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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익산 미륵사 석탑

온갖 설화와 역사적 사실 담고 있는 한국 석탑 시원

▲ 미륵사 석탑은 돌로 만든 동양 최대의 탑으로 한국 미술사의 성지이다.

대중은 문화재를 학술의 관점에서만 보는 걸 불편해 한다. 그보다는 문화재에서 즐거움을 느끼길 바란다. 문화재를 ‘공공의 자재(資財)’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일리가 있다. ‘학술’이라는 말로 포장된 난해한 존재, 전문가에만 독점당한 문화재여서는 분명 곤란하다. 문화재라는 말에 너무 뻣뻣하게 굳어버리지 말고 자유롭게 바라보려는 시선은 창의적 관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대답하기에 ‘대략 난감’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부여 정림사지 탑과 더불어
가장 오래된 목조형태 석탑
 
삼국유사에 무왕·선화공주
600년 창건했다고 기록
 
2008년 1월, 해체복원 과정서
‘639년 사택녀 발원’ 기록 나와
 
삼국유사 내용 틀렸다기보다
창건과 완공 연대일 가능성 커
사택녀도 새 왕비일 수 있어
 
가령 탑을 예로 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은 무엇인가?”는 것이다. 질문 속엔 하나만 딱 집어 대답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는 모양이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문제다. 현재 전하는 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익산 미륵사(彌勒寺) 탑과 부여 정림사(定林寺) 탑이라는 게 정설이다. 두 탑이 동시에 세워지지는 않았더라도 양식(樣式)으로 볼 때 거의 비슷한 시기로 보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학자들은 이 두 탑을 고려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뒤늦게 시작된 우리의 미술사 연구가 점차 그 열매를 맺기 시작하던 1970년대 무렵 학자들은 두 탑 모두 백제 작품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 두 탑은 우리나라 최고(最古) 석탑의 반열에 올랐다. 두 탑에 대한 정확한 시대측정은 드디어 우리 미술사 연구가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성과이기도 했다.
 
미륵사 탑과 정림사 탑의 특징은 석탑이면서 목탑의 흔적을 뚜렷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사를 보면 새로운 유형이 나올 때 그 이전에 유행했던 양식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작(前作)에 대한 향수뿐만 아니라 새로운 양식에 천천히 적응하려는 마음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석탑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목탑의 자취가 뚜렷하게 남아 있음을 미륵사 탑과 정림사 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급격한 변화보다는 완만한 흐름을 택한 것에서 백제 미술의 유연함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목조 건축은 나무 부재의 조립이므로 바깥에서 보면 포작(包作)이나 창방(昌枋)·평방(平枋) 같은 조립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석탑은 돌을 큼직큼직하게 잘라서 올려놓는 것이니 목탑에서와 같은 조립이 있을 리 없건만, 굳이 목탑에서나 보일 조립의 흔적을 일부러 새겨 넣은 것이 미륵사와 정림사 탑이다. 이런 특징은 이 두 탑 이후에 나타난 석탑부터는 눈에 띠게 줄어들어 있다. 석탑이 그만큼 사람들의 눈에 익어가고 목탑의 잔영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8세기에 들어서면 목탑의 자취는 완전히 사라져 없고 석탑만의 모습으로 정착한다.
 
익산 미륵사 석탑은 현재 남아 있는 탑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탑에서 백제의 완전한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미륵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의 ‘무왕’조에 아주 자세하게 나온다. 서기 600년 백제 무왕(武王)과 왕비 선화(善花)공주가 익산의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獅子寺)를 찾았을 때였다. 용화산 입구에 있는 연못에 이르렀는데 문득 연못 안에서 미륵삼존이 솟아 나와 이들을 맞았다. 왕과 왕비는 미륵부처님들이 친히 자신들을 영접했다는 사실에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선화 공주가 특히 더욱 그랬던 모양이다. 그녀는 무왕에게 이곳에 절을 세우자고 했고 무왕은 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서기 600년에 마침내 미륵사를 완성했다. 지금의 미륵사는 바로 이런 창건연기를 간직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당시의 가람 규모나 배치를, “금당과 탑, 그리고 회랑을 각각 세 곳마다 지었다(殿塔廊廡 各三所創之)”라고 적었다. 그런데 이 말은 1980년부터 20년 동안 이어진 미륵사지 발굴을 통해 그대로 확인되었다. 일연(一然) 스님이 ‘삼국유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기술했는가 알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세 채의 금당마다 그 앞에 세워진 탑 3기는 발굴을 통해 동·서 탑은 석탑, 중앙탑은 목탑으로 밝혀졌다. 지금 금당은 모두 사라졌고, 탑도 서탑(西塔) 하나만 남아 있지만, 이 탑은 다른 어떤 탑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 미륵사 석탑의 심초석 발굴 모습.

미륵사 탑은 지금 6층까지만 남아 있는데 본래 7층이었는지 혹은 9층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현재 남은 모습을 스캔해서 그 비율에 맞춰 3D로 원형을 복원한 적이 있는데 그 때 9층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1993년에 새로 세운 동탑도 이에 따라 9층으로 지었다. 하지만 그래도 7층일 거라는 주장은 여전히 존재한다. 어느 쪽이든 원 모습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동양에서 가장 큰 석탑이었을 거라는 데 이론이 없다. 미륵사 탑의 양식을 좀 더 살펴보자. 기단(基壇)을 나지막하게 한 단만 놓은 것은 여느 목탑에서나 볼 수 있는 스타일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석탑이 목탑을 그대로 번안(飜案)했다는 것은 초층 탑신(塔身)부터 확인된다. 각 면마다 3칸씩 나누고 가운데 칸에 문을 만들고 그 안으로 작은 통로를 두었다. 그래서 평면으로 보면 사방에서 내부로 연결되어 중앙에서 일치되어 있고,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운 심초석을 두었다. 이런 모습은 목탑의 조립방법과 거의 같다.
 
또 초층 몸돌의 네 면에 세운 모서리기둥의 모습이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이른바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한 것도 마찬가지다. 미륵사는 조선시대 중기 무렵 탑이나 당간지만 남은 채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이후 황무지처럼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문인 강후진(姜侯晉, 1685∼1756)은 미륵사를 유람하면서 “미륵사에 벼락을 맞아 무너진 석탑이 있는데, 나이 지긋한 촌로가 이 탑에 올라가 비스듬히 누운 채 곰방대를 뻐끔뻐끔 물고 있더라.”라고 미륵사 탑을 마치 동양화 한 폭을 소묘(素描)하듯 표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이 탑의 붕괴를 우려해 몸체에 시멘트를 발라 지탱시켰다. 그런데 시멘트를 바른 모습이 너무 안 좋은데다가, 또 이 시멘트마저도 갈라지고 있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탑의 안전을 위해 지난 2007년부터 해체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탑신을 모두 해체하고 드디어 심초석까지 내려갔을 때가 이듬해 1월, 그곳에서 백제 사리장엄이 고스란히 발견되어 새해 벽두부터 국민을 흥분시켰다. 금동 외함과 내함 그리고 사리를 담은 사리병, 여기에 사리장엄 주변에 놓인 각종 보석들까지 백제의 탑 사리장엄이 원 모습 그대로 발견된 것은 2007년 부여 왕흥사지 목탑지에서 나온 사리장엄에 이어 두 번째다. 미륵사 탑 사리장엄이 아무 탈 없이 봉안 상태 그대로 출토될 수 있었던 것은 탑을 세울 때 가장 먼저 설치하는 심초석 안에 봉안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도중에 탑 일부가 무너졌어도 아무 손상 없이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보물을 얻었다는 흥분이 서서히 가라앉을 무렵 이번에는 학계가 급격히 후끈 달아올랐다. 사리장엄과 함께 발견된 금판 봉안기(奉安記) 뒷면에 적힌 다음과 같은 문장 때문이다.
 
“우리 백제의 왕후는 좌평 사택의 후덕한 따님으로 전생에 갖가지 좋은 인연을 쌓아 복을 얻어 금생에 태어나셨다. 백성을 어루만지시는 한편 삼보의 동량이 되어 재물을 희사해 가람을 짓고, 기해년(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봉안하셨다(我百濟王后 佐平沙積德女 種善因於曠劫 受勝報於今生 撫育萬民 棟梁三寶 故能謹捨淨財 造立伽藍 以己亥年正月卄九日 奉迎舍利).”
 
‘삼국유사’는 무왕과 왕비 선화공주가 발원해 600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금판에는 연도며 왕비 이름까지 전혀 다르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야기는 사실이기는커녕 허황한 전설을 그럴듯하게 적어 넣은 책이라는 혹독한 비판까지 나왔다. 일연 스님이 들었다면 억울해 땅을 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 뒤 금판의 기록에 대한 새로운 해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즉 ‘삼국유사’에 나오는 600년은 가람을 창건하기 시작한 해이고, 금판에 나오는 ‘기해년’ 639년은 가람과 석탑의 완공시기로 본 것이다. 완공기간이 길어 보이지만, 미륵사보다 규모가 작은 부여 왕흥사도 35년이나 걸렸던 점을 참고할 만하다. 여하튼 600년에서 시작해 가람창건이 완성된 639년 동안 선화공주가 승하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면 완공 때 썼을 금판에 기록된 왕비 ‘사택적덕녀(沙乇積德女)’란 선화공주를 이은 새 왕비라는 가설이 성립될 수 있다.
 
또 무왕과 선화공주에 대해 당시 백제와 신라가 적대관계였는데 왕실 간 혼인을 할 수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이야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93년에 백제 24대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과 신라 이찬(伊飡, 17관등 중 두 번째 벼슬) 비지(比智)의 딸이 결혼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뒤를 이은 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03)의 부인 역시 신라 지증왕(智證王, 재위 500∼514)의 딸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는 만큼 그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고 봐야 한다. 선화공주가 실존인물로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을 사실은 충분히 뒷받침되는 이야기다.
 
천년 영화는 간곳없고 절터만 남았어도, 미륵사지는 한국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가봐야 하는 미술사의 성지로 남았다. 백제의 왕실을 상징하던 장엄함은 간 곳 없지만 너른 절터에 오로지 혼자만 남은 석탑 하나만으로도 이곳은 미술사의 성지로 여겨질 충분한 이유가 된다. 발굴을 통해 출토된 방대하고 다양한 유물, 그리고 백제 최고 수준의 사리장엄까지, 미륵사 석탑은 우리 문화사를 한층 풍성하게 해준 황금 어장이자 보물창고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54호 / 2014년 7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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