은 그제야 불이 난 걸 알고 모두 나와 불을 끄려 했지만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절에 전해 내려오는 얘기 가운데 불이 나면 반드시 대장각에 봉안한 불상을 불 난 곳으로 향하도록 하라는 말이 있었다. 이에 한 노스님이 그 말대로 불상을 그쪽으로 돌려보았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갑자기 동이로 붓듯이 하늘에서 비가 쏟아내려 불은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그래서 삼청각 말고는 불길이 더 이상 번지지 않아 나머지는 온전할 수 있었다. 일이 진정된 다음, 스님들이 비로소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향나무로 동자상을 만들어 봉안했다.

그런데 그 무렵은 선암사(仙巖寺)도 화재가 나서 중건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선암사 스님들이 서로 얘기하기를, ‘송광사에 신동(神童)이 있어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게 해주었다네. 그래서 상(像)을 만들어 화기를 진압한다고 하더군. 그걸 가져와 우리 절에 두어 화기를 누르는 것이 어떠한가?’ 하여 마침내 그 상을 가져가 선암사에 두었다. 그러자 동자가 여러 번 꿈에 나타나 말했다. ‘나를 돌려다 놓으라. 이런 짓 두렵지 않은가?’ 그러나 스님들은 괴이하게만 여길 뿐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얼마 안 있어 다시 불이 나버렸다. 그러자 선암사 스님들은 이 동자상이 영험이 없다하여 산의 계곡 사이에 갖다 버렸다. 동자는 이번에는 송광사 스님들의 꿈에 나타나 자신을 찾아가라고 했다. 송광사 스님들은 산을 샅샅이 뒤져 동자상을 드디어 다시 찾았다. 그런데 찾고 보니 몸체에 손상이 나 있었다. 스님들은 이번에는 석상으로 만들어 나한전의 처마 사이에 봉안하였다. 이래서 되찾은 목상과 더불어 목상과 석상이 함께 봉안되게 되었다.

스님들이 이 상을 ‘매산(梅山)’이라고 부르기에 그 뜻이 무어냐고 물어 보았더니 모두들 모른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30년이 넘은 일이지만 이 절의 스님들은 그 일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또한 거기에다가 동자상에 훼손된 모습까지 남아 있다. 내가 직접 그 두 상을 눈으로 확인했으니 허황하고 징험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그로부터 수천 칸에 이르는 전각들이 지금까지 한 번도 불타지 않았다니 아닌 게 아니라 이것이 바로 신의 보호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西偏觀音殿 柱頭栱上 安刻木小童子 開兩臂 毁雙膝 但軀體兀然 怪問之 僧言 往在丁巳 三淸閣中 夜失火 居僧莫之覺急 忽有人大呼曰 三淸閣火 驚起開戶 黑暗中 微見髮髮者 繞廊而走廻 視之奔入觀音殿 因不見 諸僧並力救火 終不得撲滅 寺中舊傳 寺有火警 必將大藏閣所安佛 軀向火坐 及是 老僧如其言回佛坐 少頃 雨立飜盆火熄 不復延三淸 以外俱得完 事定 僧徒咸異之 遂刻香壇 像童子而安之 及仙巖災而重新 仙僧相與謀曰 松廣以神童 免延燒 像以鎭之 蓋取之爲我寺鎭 遂竊搬之 後童子屢夢告 還我且懼之 僧不省尋 复警 於火遂以爲不靈 擧委之山谿間 童子又發蒙於松之僧 僧廣搜而得之 形毁方其盜喪也 僧徒治石像安于羅漢殿簷間 及還舊像 木石並存 仍名之曰 梅山 梅山云者無稽不可解 今去三十餘年 居僧歷歷道其事 且跡其成毁 觀厥兩像 不可謂誕幻無徵 且數千間連甍接撫者 歷千歲無災 神所持也)

참 기이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송광사에는 나무로 만든 동자상이 있어 일종의 수호신처럼 화재로부터 지켜주었고, 이 동자상을 선암사에서 탐내어 가져갔다가 효험이 없어 버려 송광사에서 다시 찾아와 잘 봉안했다는 이야기는 마치 한 편의 시나리오를 읽는 것 같지 않은가? ‘매산’이 무슨 말인지 홍석주나 송광사 스님들도 모른다고 적었는데, 근래 송광사 성보박물관장 고경 스님이 매산은 어린아이를 뜻하는 말임을 문헌자료에서 찾아냈다.

송광사에 관한 많은 글들이 전한다. 사적기도 있고, 비문도 많지만, 송광사의 모습을 모두 1200자 가까운 장문 속에 정확하고도 우아한 문체로 그려낸 이 글만한 것이 있을까 싶다. 이 글을 보면 옛 글을 읽는 즐거움을 재삼 느끼곤 한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44호 / 2014년 5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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