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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구례 화엄사의 효대

불보살상 대신 어머니와 아들 조각한 유일한 석탑·석등

▲ 연기조사가 어머니를 향하고 있는 모습의 석등.

우리 미의 특성을 나타내는 말들을 음미해보면 우리 미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된다. 우리 미술사 연구의 비조(鼻祖)로 일컬어지는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은 ‘구수한 큰 맛’, ‘무기교의 기교’ 등 탁월한 언어로 우리의 미를 표현했고, 일제강점기에 우리의 문화가 억압받는 가운데서도 한국의 미술 연구를 자신의 사명처럼 여겼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선(線)의 미’라고 했다. 그밖에 ‘소박미’나 ‘해학미’ 같은 말들도 우리 미술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들이다. 저마다 깊은 연구 끝에 나온 표현들이라 나름대로 다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

화엄사 창건한 연기조사
어머니에 대한 효성 지극

홀로 계신 어머니 모셔와
매일 아침 따뜻한 차 공양

신라인들 탑·석등 조성하며
연기조사 ‘인간미’ 담아내

그런데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이런 말들은 우리 미술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기보다는 한 시대 특정 장르의 미술을 설명할 때 보다 제격인 걸 알 수 있다. ‘구수한 큰 맛’이나 ‘무기교의 기교’는 특히 조선시대 백자를 상찬(賞讚)하는 말로 쓰였다. 또 ‘선의 미’라는 것은 면이나 공간보다는 선을 활용한 솜씨가 뛰어나다는 뜻인데, 문인화 같은 조선시대 미술의 순후(淳厚)한 멋을 표현한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불교미술의 황금기를 연 통일신라시대 미술은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 여러 견해가 있겠지만, 내게는 통일신라 미술이 이룬 커다란 성취와 미덕으로 ‘인간미’와 ‘다양성’이 먼저 떠오른다. 인간미란 이 시대 미술은 작품만을 위한 작품이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헤아렸다는 것이고, 다양성이란 한 틀에 고착되지 않고 다양한 변화를 모색했다는 의미다. 이런 면모를 구례 화엄사의 효대(孝臺)에 있는 석탑과 석등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각황전의 서남쪽으로 나있는 좁은 길을 올라가면 ‘효대’라고 부르는 평평한 대지가 나오고, 여기에 신라시대에 만든 사사자(四獅子) 삼층석탑과 석등이 약간의 사이를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다. 석탑은 통일신라 석탑의 최고봉에 놓아도 될 만큼 아름답기 그지없는 작품이고, 맞은편에 있는 석등도 중앙의 기둥 역할을 한 승상(僧像)이 대신하는 아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석탑 안에는 네 마리 사자상 사이로 중앙에 한 여인상이 서 있다. 이 여인상과 석등을 받치고 앉은 승상은 어떤 관계일까? 전해져 오기로는 석등을 받치고 있는 승상은 연기(烟起) 조사이고 탑 안의 여인은 바로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한다.

▲ 불탑이 부처님의 마음인 사리를 봉안한다는 점에서 화엄사 효대에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곧 부처님 마음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544년에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그래서 화엄사를 창건한 다음 홀로 계신 어머니를 이곳으로 모셔왔고, 매일 아침마다 어머니를 찾아와 따뜻한 차를 직접 공양했다고 한다. 연기조사의 효행은 곧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고 흠모해마지 않았다. 대중들의 이런 마음이 전해져 절에서는 이 모자를 기리기 위해 이곳 효대에 두 사람의 석상을 세우게 되었다. 어머니는 커다란 석탑 안에 서서 아들을 위해 합장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아들은 석등 안에서 어머니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공손히 찻잔을 올리는 모습으로. 불탑이 부처님의 마음인 사리를 봉안한다는 점에서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음은 곧 부처님의 마음이라는 뜻도 있을 것 같다. 또 어두운 세상에 환한 빛을 밝히는 것이 석등이니, 석등을 받치고 앉은 연기 조사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가야할 길을 분명하게 제시한다는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삼층석탑과 석등이 하나로 연결되며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으니 당연히 이 둘을 따로따로 감상해서는 안 된다. 우리 고대 미술 중에 이렇게 스토리가 뚜렷하고 또 이 스토리가 작품으로까지 연결되어 지금껏 전하는 예가 또 있을까? 그런 뜻에서 이 효대는 신라미술의 향연이요 가장 아름다운 무대(舞臺)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효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고송(古松)들도 신기하게 모두 마치 무대를 밝히는 조명이기라도 한 양 가지들을 효대 안쪽으로 향하고 있다.

석등 안에서 한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어머니에게 공손히 찻잔을 올리는 아들 상(像)의 모델인 연기조사는 544년에 화엄사를 창건한 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신라시대의 ‘대방광불화엄경’ 사경 발문에 그 이름이 나오는 경주 황룡사에 주석했던 ‘연기(緣起)’ 스님이라는 주장도 있다. 사경의 제작시기가 755년이니 이렇게 되면 석탑과 석등의 제작시기와 대체로 어울리기는 한다.

사사자 삼층석탑은 화엄사에 관한 책의 표지나 그림엽서 등에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화엄사를 가장 잘 대표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 탑은 기단부가 네 마리의 사자와 그 사이에 서 있는 인물상으로 되어 있는 게 다른 어느 탑에서도 볼 수 없는 특징이다. 게다가 탑의 조형미와 곳곳에 장엄된 조각도 신라 미술을 대표한다고 말하기에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다. ‘국보 35호’라는 수식이 붙은 건 당연하다.

탑의 형식은 2층으로 마련된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얹고 그 위에 상륜부를 얹은 신라 석탑의 전형적 모습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 기단에서 네 마리 사자와 여인상이 배치된 특이한 의장(意匠)을 보이고 있다. 모서리에 놓일 기둥[隅柱]을 대신하여 암수 두 쌍의 사자를 한 마리씩 지주(支柱)삼아 네 모서리에 배치했고, 중앙에는 탑의 중앙에 들어갈 기둥인 찰주(刹柱) 대신 연화대 위에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서 있는 인물상을 안치한 것이다.

이 탑에서 가장 눈길이 많이 가는 곳은 네 모서리에 앉은 사자상과 중앙의 인물상이다. 사자의 모습은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사자상을 연상케 할 만큼 서로 닮았다. 사자는 불교에서 매우 상서로운 동물로 여긴다. 백수의 왕이라는 칭호가 부처님의 위의(威儀)를 상징하는 의미로 채용되면서 부처님이 앉는 자리를 ‘사자좌(獅子座)’라 하고, 그곳에 앉아 설하는 법을 ‘사자후(獅子吼)’라 하였다. 이러한 사자 네 마리가 동서남북 방향으로 앉아 탑의 네 모서리를 받치고 있으니 이 탑이 상징하는 면모가 상당한 것을 느끼게 한다. 또 인물상은 얼굴의 모습이나 몸에 걸친 가사의 옷 주름 등은 통일신라 불상에 표현되는 그것과 양식적으로 많이 비슷해 제작 시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불탑 중앙에 서 있는 어머니께 석등을 머리에 이고서 차 공양을 올리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라고 해야겠다. 효란 천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우리의 마음을 따스하게 한다. 탑과 석등에 불보살상이 조각되지 않고 이렇듯 ‘어머니와 아들’의 따뜻한 마음과 효성이 주제로 된 작품은 효대 위에 장엄된 이 석탑과 석등밖에는 없다. 여기서 통일신라 미술에 담겨있는 인간미와 소재의 다양성을 읽게 된다. 바라보는 사람이 위압감을 느끼지 않고 따스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되 나름의 위엄은 잃지 않은 모습에서 신라 사람들이 추구했던 고양된 인격화의 작품성이 향기롭게 드러나고, 어느 장르에서나 이른바 정형화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구현하려 했던 그들의 미의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효대는 일찍부터 화엄사의 대표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왔다. 1530년에 나라에서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효대에 있는 석탑의 특이한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연기 스님이 어느 시대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이 절을 지었다. …석상이 있는데 어머니가 탑을 머리에 이고 서 있는 모습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연기와 그 어머니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僧煙起不知可代人建此寺…有石像戴母而立 俗云煙氣與其母化身之地).”

또 석탑 안에 서 있는 상을 연기조사의 어머니가 아니라 도선(道詵, 827~898)국사의 어머니라고 알려진 적도 있었다. 17세기의 고매한 학자이자 사찰 여행가였던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이 1686년 화엄사에 들렀는데, 이때 한 스님이 이 상을 가리키며, ‘도선국사의 어머니 상’이라고 말하더라는 얘기가 그의 ‘산중일기(山中日記)’에 보인다(女人像 塔下正中 爲戴立之狀 僧言 女人卽一名禪覺祖師母象云). 생각해 보면 이 모자는 연기조사나 도선국사만이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고려시대 최고의 학승인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은 화엄사를 중창한 분인데, 그 때 효대에 자주 올라갔던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느꼈던 감회를 시로 남겼다. 바로 ‘지리산 화엄사에서(留題智異山華嚴寺)’라는 시다.

‘적멸당 앞에는 훌륭한 경치도 많고 / 길상봉 꼭대기엔 티끌 한 점 없어라 / 종일토록 방황하며 지난 일 생각하는데 / 어슴푸레 어둠 내린 저녁 슬픈 바람 한 줄기가 효대를 스치누나(寂滅堂前多勝景 / 吉祥峰上絶纖埃 / 彷徨盡日思前事 / 薄暮悲風越孝臺)’

시의 이미지가 전체적으로 비감(悲感)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의천 스님이 왜 이런 쓸쓸하고 적막한 감성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그 이유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의천 스님이 화엄사 효대에 올라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드리는 석상을 보고는, 어린 나이에 승려가 되어 어머니와 떨어져 효도를 다 못했던 자신의 회한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머리 위에 불어오는 바람마저 슬프게 느껴진 것이 아닐까, 아마도.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64호 / 2014년 10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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