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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속초 신흥사 보제루 경판

한국전쟁 때 불쏘시개로 사라질 뻔했던 희귀한 조선 경판

▲ 설악산 신흥사 보제루 내 경판고. 이곳에 보관된 19종 269점의 경판들은 조선시대 불교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당서(唐書)’에 ‘창업(創業)보다 수성(守成)이 어렵다(易創業難守成)’는 말이 있듯이, 어떤 일이든 처음 이루기는 쉬워도 이를 꾸준히 지켜나가기는 참 어려운 것 같다. 문화재에도 이런 말은 그대로 적용된다. 볼 때마다 어떻게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을까 감탄하면서 또한 그를 위해 쏟아 부었을 작가의 엄청난 고뇌에 맘속으로 경의를 표한다. 그런데 이런 훌륭한 문화유산을 물려받은 현대인으로서 이를 잘 보존하고 지켜나가는 일 역시 작품의 감상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임을 느낀다.

1658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
해장전서 보제루로 이전 보관

대부분 다라니경·진언집 종류
서지면에서 가장 완벽한 경판
범어·한자·한글로 쓰인 유일본

국군들 경판 태우는 것 보고
장교였던 리영희씨가 살려내

하지만 문화재 보존의 실천은 늘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다. 국보 1호 숭례문은 복원되고 나서도 늘 부실시공 논란이 끊이지 않고 우리 민족의 자존심 석굴암은 본존불 대좌에 금이 갔으며 건축미의 대명사 격인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마저 뒤틀렸다. 우리 문화재 보존 인식에 분명 큰 문제가 있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사실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살피는 일에 너와 나가 따로 있을 리 없다. 문화재란 민족의 소중한 정신 가치가 담겨져 있으니 잘 보존해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우리 모두 갖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힘이란 놀라운 것이어서 때로는 한 개인이 국가도 하지 못할 일을 해내기도 한다. 전쟁 중이라는 아주 어려운 상황 아래 십중팔구 전장의 잿더미로 사라질 순간에 있던 문화재를 한 개인이 살려냈던 실화 한 대목이 바로 그런 예일 것이다.

이 실화는 지금 강원도 속초 신흥사(新興寺)의 보제루에 보관되고 있는 조선시대 목조 경판(經板) 문화재들에 관한 이야기다. 경판이란 경전을 종이에 인쇄하기 위해 나무에 새긴 판목인데,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우선 신흥사 경판들이 어떤 것인지 설명해야겠다. 이 경판들은 1658년부터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는 동안 만들어진 것이다. 신흥사에서는 이 경판을 잘 보관하기 위한 전용 건물로 1661년 해장전(海藏殿)을 짓기도 했는데, 해장전이 없어지면서 1858년 보제루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1788년에 쓰인 ‘해장전 중수기’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경판들이 있었다고 나오는데, 지금도 총 19종 269점이 있으니 결코 적은 숫자는 아니다. 내용도 다양해 ‘묘법연화경’ ‘불설대부모은중경’ ‘반야심경주’ 같은 대승 계열의 경전, ‘운수단가사’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 ‘수설수륙대회소’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 ‘승가일용식시묵언작법’ ‘제반문’ ‘식당작법’ 등의 불교의식 관련 문헌, ‘진언집’ ‘불정심다라니’ 등의 진언 다라니류, ‘대원집’ ‘선생집’ 같은 고승문집 등이 있다.

우리나라 절 가운데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 물론 적지 않지만 신흥사 경판들은 어려운 내용의 책보다는 불교를 쉽게 해설해 많은 보통 사람들이 불교에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기본적인 내용을 담은 책과, 실질적으로 사찰에서 필요한 의식에 대한 실용서 경판들이 주류를 이룬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당시 사찰을 찾는 사람들이 조선 초기에는 왕실과 양반 계층 위주였다가 후기에 들어서면서 서민층으로 이동했던 불교사적 정황과도 관계가 깊다. 그 같은 관점으로 보면 신흥사에서 1658년 ‘불설부모은중경’ 경판을 만든 것도 단순히 불교 경전 하나를 펴낸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 신흥사 진언집 경판.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불교의 모든 교리가 그들의 이념이나 가치관과 너무나 동떨어지게 보였다. 특히 그들에게는 스님들의 출가가 성리학의 가장 큰 가치인 부모와 임금에 대한 효와 충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라고 보아 ‘무부무군(無父無君)’, 곧 ‘부모도 모르고 임금의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반대로 불교적 입장에서 볼 때 출가는 부모뿐만 아니라 사바세계를 구제한다는 ‘더 큰’ 효와 충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다. 이런 심오한 의미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책이 ‘불설부모은중경’이다. 이 경전은 부처님이 설한 부모의 은혜를 다룬 내용이어서 불교를 ‘오랑캐의 도’라고 손가락질 하며 경전을 백안시하던 유학자들도 이 책만큼은 나름대로 인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불교 억압의 시기에도 이 경전은 비교적 활발하게 인쇄되어 유포된 것은 불교의 유일한 활로를 열어준 책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불교는 엄청난 탄압을 받으며 힘든 시절을 이어가야 했지만, 그나마 양반과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억압받던 서민과 부녀자들이 마음을 달래고 힘을 얻을 곳으로 절을 찾았던 것이 불교계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던 큰 힘이 되었다. 진언을 외는 간단한 염불과 그런 행위에 의해 극락왕생이 약속되는 다라니 신앙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사회의 약자였던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흥사의 목조 경판 중 ‘진언집’ 등의 다라니 경전은 조선 후기 불교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일반 불서(佛書)는 18세기부터 간행 빈도가 줄어드는 추세인데 반해 다라니경·진언집은 16~18세기에도 꾸준히 간행되어 이 기간 발행된 불서의 40퍼센트나 될 정도로 조선 후기 내내 유행되었다. 특히 신흥사의 진언집 경판은 조선시대에 간행된 여러 진언집 종류 중에서도 서지(書誌) 면에서 가장 완벽한 축에 든다. 또 한자의 용법을 한글로 설명하고, 범자를 한글로 표시한 편집 형식도 매우 드문 편이어서 희귀성이 높고 국어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 신흥사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경판.

지금까지 신흥사에 간직된 경판의 내용과 가치를 설명했는데, 이제 60여년 전 6·25전쟁의 와중에 불길 속에서 재로 사라질 뻔했던 신흥사의 경판들이 한 사람의 노력으로 극적으로 보존될 수 있었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할 차례다. 한겨울의 매서운 찬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한 육군 부대가 숙영하기 위해 신흥사 경내에 주둔하게 되었다. 바삐 움직이는 부대원 사이로 호리호리한 몸매에 빛바랜 군복을 헐겁게 입은 한 청년 장교가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경내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었다. 그가 쓴 군모와 군복 가슴에는 중위 계급장이 달려 있다. 그는 평소 불교와 특별한 인연이 없었기에 이 때 처음 와본 신흥사가 태어나 처음 대면하는 큰절이어서 신기한 마음으로 구경하는 중이었다.

스물 두 살의 이 청년 장교는 전쟁이 일어나자 국군 보병 제11사단 제9연대에 소속되었다. 겨울로 들어설 무렵 국군은 38선을 넘어 2차 북진 중이었고 이 날 그가 속한 부대는 진격 도중 숙영을 위해 신흥사에 주둔하게 된 것이었다. 부대가 자리를 잡자 그는 잠시 쉬면서 주변을 둘러보다 추위에 언 몸을 녹이려고 경내에서 불을 피우고 있는 병사들 무리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이글거리는 불길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장작이나 나뭇가지만 타는 줄 알았던 불속에는 한눈에 봐도 귀중해 보이는 목판들이 함께 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곧바로 부대장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하고 귀중한 민족의 문화재를 회수하도록 지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부대장도 그의 단호한 주장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즉시 불을 끄고 경판들을 한 조각까지 빠짐없이 끄집어내 원위치에 도로 갖다놓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비록 일부는 이미 상해버리기도 했지만 나머지 경판들은 불구덩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젊은 장교는 전쟁이 끝난 후 언론계와 학계의 중진이 되었고 나아가 우리나라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리영희(1929~2010) 교수다. 그가 지은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는 청년들의 정신적 지침서처럼 여겨졌던 명저였다. 리 교수는 1988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 ‘역정’에서 6·25전쟁의 와중에 자칫 불쏘시개로 속절없이 사라질 뻔 했던 신흥사 경판을 살려냈던 일을 자세히 회고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자신이 구한 이 경판에 계속 관심을 갖고 있다가 회고록을 내는 기회에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전한 것이다. 리 교수는 그때까지 불교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기에 불교 문화재에 대한 지식도 거의 전무했다. 다만 장작으로 전락해 불속에서 타고 있는 경판이 유서 깊은 사찰에 보관되어 있던 것이니 당연히 잘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민족의 문화유산을 구한 뒤에도 한동안 자신이 구한 문화재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한 지인으로부터 이 경판이 한자·한글·범어의 세 종류 문자로 쓰인,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불교계에도 유일한 더 없이 소중한 문화재라는 얘기를 들었노라고 했다. 또 언젠가 이 일을 한 불교인에게 우연히 말한 적이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상대는 정색을 하면서, “그것은 그때 부처님이 어린 육군 중위 리영희의 모습을 빌려서 나타나 불구덩이에서 경판을 건져낸 것입니다”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리영희는 그 말에 우쭐해 하지 않았다. 그런 추임에 오히려 몸을 낮추며, “그것까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나의 작은 행동이 결과적으로 전장의 불길 속에 없어질 뻔 했던 소중한 우리 문화재를 구한 것이니 그저 다행일 뿐”이라고만 했다 한다.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재를 구해낸 사람이면서도 이렇게 소박하고 겸손하게 말할 수 있다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불교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중년 넘어서 자신이 신흥사 경판을 지켜낸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불교를 열심히 공부했다. ‘법보신문’의 고문을 맡은 것도 그 무렵이다. 전쟁의 와중에 아무도 돌보지 않아 잿더미로 사라지기 직전까지 갔던 신흥사 경판들은 한 사람의 문화재에 대한 사랑으로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나 오늘날 전해질 수 있었다. 그는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앞장서서 문화재를 구해냈다. 불교의 인연소기(因緣所起)란 정말 오묘하지 않은가!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66호 / 2014년 10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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