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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청도 운문사 석등

알맞은 키에 균형 잡힌 몸매 갖춘 한국 석조예술 걸작

▲ 석등은 온기와 더불어 그 환한 불빛을 통해 어둠에 갇힌 사람들에게 밝음을 주어 길을 인도했다. 운문사 석등은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에 모신 유일한 사례로 단아한 멋이 일품이다.

‘미(美)’를 표현하는 어휘는 알고 보면 꽤 다양하다. ‘아름답다’는 미에 대한 직역이자 가장 보편적인 말이고, ‘멋있다’도 아마 이와 거의 동격일 것이다. 그밖에 ‘곱다’ ‘예쁘다’ ‘말쑥하다’ ‘늘씬하다’ ‘중후하다’ ‘우아하다’ 등도 역시 미를 표현할 때 사용되는 말들이다. 이 중 ‘단아하다’는 말이야말로 한국적 미를 가장 엇비슷하게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 한다.
 
화려한 무늬장식 최대한 절제
‘단아함’ 표현 걸 맞는 문화재
따뜻함과 정교함 잘 어우러져
 
석등은 무명까지 밝히는 성보
한국적 불교문화의 대표 유물
근대 이전 석등 300여점 존속
 
‘단아함’은 자연과 어울리지 못하면 나올 수 없는 멋이다. 우리나라 미술의 가장 독특한 특징이 바로 자연과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는 맛이기에 단아하다는 표현을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가톨릭 베네딕트 교단의 신부인 안드레 에카르트(Andre Eckardt, 1884~1971)는 1908년 우리나라에 왔다가 한국의 미에 심취해 20년간 머물렀다. 그는 귀국한 뒤 1928년에 ‘한국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를 썼는데 그는 이 책 한 권으로 저명한 미술사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한국미술을 이렇게 정의했다.
 
“한국의 예술은 세련된 심미적 감각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 원천은 아름다움에 대해 늘 자연스러운 감각을 지니는 데 있으며, 그것을 고전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우리 미에 스스로 도취될 수도 있는 한국인도 아니고 반대로 우리의 역사와 미술을 고의적으로 낮춰보려 했던 일본인도 아닌 객관적 입장에서 한국의 미를 섭렵했던 에카르트였기에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한 여러 정의 중에서도 가장 믿어줄만할 말인 것 같다.
 
‘단아함’이 가장 잘 어울리는 우리 문화재 중에 청도 운문사(雲門寺) 석등(石燈)이 있다. 등이란 건 인간이 불을 자력으로 피울 줄 알던 때부터 있었을 게다. 그런데 불교가 나타나면서 등은 이런 실용성 외에 무명(無明)을 밝히는 상징성으로 인해 그 존재의미가 격상되었다. 그래서 삼국시대이래로 사찰에는 늘 등이 있었다. 발굴에 의해 미륵사에서는 동금당지 앞에, 황룡사에는 목탑 앞에 석등 3개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들 삼국시대 석등에 이어서 감은사·실상사·법주사·불국사·부석사·보림사·해인사 등 통일신라 석등들이 뒤를 잇는다.
 
사찰에서는 거의 대부분 돌로 등을 만들었기에 석등(石燈)이라고 불렀다. 석등은 온기와 더불어 그 환한 불빛을 통해 어둠에 갇힌 사람들에게 밝음을 주어 길을 인도했다. 그래서 중생을 인도하는 절에 처음부터 석등이 있었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절에는 석탑과 마찬가지로 석등이 늘 있어왔으니 이것만 봐도 석등의 존재가치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석등을 대할 때 한 가지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사찰 석등의 기원은 어디인가 하는 문제다. 우리나라 사찰의 석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대략 300점 가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 석등과 같은 모양은 인도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도 거의 없다. 이에 대해 단국대의 박경식 교수는 “우리의 석등은 한국적 불교문화의 한 유형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문화와는 차별성을 지닌 양식적으로 새롭게 창안한 문화유산”이라는 탁견을 발표한 바 있다.
 
석등은 연꽃 모양의 하대석과 기둥, 역시 연꽃 모양을 한 상대석과 불을 담은 화사석(火舍石) 그리고 지붕인 옥개석 등 아주 단순한 구조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 단순함 속에 뛰어난 아름다움이 녹아 있으니 멋이란 생각할수록 참 묘한 존재인 것 같다. 석등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화사석은 밑에 홈이 움푹 파여 있어 여기에 불씨를 지피도록 되어 있다. 실제로 가까이 가보면 검게 그을린 자욱이 어느 석등에나 남아 있다. 화사석에는 사방에 세로로 기다랗게 난 화창(火窓)을 만들어 여기를 통해 불빛이 사방으로 퍼지도록 했다.
 
그런데 이 화창에 대한 지식 중에 잘못 알려진 게 하나 있다. 경주 불국사 석등에 관한 이야기다. 신라의 전성기인 9세기 경주 인구는 10만 명으로 추산될 만큼 많았다. 그래서 큰 행사가 있는 날엔 법당이 온통 귀족들 차지가 되어서 대부분 참배객들은 법당 근처도 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창호지’로 바람을 막은 석등의 불빛을 통해 법당 부처님을 뵐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전체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창호지’ 부분이 잘못되었다. 석등의 화사석을 종이로 막았다가는 이글거리는 불길에 타버려 하루 수십 번을 다시 붙여도 모자랐을 것이다.
 
화창 주위를 자세히 보면 화창을 장식하기 위해 장석을 붙였던 흔적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화창은 본래부터 꽉 닫아둔 게 아니라 화창 주변을 금속으로 둘렀고 가운데는 종이로 막은 게 아니라 그냥 여백을 둠으로써 바람이 통하게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람이 불면 불길이 꺼질 것 같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불씨는 움푹 파인 홈 안에 있기 때문에 바람 따라 이리저리 넘실거리기는 했어도 여간한 비바람이 불어도 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운문사 경내를 포행하고 있는 스님들.

운문사 석등은 ‘금당(金堂)’이라는 편액이 달린 건물 앞에 자리한다. 그런데 이 건물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말하는 불상을 모신 그런 금당이 아니라 처음부터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寮舍)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툇마루가 있고 여러 칸으로 구성된 점 등 지금 보이는 건축 양식으로 보아도 그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다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석등이란 부처님의 광명이 중생에게 두루 비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기에 모든 석등이 하나같이 불전(佛殿) 앞에 놓여있기 마련인데, 운문사 석등만은 왜 요사 앞에 놓이게 되었을까? 그 해답으로 1935년 무렵에 촬영된 사진에 나오는 작압전(鵲鴨殿) 뒤의 석등을 금당 앞 석등으로 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작압전 뒤에 있었는데 언젠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진 속 석등 일부가 건물에 가렸고 또 모습도 흐릿해 확신하기는 어렵다. 지금은 사라진 다른 석등일 수도 있다.
 
반대로 지금의 건물에 ‘금당’ 편액이 걸린 것은 바로 이 석등이 여기에 있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석등을 앞에 둔 건물은 불전, 곧 금당일 테니까. 그것은 여하튼, 지금 금당은 운문사 승가대학 학인스님들이 강학을 하거나 참선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석등을 보러 갈 때면 학인스님들을 잘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운문사 학인스님들은 언제나 단아해 보이는 것이 석등의 이미지와 서로 겹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런 걸 보면 사람과 문화재는 서로 닮아가는 것 같다. 천 년을 넘게 이어온 문화재를 늘 보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문화재에 담겨진 아름다움을 닮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운문사 석등이 세워진 시기는 양식으로 볼 때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등, 그 중에서도 9세기 무렵으로 판단된다. 구조를 보면 맨 아래 받침돌과 하대석은 한 장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대석은 섬세하면서도 윤곽이 뚜렷한 여덟 장의 연꽃잎 모양으로 새겼다. 이런 형태는 9세기 석등에 흔히 나타나는 모습이다. 받침돌은 땅을 고르게 하고 석등을 지탱하는 기초 역할을 하는데 운문사 석등 받침돌은 땅에 묻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하대석 위에 놓인 팔각기둥인 중대석은 아무런 꾸밈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위로 쭉 뻗어 있다. 이런 담백함은 석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석등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
 
우리 석등 중에는 기둥이 팔각형뿐만 아니라 사람이나 사자 두 마리가 받치는 모습, 중앙이 볼록하게 나온 장구 모양 등 다양한 모델이 있는데 운문사 석등은 이런 기교를 부리지 않은 데 그 아름다움의 핵심이 있는 것 같다. 팔각기둥이 받치고 있는 상대석은 하대석과 모양은 거의 같지만 방향은 반대로 위로 향하는 연꽃 모습이다. 그리고 그 위에 두툼한 받침돌이 있고 이 위에 불을 담는 화사석이 놓여 있다. 화사석은 사면에 화창을 내어 불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도록 해놓았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다. 석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을 감안하면 이렇게 평범한 모습이 의외일 수 있는데, 겉치레를 쫙 빼고 화사석 본래의 기능이 잘 유지되도록 하기 위한 배려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화창 주위에 뚫린 작은 구멍들은 문을 달아냈던 자국이다. 화사석을 덮고 있는 지붕인 옥개석은 다소 두툼하게 다듬었으며 맨 위에 연꽃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도 딱 필요한 만큼만 도톰하게 해놓았다. 운문사 석등의 전체 높이는 258㎝이니 높이로만 본다면 결코 ‘늘씬한’ 모습은 아니다.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석등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남원 실상사 석등은 5m나 된다. 그에 비하면 꽤 작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미술을 어디 크기에서 찾던가! 전체적인 짜임새와 정교함 그리고 따뜻함 등이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이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시야를 넓혀 이 석등을 보면, 기단부와 몸체가 균형을 이루고 있어 우아하며 화려한 무늬장식을 최대한 절제해 꾸밈없고 단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야말로 자연의 아름다움 그 자체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운문사 석등을 보노라면 너무 크지 않고 알맞은 키에 균형 잡힌 몸매를 지녔고 얼굴도 치장하지 않은 민낯인데 그게 더 곱게 보이는, 우아하고 단아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여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석등을 볼 때 화사석에 밝혀진 작은 불덩이를 상상해 보면 괜스레 마음도 뜨거워진다. 그 불이 여느 불이 아니라 중생의 어둠을 밝혀주기 위한 광명의 불이었으므로 그 뜨거운 불길을 견디며 천 년을 버텨온 석등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닌 숱한 문화재 중에서도 석등처럼 정겨운 존재도 없는 것 같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58호 / 2014년 8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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