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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영천 백흥암 수미단

탄탄한 스토리 바탕으로 조각과 회화 어우러진 명품

▲ 국내 최고의 수미단으로 꼽히는 영천 백흥암 수미단.

대웅전이나 극락전 같은 전각은 불교미술의 관점에서 보면 보배가 그득히 담긴 보물창고 같은 곳이다. 그 안에는 갖가지 다양한 작품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광채를 발하고 있다. 전각 자체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불국토를 만들고 있으니 이런 전방위적 장엄은 당연한 일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의 영산회상 불국토를, 극락전은 서방의 극락정토를, 미륵전은 먼 훗날에 출현하여 사바세계를 제도하는 용화세계를 표현한 곳이다. 한 마디로 전각은 그 자체로 경전에 나오는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번뇌가 없는 상락정토(常樂淨土)를 묘사한 것으로 보면 된다.

수미단은 깨달음 과정 형상화
가장 상상력 풍부한 미술 분야
각종 설화 담긴 문학 파노라마

온갖 화초와 숱한 동물 그려져
사람 머리 지닌 물고기 등장
별주부전 내용도 몇 장면 묘사

당대 문화상징의 아이콘 집결
속박서 벗어나려는 노력 결실

불교미술의 핵심 요소는 장엄(莊嚴)이다. 장엄이 없는 불교미술은 없고, 불교미술은 장엄을 기본으로 해서 조형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엄이 이토록 중요한 까닭은 부처님과 불국토의 위엄을 한층 드러내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중생으로 하여금 그 아름다움에 감화를 일으켜 사찰을 찾아 부처님의 나라를 경험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즉 장엄에 대해 단순한 외양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그 의미까지 이해했다면 불교미술을 이해하는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전각에 들어간 사람들의 시선은 대개 불상이나 불화에 집중될 뿐 그 많은 다른 예술품에는 눈길이 잘 미치지 않는 것 같다. 불상과 불화가 워낙 부처님을 직접 표현하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사실 또 다른 이유로는 대부분 사람들이 불상이나 불화 외의 장엄에는 폭넓은 지식을 얻을 기회가 별로 없었던 까닭도 있을 것 같다. 그야말로 ‘미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 경우인 것이다.

우리들의 눈길이 잘 안 닿는 곳 중 하나가 수미단(須彌壇)이다. 불상을 올린 목조 받침 탁자가 이것인데, 혹은 불탁(佛卓)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불탁’이란 말에는 어쩐지 기능성만 표현될 뿐 어감이나 어의(語義) 면에서 너무 딱딱하다. 이보다는 ‘수미단’이라는 단어가 훨씬 부드럽고 뜻을 재삼 음미하게 만드는 말인 것 같다. 그런즉 수미단의 의미를 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흔히 수미단은 ‘높이’로 표현하고 설명하는데 나는 이게 잘못되었다고 본다. 저 아래 축생계에서부터 저 높은 곳에 있는 부처님의 세계까지 형상화한 것이 수미단이지만 과연 이것을 지금처럼 원뿔형 모형으로 제시해야만 할까? 깨달아 가는 과정을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승형(上昇形) 구조로 표현하는 게 옳은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막연히 부처님이 머무는 도솔천(兜率天)을 하늘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부처님의 세계인 도솔천이 구름 위 하늘에 있다는 말은 어떤 경전에도 없다. 도솔천은 실제로 볼 수 있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불성(佛性)의 추상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축생계서부터 시작해 불계(佛界)로 끝나는 과정은 공간적 높이가 아니라 깨달아가는 과정의 ‘깊이’를 말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축생계가 맨 위로 가고 거꾸로 불계가 맨 아래로 온들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신앙은 상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생의 한계가 나온다. 아무리 생각이 깊고 높아도 이를 눈으로 확인하게끔 형상화 하지 않으면 실감이 안 나고 이해가 잘 안 되는 게 사람인 것이다. 수미단이란 깨달음의 과정을 나타내야만 하는 구조라 이를 어쩔 수 없이 공간적 높이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추상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니 수미단을 볼 때는 눈으로만 감상할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깨달음의 이치를 마음속으로 새겨보아야 제대로 된 감상이랄 수 있다. 미술작품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찬사를 받을 수 있지만, 불교미술은 여기에 더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깊고 먼 부분을 상상하게끔 하는 데 가치를 두어야하기 때문이다.

경북 영천의 백흥암(百興庵) 극락전에 있는 수미단은 다른 수미단을 대표할 만한 걸작이면서 동시에 ‘수미단’이라는 건축의 일부를 하나의 독립 장르로 끌어올린 명품이기도 하다. 이제 이 백흥암 수미단을 감상해보겠는데, 불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만 내려서 수미단을 자세히 보면 아래에서 위로 몇 단(壇)으로 구획되었고 각 단마다 여러 가지 무늬나 장식이 아주 화려하게 수놓아진 것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이 순간부터 수미단의 진정한 감상은 시작된다.

우선 앞면과 옆면 가득히 가지가지로 장엄한 장식을 눈여겨봐야한다. 그 중에는 오로지 수미단에서만 보이는 아이콘도 있다. 그만큼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뜻이다. 이토록 흥미로운 장르는 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 한마디로 단언하고 싶을 정도다. 수미단의 장식은 기술적으로는 조각과 회화의 결합이고 내용으로는 불교문학의 파노라마라고 할 수 있다.

수미단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재는 부처님 전생의 이야기 ‘본생담’이다. 또 수천 년 동안 경전과 구전으로 전해오던 다종다양한 설화가 독특한 표현력으로 담겨 있다. 수미단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본생담’ 장식은 책에 실린 기다란 이야기로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게 아니라 멋있게 채색되고 조각된 아이콘으로 단박에 설명하는 것이 목적이다. 불전도를 설명하기 위한 ‘그림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수미단에는 하늘을 나는 물고기·꽃·새·사슴·나비 등의 축생이 가릉빈가·동자·용보다 더 크게 표현된 것도 재미있다. 이를 가리켜 인간과 만물은 어느 한쪽이 더 위대한 게 아니라 모두 똑같은 존재라는 깨달음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미학과 철학이 장엄 장식에 녹아 있는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까. 전체적으로 상하 3단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얼핏 보면 5단인 것 같지만 맨 아래는 하대이고 맨 위는 공양물을 얹는 상대라서 이 둘을 뺀 중앙의 3단으로 이루어진 중대가 바로 실질적 수미단에 해당한다. 수미단은 각 단마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아주 다양한 무늬들이 아름다운 색깔을 입고 조각되어 있다. 연밥이 후덕하게 벌어진 연꽃은 물론이고 국화·당초·모란 그리고 갖가지 풀들이 펼쳐져 있다. 마치 커다랗고 탐스러운 꽃밭에라도 온 듯하다. 또 그 속에서 코끼리와 용·비천 등이 즐거이 노니는 모습도 눈앞에 있다. 3단 중에서 가장 아래인 하단에는 정면에 불교 이야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연꽃 등의 화조문이 주요 무늬로 장식된다. 이들은 모두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인데, 반면 옆면으로 가면 앞면과는 딴판으로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여러 서수(瑞獸, 불교를 장식하는 전설속의 동물들)들이 칸마다 가득 장식되어 있다. 현실에 없는 존재들이 현실성 있게 표현된 것이 재미있다.

▲ 백흥암 수미단에 나타난 다양한 그림들.(위부터 비천상, 코끼리, 사람머리 물고기, 별주부전 묘사한 그림.)
중단에는 부처님 전생의 이야기인 ‘본생담’에서 장면 하나하나를 따와서 스토리를 엮어내고 있다. 이렇게 수미단 장엄에 ‘본생담’이 표현된 것은 그다지 흔한 일은 아니고 백흥암을 비롯해 전등사·선운사·파계사·직지사·선석사·통도사 등에만 나타난다. 이들 사찰들은 조선 후기에 태실(胎室, 왕족의 태를 봉안하는 곳)을 관리하는 왕실의 원찰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수미단의 장엄은 ‘본생담’ 외에도 조선시대 중기부터 널리 보급된 한글본 불교경전에 나오는 불교설화와 교훈적 이야기도 나타난다. 그런 장식 중에서 수미단에만 나오는 아주 흥미로운 소재가 비인비(非人非)다. 이것은 일종의 나찰(那刹)로, 우리나라 미술 중에서 오직 백흥암 수미단에만 나오는 존재다. 통도사와 환성사 대웅전 수미단에도 비슷한 모습이 나오지만 단연코 백흥암의 그것이 훨씬 멋있다. ‘비인비’란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혹은 ‘사람도 동물도 아닌’ 캐릭터를 말한다. 쉽게 말해서 ‘의인화된 동물’을 뜻한다. 예를 들면 용왕을 상징하는 용이 그런 존재고 또 머리는 사람이지만 몸은 물고기인 인두어신(人頭魚身)도 있다. 인두어신이란 서양의 인어와 흡사하다. 인비인 중에는 중국의 고대 박물지(博物誌)인 ‘산해경(山海經)’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 하동(河童)이 보주(寶珠)를 공양하는 모습, 새하얀 비단 옷을 휘날리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천(飛天)도 있다.

인비인이 장식의 아이콘이 된 것은 이들이 곧 전생의 업보 탓에 윤회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 중생의 삶을 거기에 투영시킴으로써 선업을 쌓을 것을 묵시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또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에는 17세기에 처음 나타나 이후 주요 판소리 소재의 하나가 되었던 ‘별주부전’의 줄거리도 몇 장면 묘사되어 있다. 한마디로 당시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들은 다 모였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미술은 2차원 아니면 3차원의 예술이다. 어떻게 그리고 새기고 짓든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3차원에서 살고 있으니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예술은 개인의 감성이 창작의 원천이 되어 2∼3차원으로 표현되는 게 본질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교미술은 신앙이 바탕이 되는데 그 신앙은 3차원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다. 말하자면 모든 불교미술은 차원 자체가 없는 불세계를 표현해야 하는데 이 무차원(無次元)의 세계를 상징하는 ‘깊이’를 나타낼 길이 없는 것이다. 불화를 아무리 뚫어지게 쳐다본들 그 안에서 깊이를 찾을 수 없다. 마음으로야 그림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도 그럴 수 없다. 건축이나 조각은 입체이기는 해도 역시 차원 속에서만 존재하니 한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불교미술에서는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해서 조각과 회화를 결합하기도 하고, 여기에 색깔과 입체무늬를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하며 차원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데 무진장한 애를 썼다. 아마도 수미단이야말로 그러한 노력이 빛을 봐 새로운 표현 방식을 얻었던 장르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46호 / 2014년 5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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