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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옥수종합사회복지관장 상덕 스님“칠불통계게 화두 삼아 자비로 세상을 덮으리라”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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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14  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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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덕 스님

1980년대 초반, 미타사가 자리한 서울 옥수동에 30여명의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단국대 불교학생회 소속의 그들은 골목 어귀마다 현수막을 걸더니 거리거리 골목마다 손수 제작한 포스터를 붙였다. ‘미타어린이법회 모집!’ 이내 300여명의 신도와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900여년 전통의 고요하던 미타사에 젊은 활기가 넘쳐났다.
 
열여덟의 사미 정수암 맡아
도심포교 핵심 사찰로 우뚝
IMF 한파속에 복지관 위탁
지역주민 화합 토대 급성장
 
전생에 복 지어야 승복입어
스승 한마디 뼈에새겨 정진
반평생 동행 사제 종일스님
인생의 최고 도반이자 스승
 
무관심·무배려 자살률 높여
마음 다독이고 희망 주어야
정토구현 핵심 코드는 자비
복지활동은 세계일화 첫 발
 
얼마 후엔 미타사 소속의 ‘미타합주단’이 조직됐다. 지금의 연등축제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사월초파일 거리행진(여의도-조계사) 선두에서 다양한 연주를 선보였던 팀이 ‘미타합주단’이다. 어린이법회 소속의 아이들이 중학교에 입학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중학생법회가 열렸고 이내 고등학생과 대학생, 청년회가 조직됐다. 불과 4~5년 사이에 젊은 혈기가 꿈틀대며 살아 숨 쉬는 미타사로 변모했다.
 
깊고 긴 강물도 산 속의 한 샘터에서 시작하는 법. 미타사의 포교 활기는 단국대 불교학생회를 지도하고 있던 미타사 정수암 주지 상덕 스님의 원력에서 시작됐다. 상덕 스님은 동진시절에 정수암과 인연을 맺었다. 누구보다 해운당(海雲堂) 경화(璟華) 노스님과 은사인 법성(法性) 스님이 어린 상덕 스님을 귀여워하며 보살폈다.
 
10대인 상덕 스님이 학교에서 귀가할 때면 80대의 해운 스님은 어김없이 절문 앞까지 나와 기다렸다. 마당에 떨어진 감꽃을 주워 꽃목걸이로 만들어 주시며 ‘상덕은 참 곱다’ 했던 스님. 잠들 때까지 부채질 해 주시며 등을 토닥거려 주시던 해운 노스님이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덕 스님이 삭발한 후 얼마 안 있어 이내 열반에 들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상덕 스님이 명성여중을 다니던 시절 은사 법성 스님도 입적했다. 15년의 짧은 만남! 열여덟의 사미 상덕 스님은 정수암을 맡아야했다. 사춘기 소녀의 감성이나 낭만은 상덕 스님에게 사치였다. 자신보다 어린 사제들 돌보며 인연 맺은 신도들과 함께 정수암을 일궈갔다. 누구보다 사숙인 재문 스님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미타사 사중법회 개설과 사찰 운영의 토대를 다진 상덕 스님은 자신이 암주로 있는 정수암 운영에 집중하기로 했다. 스님의 창의성이 돋보인 가족법회가 선을 보인 것도 이 때다. 1984년부터 봉행된 청년법회. 1994년까지 10년동안 매주 일요일 이어진 이 법회를 스님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성동경찰서 봉축법회 역시 30여년 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딱 한 번 봉행하지 못했다. 세월호 침몰 희생자 애도의 뜻으로 올해 봉축법회를 접었다.
 
1997년 IMF 한파 속에서도 스님은 옥수복지관 위탁 영입금 1억5000만원이라는 큰 빚을 내 지금의 옥수종합사회복지관을 위탁받아 1998년 개관했다. 매달 운영자금을 확보하느라 백방으로 뛰었을 상덕 스님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스님은 모든 역경을 딛고 개관 8개월 만에 서울시로부터 상등급 평가를 받았다.
3년도 채 안 돼 다른 지역 복지전문가들이 참관하러 올 정도의 모범복지관으로 우뚝 세웠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묵묵히 걸어 온 길이다. 그 기나 긴 여정에서 만난 고난 또한 녹록치 않았을 법한데 어찌 넘어섰을까. ‘해운, 법성이라는 두 스승이 있었기에 오늘의 상덕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상덕 스님은 해운, 법성 스님이 자신에게 전한 메시지를 상기했다.
 
“해운 스님이 이르셨습니다. ‘상덕 너는 정수암의 대들보가 될 것이다. 그러려면 부처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수암 3대를 잇는 맏상좌임을 명심하라’ 했던 법성 스님 또한 입적하셨던 그 해 상좌들에게 새 승복을 지어주면서 전하셨습니다. ‘승복은, 전생부터 아주 복을 많은 지은 사람들이 입는 것이다. 그러니, 삭발하고 승복 입을 때마다 복 짓는 일을 해라.’ 이 가르침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 두 어른은 상덕 스님에게 ‘당부’가 아닌 ‘법’을 설했던 것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일생동안 실천해야 할 ‘법’이였다. 두 스승의 가르침을 뼈에 새긴 상덕 스님은 우리나라 국토 곳곳에 ‘법의 꽃’을 피워보겠다는 듯 포교의 씨앗을 뿌려갔다.

   
▲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어린이·청소년포교는 물론 영등포 교도소와 구치소 법회도 이끌어왔다. 수감 상황을 염두에 두며 자극적이지 않은 단어 선별과 희망 내용에 유의하며 법을 설했을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법회가 끝나고 난 후 일주일 내내 진정한 참회와 감사의 마음을 기록한 편지가 하루도 빠짐없이 잇따라 날아들었다. 성동구청, 한국은행불자회, 한국전력불자회, 동대문시장 직물계불자회 등의 수많은 신행단체 법회를 창립하며 지도법사로 활동했다.

명성여중고를 삭발한 채 다닌 상덕 스님. 어린 나이였지만 급변하는 시대에 공부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쳐진다는 사실을 직감했던 것이리라. 당시 타올랐던 학구열은 지금까지도 식지 않고 있다.
 
1978년 동국대 승가학과를 졸업한 후에도 스님은 30여년간 내외전 공부에 매진했다. 3곳의 대학원을 수료하고도 사찰경영, CEO과정에도 도전한 스님이다. 동국대 입학과 졸업 횟수가 7번에 이른다. 2005년부터 3년간 불교대학원에서 불교사회복지를 강의하기도 했다. 지금도 명상상담, 꽃꽂이, 차, 도자기 등 포교에 필요한 교육이 있다고 하면 언제든 달려가 배워놓는 상덕 스님이다.
 
복지관을 중심으로 한 보살행 또한 남다르다. ‘자비, 연기, 보시’를 행동지침으로 복지세상을 구현한다는 관훈에서 스님의 원력이 읽혀진다. 그래서일까? 옥수종합사회복지관은 이웃들에게 물질적으로 돕는 시혜적인 프로그램에서 벗어나 있다. 지역 마을의 이웃들끼리 소통하며, 마을의 문제점이나, 어려운 점들을 서로 이해하고 도우며 행복마을을 스스로 가꿀 수 있는 ‘자조모임’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일례로, 엄마들이 아이들의 놀이를 직접 공부해 ‘육아품앗이’ 활동을 하는 ‘맘 품 교실’, 지역주민 누구나 자신의 재능을 나눌 수 있는 ‘성동e-품앗이 사랑 터’, 조부모와 미취학 자녀들이 함께 모여 한국의 전통생활을 체험하는 세대통합 모임 ‘까꿍 우리 손주’ 등은 지역주민 화합에 큰 힘이 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발달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연화아동상담센터’에서는 놀이와 미술, 음악을 이용한 장애치료서비스도 진행하고 있다. 정상적 사회활동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장애아 방과 후 교실’ 또한 지역주민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복지에 남다른 힘을 쏟아 붇는 연유가 궁금하다.
 
“노령인구가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빈부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다문화사회에 접어든지 오래지만 아직도 외국인 노동자나 여성들은 기본적인 인권마저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들의 편에 서야 합니다.”
 
   
▲ 종교 벽을 넘어 함께 실천할 수 있는 건 ‘나눔’이다.

종교단체의 복지관이 그들의 힘이 되어주어야 더불어 함께하는 세계일화의 세상이 이뤄진다는 뜻이다.
“어려움이 커지면 그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은 자살을 택합니다. 자살 책임은 당사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관심에도 있다고 봅니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추슬러 희망을 잃지 않도록 다독거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가 행복심에 젖어 신명나게 살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구축해 가야 합니다. 복지는 그 불사의 일선 선두에 서 있습니다.”
 
배려심을 갖는다는 건 결국 자비실천의 첫 걸음인 셈이다.
 
“마음에 품은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자비는 말로 하는 게 아닙니다. 살며 행동하는 것입니다. 행위없는 신심은 이 사회에 별 소용이 없습니다. 보현보살 10대원도 실천하지 않으면 관념일 뿐입니다. 자비행은 불자들 삶의 핵심이어야 합니다. 저는 팔만사천 법문 대의가 ‘칠불통계게’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고 봅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모든 악은 짓지 않으려 노력하고, 많은 선을 받들어 행하라!’ 복지활동 또한 이 게송에 준합니다.”
 
옥수종합사회복지관을 중심으로 한 복지활동 자체가 수행이요, 자비실천인 셈이다. 상덕 스님은 자신을 지탱해 준 사람이 두 스승 말고 한 분 더 있다 했다. 현재 정수암 총무를 맡고 있는 사제 종일 스님이다. 동승 때부터 정수암에서 함께 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벌써 55년을 함께했다.
 
“어려운 일, 즐거운 일 함께 나누며 살아왔습니다. 때로는 서로 스승이 되어 탁마했습니다.”
 
서로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좋아하는 음식과 물건을 서로 더 챙겨주려 하고, 누군가 외출하려 하면 지갑에 용돈을 넣어주며 살아왔다. 진정한 도반이다.
“저희 둘이 그 동안 키운 동자가 10여명입니다. 그 중 둘은 출가를 해 벌써 세납 40대 중반이 되었고, 그 외는 모두 ‘정수패밀리’가 되어 정수암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상덕 스님의 미소가 만면에 가득했다. ‘나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자평한다’는 뜻일 터. 사부대중과 함께 하고 싶은 시 한수 부탁하자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의 첫 구와 마지막 구를 전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해운, 법성 스님이 그렇게 살았고, 자신 또한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리라. 그 순간 해운, 법성 스님에게 전하고 싶은 일언이 스쳐갔다.
 
“예언이 좀 빗나가셨습니다. 정수암 대들보가 아니라 한국불교 대들보가 될 것이라 해야 했습니다.”
미타사 경내를 거친 바람 한 점이 정수암 꽃밭에 앉았는지 꽃 한 송이가 살짝 흔들렸다. 상덕 스님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상덕 스님
1952년 서울 출생, 1955년 옥수동 미타사에서 법성 화상을 은사로 동진출가. 1977년 법주사에서 석암 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8년 동국대 승가학과 졸업, 1981년 경국사 불교연구원 대교과 졸업. 1978년 미타사 정수암 주지 취임. 1994년 동국대 불교대학원 수료. 1997년 서울옥수종합사회복지관 위탁. 영등포교도소 교화위원, 영등포구치소 종교위원 활동으로 법무부장관 표창. 성동경찰서 경승활동으로 서울경찰국장 감사패. 현재 정수암 주지, 옥수종합사회복지관장, 조계종 시설장협의회장을 맡고 있다.

[1253호 / 2014년 7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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