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5. 경주 문무대왕릉

용이 되어 나라 지키겠다던 문무왕 염원 담긴 해중릉

▲ 문무대왕릉과 감포 앞바다.

문화재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란 참 어렵다. 문화재를 겉으로 본다면 ‘멋’과 ‘역사’가 핵심이지만, 실상은 인간 삶의 갖가지 흔적과 자취가 그 속에 어우러져 있어서 간단히 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겉만 아니라 속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그런 경지에 오르는 건 참 어려운 것 같다. 이렇게 삶의 흔적이 담겨 있기에 감흥도 따라 있기 마련이어서, 감흥이 없는 문화재는 화석 같아 보인다. 역사와 감흥이 담긴 문화유적 중 하나가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이 아닌가 한다. 문무대왕이 승하한 681년에 조성되어 1300년이 넘은 고고함을 지닌 이 왕릉은 세계의 다른 모든 왕릉이 땅 위에 세워진 것과 달리 바다에 떠 있는 바위섬에다 마련된 세계유일의 해중릉(海中陵)이라는 점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삼국통일 대업 이룩한 문무왕
불법 받들고 왜구 막겠다며
동해에 장사지내달라고 유언
문무왕 승하한 681년 조성
1961년 황수영 박사 답사해
세계유일 해중릉 ‘재발견’
한국 넘어선 인류의 자산
 
경주 양북면 봉길리 감포 앞바다에 자리한 이 바위섬이 문무왕릉으로 알려지기 전에는 미역을 따던 해녀들이 고된 물질 중에 들러 한숨 돌리던 쉼터였다. 또 바닷가에서 20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아주 가깝게 느껴져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직후에 잠시 거센 바닷물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을 배에 태워 실어 날랐던 적도 있다. 하지만 요즘은 안전 문제도 있고 문화유적으로 지정되기도 해서 해녀도, 관광객도 이 섬에 건너가는 일은 없어졌다. 하기야 용으로 화한 문무왕이 잠든 곳인데 누구든 쉽게 범접할 만한 곳이어서야 되겠는가.
 
▲ 문무대왕릉의 중앙 십자 수로.

이곳에선 ‘대왕암’으로 불리던 이 바위섬이 문무왕의 해중릉이라는 것은 여러 기록에 이미 전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의 ‘문무왕’조를 보면, “(문무왕이)여러 신하들을 모은 다음 자신이 죽으면 동해 입구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장사지내라고 유언했다(群臣以遺言葬東海口大石上)”라는 구절이 있다. ‘동해 입구의 커다란 바위’란 바로 이 대왕암을 가리킴은 물론이다. 문무왕(재위, 661∼681)은 고구려와 백제를 차례로 무너뜨리며 삼국을 통일해 천 년 왕국 신라왕조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이룬 임금이다. 그런 그가 죽음에 임박해서 가장 근심되었던 것은 자기를 믿고 따르며 험한 시대를 함께 살아왔던 백성들이었다. 그가 자신의 유골을 묻을 장소로 바다에 떠있는 바위섬을 선택한 것도 오로지 백성의 안위를 걱정한 때문이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그의 유언을 보면 과연 이런 군주가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 날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돼 한 나라가 되었으니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될 것이다. 허나 동해로 침입하여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 용(龍)이 되어 불법(佛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백성을 수고롭게 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다. 내가 죽고 열흘 뒤에 화장할 것이며, 검약하게 행하라.”
 
이 유언 속에는 죽음 직전까지도 오로지 백성의 안위를 근심하던 문무왕의 백성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이는 삼국통일을 문무왕의 가장 큰 업적으로 든다. 그렇지만 이 통일 전쟁의 와중에 세 나라의 무고한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희생되었을까? 그런 회한이 없는 통일전쟁은 비록 승리한 전쟁이었다 하더라도 역사의 차가운 시선을 받을 뿐이다.
 
문무왕이 전쟁을 위한 전쟁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거역할 수 없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그저 충실히 이행하려 했을 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험난한 시대를 함께 해준 백성들에게 늘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꼈고, 그런 마음은 자신이 죽으면 용이 되어서라도 바다를 지키며 백성들을 지키고자 하는 염원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를 ‘왕중왕’이라 부를 수 있다면 바로 이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마음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경주 동해 앞바다에 떠있는 작은 섬 대왕암, 곧 문무대왕 해중릉일 것이다.
 
문무왕릉의 실재에 대해서는 조선시대까지도 잘 전하고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등에도 문무대왕릉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조선시대 후기에 경주 부윤으로 부임한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이곳을 찾아 감회에 젖어 아름다운 문장을 짓기도 했다. 근대에 와서는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도 1940년 감포 앞바다에서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며 커다란 감흥을 받았다. 그가 남긴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경주 기행의 일절(一節)’ 등의 명문은 이 문무왕릉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적은 글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기억이란 참 이상해서, 얼마 안 되어서 이 해중릉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일제강점기와 연이은 6·25전쟁 등 힘든 세파에 시달리며 고단하고 팍팍한 삶을 살다보니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무대왕릉이 다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게 된 것은 고유섭의 제자 황수영(黃壽永, 1918∼2011) 박사의 힘이 컸다. 그는 1961년 동국대 인도철학과 학생들을 인솔해 경주에 수학여행을 갔다가, 마침 파도가 잔잔한 틈을 이용해 작은 어선을 빌려 학생들과 함께 이 바위섬까지 건너갔다. 스승 고유섭은 비록 직접 이 섬에 발을 디딘 적은 없지만, 이 바위섬이 문무왕릉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생전 제자에게 “언젠가 꼭 경주 앞바다의 문무대왕릉을 찾아보라.” 당부했었고, 황 박사는 이 말씀을 잊지 않았다가 이때 처음 실천에 옮긴 것이다.
 
멀리서 보면 그저 자그만 바위섬 같아 보였지만 바다를 건너와 보니 인공적으로 가로 세로로 돌을 쪼아내 물길을 냈던 흔적이 뚜렷했다. 거기에다 육지에서 가져온 게 분명한 커다랗고 육중한 바위가 그 밑의 어떤 장치를 덮고 있는 뚜껑돌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 등도 금세 알아봤다.
 
바위 중앙에 십자로 파낸 인공 수로도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아무리 큰 파도가 치더라도 바위 안쪽 공간의 수위는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하는 장치였다.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전설처럼 전하는 문무대왕릉이 바로 이곳임이 증명된 것이다.
 
문무왕의 유언에도 나오고, 또 평소 스승이 늘 말씀했던 문무왕 해중릉임을 직접 보았다는 점에서 황 박사는 환희에 젖었다. 얼마 뒤 상경한 그는 그 감흥을 우연한 기회에 한 신문사에 알렸는데, 이 신문사가 이 이야기를 ‘문무왕릉 신(新)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커다랗게 소개했다. 엄격히 말하면 새롭게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엔 누구나 그것을 기억하지 않았으니 ‘신발견’이라 해도 될 것 같았다고 본 것 같다. 이 기사는 당시 많은 화제를 뿌렸고 이에 다른 신문들도 대서특필할 정도로 연일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문무대왕릉과 연결되는 유적이 감은사(感恩寺)과 이견대(利見臺)다. 죽은 뒤에 용으로 화신해 동해를 지키던 문무왕이 밤에 돌아가 쉬기 위한 곳이 감은사이고 그의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감포로 와 멀리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던 곳이 이견대인 것이다. 신화 같은 이야기지만, 적어도 신라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신문왕은 감은사와 이견대를 여러 번 찾았던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감은사·문무왕릉·이견대는 하나로 연결되는 문무왕 관련 유적인 것이다.
 
1970년 황 박사를 비롯한 조사단이 예로부터 이견대 자리라고 전해오는 몇 군데를 촌로들로부터 탐문한 다음 그 중 가장 가능성 높은 곳에 정자를 짓고 ‘이견정’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하지만 황 박사는 40년이 지나서 이견정 자리를 다시 한 번 곰곰이 따져봤다. 여러 차례 현지를 답사하면서 혹시 다른 자리에 신문왕이 행차하던 이견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견정 자리는 조선시대의 역원(譯院)이 있던 곳이고, 이견대는 다른 곳에 있었다.”는 새로운 결론을 얻었다.
 
다른 곳이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지금 이견정 바로 뒤, 경주로 향하는 929번 도로와 나정 방면으로 뻗어 있는 31번 도로가 만나는 길을 건너면 바로 대본초등학교가 나온다. 학교 정문 옆으로 난 조그만 산길을 따라 10분 쯤 올라가면 문득 평평한 대지가 나오고, 무성한 풀 더미 밑에 몇 무더기의 돌무지가 보인다. 대지 아래는 한눈에 봐도 삼국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석축도 있다. 이런 조건들을 검토한 후 황수영 박사는 이 자리를 새로운 이견대 자리로 확신했다 것이다. 여기에 서면 지금의 이견정에서 보는 것보다 문무왕릉이 훨씬 가깝고 잘 보인다. 이런 입지만 보더라도 이견대 자리로 봐도 충분할 것 같다. 이견대로 추정되는 고개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 신라 사람들이 이용하던 옛길이 나오는데 이 길로 쭉 가면 기림사(祗林寺)에 닿는다. 기림사는 신문왕이 문무왕릉을 보고 궁에 돌아가는 길에 하룻밤 묵던 곳이었다.
 
황 박사는 훗날 스승을 기리고자 스승의 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를 새긴 비석을 감포 바닷가에 세웠다. 황 박사는 평소 “불초소생에게 자신이 문무대왕릉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것은 곧 스승의 유지를 가슴에 새기고 잊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모습을 뵈면서 가르침과 배움의 숭고한 행위가 스승에게서 제자로 이어지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이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느꼈었다. 세계유일의 해중릉 문무왕릉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류의 소중한 역사 유적이기도 하다. 이 문무대왕릉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도록 하는 건 어떨까?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할 것 같은데.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56호 / 2014년 8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