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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울 보문사 석가불상

17~18세기 민초들 비원과 희망 담긴 정겨운 얼굴 특징

▲ 서울 성북구 보문사 대웅전에 봉안된 보현보살상(왼쪽)과 석가불상(오른쪽). 보면 볼수록 마음이 따뜻해지는 상호가 인상적이다.

시대(時代)란 어떤 기준에 의하여 구분한 일정한 기간을 말한다. 어느 시대마다 당시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느꼈던 그 사회와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마련인데 이를 ‘동시대적(同時代的)’이라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시대라는 말에 상응하는 미술사적 표현을 찾아보면 ‘양식(樣式)’이라는 용어가 곧바로 떠오른다. 양식은 한 시대의 미술에 나타난 고유한 표현을 뜻한다.

17세기 후반 남편 잃은 여인이
내생서 백년해로 약속하며 조성

보는 사람 압도하는 위엄 대신
감싸주려 다가오는 듯한 모습

양식사에 얽매여 해석하기보다
당대 희망·정서 함께 살펴야

미술은 그 시대의 여러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에 이를 통해 시대의 특성을 읽어낼 수 있다. 이런 면은 미술의 여러 분야 중에서도 불상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불상의 얼굴은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는 사람들이 불교에 갈망했던 염원들이 시대마다 다르게 투영된 결과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불상 연구에서는 17세기, 18세기, 19세기 등 100년을 단위로 양식이 바뀌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 세기와 다른 세기를 잇는 양식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역사의 기막힌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면 이런 구분법은 아무래도 작위적인 것 같다는 회의가 안 날 수 없다.

서울 성북구 보문동에 ‘탑골 승방’으로 잘 알려진 보문사 대웅전에 석가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함께 한 금동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오른쪽 문수보살은 근래에 만들었지만, 왼쪽의 보현보살과 중앙의 석가불상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사이에 제작한 것으로 둘 다 제법 유래 깊은 불상이건만 지금까지 미술사학자들은 단 한 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꼭꼭 숨겨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300년 가까이 내내 이 자리에 있었으니 이런 무관심이 의아스러운 지경을 넘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이 석가불상이 시대를 초월한 대작은 아닐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후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불교에 갈망했던 기원과 믿음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을 미처 간파하지 못한 탓은 아닐까?

이 불상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은 얼굴이다. 갸름하기는 해도 통일신라시대 불상과 비교한다면 다소 둥글하고 작은 얼굴이다. 곱게 그려진 반달형 눈썹, 가는 눈, 알맞게 솟은 코가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작은 입술은 미소마저 머금고 있다. 얼굴 표정에서 부드럽고 인자한 자태가 가득 묻어난다. 인체비례로 볼 때 귀가 지나치게 큰 편이지만 이것은 어느 시대 불상에서도 나타나는 모습이니 흠이 아니다. 두 손은 큼직한 편으로 오른쪽은 가슴 부근까지 올려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다. 얼굴에 비해 알맞게 큰 몸에서 장중한 분위기가 풍기지는 않아도 소박한 멋은 담뿍 느껴진다. 자세도 통일신라 불상처럼 허리를 쭉 펴고 명상에 잠긴 게 아니라 한껏 몸을 낮추고 두 어깨도 앞으로 조금 숙인 것이 마치 중생을 좀 더 가까이서 보려는 모습 같아 보인다. 어쩌면 부처님이 우리에게 바로 이렇게 다가와주기를 원했던 당시 사람들의 불상관(佛像觀)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라고 하는 게 맞을 지도 모르겠다.

불상을 양식적으로 설명할 때 꼭 필요한 부분이 얼굴 다음으로 옷의 주름 표현이다.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는 신체의 굴곡과 어울리는 섬세한 불의(佛衣)의 주름이 조각되었고, 고려시대 불상에도 옷의 형태가 다양하고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이 옷 주름이 대폭 간소화된다. 아마도 외관보다는 내면의 정신세계를 강조한 시대적 사조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보문사 석가불상에도 이런 특징이 녹아 있어 아주 간략하면서도 형식적으로만 옷 주름이 표현되었다. 장삼 격인 대의(大衣)가 어깨에 걸쳐 있고 가슴 중간에 수직선으로 내의인 ‘승가리’를 표현했다.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는 옷자락은 바지인 ‘군의’일 것이다. 전체적인 모습에서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가치관인 검약의 시대정신과도 맞아떨어지는 조각 양식이다. 이런 정감 넘치고 풋풋한 요소들이야말로 조선시대 사람들이 갈망했던 불상의 모습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화려하다기보다는 소박하고,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위엄 대신에 약하고 힘없는 사람을 보듬고 감싸주려 다가오는 듯한 푸근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것, 바로 이런 것이 17세기와 18세기를 살았던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불상에서 느끼고 싶었던 모습이 아닐까 한다.

보문사 석가불상을 17세기와 18세기를 잇는 시대의 양식이라고 했는데, 이런 판독은 양식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근래 이 불상에서 복장(腹藏) 유물이 발견되었다. ‘묘법연화경’ 4책, 후령통 2개, 한지 두 장 등과 함께 나온 중치막(中致莫)이라는 한복에는 옷깃에 발원문이 적혀 있어 불상의 제작시기를 아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먹 글씨로 적힌 발원문은 중세 한글로 되어 있어 읽어내기가 쉽지는 않지만 대체로 이렇게 번역되는 것 같다.

▲ 발원문이 옷깃에 적힌 중치막 한복. 다음 세상에서 남편과 백년해로를 다짐하는 아내의 서글픔이 잘 나타나있다.

‘임진년에 태어난 이씨 모(某)와 갑인년에 태어난 구씨 희임 양위(兩位)가 올립니다. 부처님, 제가 원통하게 남편을 여위었습니다. 이렇게 보시하오니 부디 저희 두 사람 후세에 좋은 곳에 환생하여 다시 만나 두 몸이 백년 함께 살며 아울러 부처님도 만나게 해주시기 청하옵니다.’

비록 현세에는 남편과 사별했지만 후세에 다시 만나서 백년해로하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기원하는, 홀로 남겨진 아내의 갈망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글이다. 정교하고 섬세한 바느질이 돋보이는 이 옷은 의류학자들에 의해 17세기 후반에 남성이 실제로 입었던 옷으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여인이 남편이 평소 입었던 옷을 시주한 것이고 옷의 크기도 성인이 입었던 것임에 분명하다는 결론이 났었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좀 더 연대를 좁혀볼 수 있다. 발원문 속에 명확하게 언급된 건 아니지만 자식에 관한 말은 없고 오로지 금생에서 다 못한 부부의 해로의 기원이 주로 강조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여인의 나이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사이가 아니면 50대 이상의 나이일 거라고 추정된다. 만일 이런 짐작이 맞는다면 남편 이 씨가 태어난 임진년은 1652년, 부인 구 씨가 태어난 갑인년은 1664년으로 생각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옷이 복장으로 넣어진 시점은 대체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일 것이며, 이는 곧 이 불상이 제작된 시기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17세기라는 시대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 물음에 여러 가지 견해가 나올 수 있겠는데 그 중 하나로 상처회복의 시기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과 잇단 정유재란으로 인해 온 백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7년에 걸친 참혹한 전쟁이 끝났어도 인심은 더 없이 팍팍해졌고 하루하루 살아가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힘들게 시작한 17세기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삶은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17세기가 끝나갈 무렵엔 다시 일군 삶의 터전이 어느 정도 정착되어 가던 시절이라고 역사학계는 정의하고 있다. 모든 미술작품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 가설을 적용해 본다면 이 보문사 불상에서 17세기와 18세기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비원과 희망을 읽어낼 수 있어낼 수 있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다.

사람들은 얼굴에 드러난 표정에서 속에 묻어둔 마음을 읽는다. 마찬가지로 불상의 얼굴에서 동시대인들의 마음과 생각, 믿음을 떠올리는 건 아주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미술사에서는 이런 감수성을 등한시해온 느낌이 짙다. 그보다는 겉에 드러난 양식에 연구의 초점을 맞추는 관행이 너무 일반화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양식 연구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지만 거기에 치우쳐 미술작품을 겉으로만 보고 그 안에 담겨진 마음을 읽지 못한다면 반쪽짜리 연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보문사 불상과 동시대에 제작된 다른 불상에 대한 묘사 중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조형성은 기술적, 시대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은 물론 세부적으로 옷 주름이 더욱 딱딱하고 형식화되는 시기에 제작된 불상이다.”라는 학술적 해설이 양식에만 갇힌 답답한 대사로만 느껴지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겉만 볼 뿐 그 안에 담겨진 감성을 못보고 있다면 아무리 정확한 양식 묘사라 해도 결코 온전한 감상은 아닌 것이다.

미술품을 감상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양식이다. 양식 연구는 한 작품에 드러난 형태나 장식 등을 유형화시켜 작품을 분석하는 방법론의 하나다. 수많은 작품을 시대별로 분류하기에는 아주 유용한 방법이지만, 양식 연구에 너무 빠지면 그 틀에 갇히기 십상인 것이 양식 연구의 허점이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그래서 올바른 감상을 위해서는 마음이 자유롭게 대상을 인식해야 하는데, 도리어 마음이 양식에 너무 쏠리는 탓에 작품을 감상하는데 방해를 받는 것이다. 양식사에만 너무 얽매이지 말고 작품에서 그것을 통해 그 시대의 정서와 희망을 함께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겉과 속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폭 넓은 방법론이 새롭게 자리를 잡는다면 우리 불교미술사는 훨씬 다양하고 많은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미술사 연구가 지나치게 ‘대작’ 중심으로 무게가 쏠리면 섬세한 인식이 어렵게 된다.

미술이 시대의 반영이라는 말을 좀 더 곱씹어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한 시대에 그 시대를 이끈 위인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위안과 희망을 느끼게 하는 게 불상의 가장 큰 의미로 느꼈던 시대가 있었다면 그 성취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작품의 반열에 보문사 석가불상을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62호 / 2014년 9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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