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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자보 스님의 생강 값

기자명 성재헌

생강 값 정확히 따진 제자에 미소지은 스승

▲ 일러스트=이승윤

혼자 할 수 없는 게 스승 노릇이다. 누군가에게 귀감이 되고 조직을 이끌기 위해서는 혼자 있을 때는 필요치 않던 많은 덕목을 새로이 갖추어야 한다. 그 가운데 가장 필수적인 덕목이 공(公)과 사(私)를 분명히 할 줄 아는 태도이다.

송나라 때 자보(自寶)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사창가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아냥거림 속에서 자랐지만 타고난 성품이 청렴하고 공손하였다. 그러다 장거리를 지나가는 스님들의 언행을 보고 고아한 성품과 청정한 삶을 흠모하게 되었다.

“나도 저분들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리라.”

협석사(硤石寺)로 출가한 자보는 두타행(頭陀行)을 닦았다. 대중과 떨어져 홀로 생활하며 거친 음식과 잠자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계행(戒行)을 엄수하는 생활을 고수하자 욕망의 불길이 조금씩 잦아들고, 그 빈자리에 평온한 기쁨이 깃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탐욕과 분노의 불길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완전히 자취를 감춘 듯했다가도 잿더미 속의 불씨처럼 너무도 쉽게 되살아나고는 하였다. 되살아나는 불길을 경계(境界)의 바람 탓이라 여긴 자보는 매혹적인 대상을 피해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 더 고독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애착과 혐오의 대상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자보의 평온함을 파괴하였다.
나무꾼의 노랫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골에서도 훈훈한 봄바람에 날리는 치자 꽃향기는 절로 눈길을 사로잡았고, 이른 아침 까마귀가 귓전을 어지럽혔다. 탐욕과 분노가 완전히 사라진 구경의 열반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뿌리인 어리석음을 뽑아버려야 한다는 걸 자각하게 된 자보는 선지식으로 명망이 자자했던 운문종의 사계(師戒)선사를 찾아갔다.

깡마른 몸에 꼬질꼬질한 누더기를 걸치고 찾아온 자보를 대중들은 싫어하였다. 웃음기 없는 얼굴이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고, 게다가 온몸에서 악취까지 풍겼다. 하지만 깊은 우물 속을 들여다보듯 그의 눈빛은 깊고 고요했다. 사계선사는 그런 자보를 한눈에 알아보고, 곧바로 시자로 삼았다. 자보는 철저한 계행으로 거친 불길이 이미 잡힌 사람이었다. 그런 자보가 사계선사의 지시에 따라 근본인 마음자리를 확연히 밝히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이를 알아본 사계선사는 그에게 절집의 살림살이를 맡아보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찬바람에 몸살기를 느낀 사계선사가 시자에게 말했다.

“얘야, 생강차 좀 한 잔 달여 오거라.”

시자는 광으로 달려가 소임자에게 말했다.

“방장스님께서 몸살기가 있으십니다. 생강차를 드셨으면 하니 한 근만 내어주십시오.”

광의 물품을 관장하는 스님은 난색을 표하였다.
 
“스님, 열쇠야 제가 가지고 있지만 함부로 내어드릴 수가 없군요. 지난번에도 허락 없이 물품을 내어주었다가 원주스님에게 혼쭐이 났습니다. 먼저 원주스님께 허락을 받으십시오.”

시자는 원주인 자보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 큰스님께서 몸살기가 있으십니다. 생강차를 드셨으면 하시니 한 근만 내어주십시오.”

시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자보 스님의 답이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안됩니다.”

시자는 황당했다.

“왜 안 됩니까?”

“광에 있는 물품들은 절의 상주물(常住物)입니다. 상주물은 대중의 공물이지 개인이 사사로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자는 화가 났다. “이 절의 주인이신 방장스님께서 생강 한 근도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자보 스님이 시자를 노려보았다.

“이 절은 대중의 공물이지, 방장스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상주물 역시 대중의 공물이지, 방장스님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방장스님께서 이 절의 어른이시긴 하지만 꼭 필요하다면 대중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시자는 기가 찼다. 진담인지 농담인지조차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스님, 지금 제가 어리다고 골탕을 먹이려고 그러시죠?”

자보 스님이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뭐라!”

시자가 따지듯 물었다. “그럼 큰스님께서 직접 오셔도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자보 스님이 싸늘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등에 대고 시자가 고함을 쳤다.

“스님은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군요. 큰스님께서 아프시다면 병환의 경중을 먼저 묻는 것이 제자의 도리이지, 그깟 생강이 얼마나 한다고 주판알부터 튕기십니까!”

다시 돌아선 자보 스님이 시자를 꾸짖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산중에는 산중의 법도가 있다. 대중의 공물을 공정하게 관리하는 것이 원주의 소임이고, 스승의 병환을 돌보는 것은 내 개인의 사사로운 일이다. 내 일은 내 알아서 할 것이니, 썩 꺼져라!”

곧장 방장실로 달려간 시자는 씩씩거리며 사계선사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당장 원주를 쫓아내라”며 진노할 것이라는 시자의 예상과 달리 사계선사는 “허, 허” 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뒤져 엽전 닷 냥을 꺼내 시자에게 던졌다.

“원주에게 가서 그 돈으로 생강을 사오너라.”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시자가 다시 원주를 찾아가 돈을 내밀었다.

“이 돈만큼 생강을 사오라 하십니다.”

그때서야 자보 스님은 광을 열고 아무 말 없이 생강 한 근을 달아주었다. 그날 저녁, 예불을 마치고 일과를 정리한 후 자보 스님이 사계선사의 방문을 두드렸다.

“스님, 몸살기는 좀 어떠십니까?”

사계선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웃으실 뿐이었다.

“괜찮다.”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찍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오냐, 오냐. 원주에겐 사중의 일이 우선이지.”
“스님, 수중에 돈이 없어 이것 밖에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자그마한 봉지에는 생강이 반 근쯤 담겨 있었다. 사계선사는 껄껄 웃으실 뿐이었다.

“네 전 재산을 털었겠구나. 오냐, 오냐. 고맙다.”

곁에서 흘겨보는 시자의 못마땅한 눈빛에도 사계선사는 그저 사람 좋은 웃음만 보일 뿐이었다. 얼마의 세월이 흐르고 자보 스님은 사계선사를 떠나 천하를 주유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군수가 사계선사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총(聰)선사가 열반하고 공석이 된 동산(洞山)의 주인을 천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사계선사는 편지를 다 읽고 껄껄 대며 말했다.

“나한테 생강 팔아먹은 놈이면 동산의 주지노릇을 할 만하지.”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1249호 / 2014년 6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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