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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산 마애불

7세기 백제문화가 탄생시킨 후덕하고 환한 ‘한국인 미소’

▲ 황홀할 정도로 순박한 미소를 지닌 서산 마애불은 천년도 넘는 그 옛날부터 황해를 드나들던 백제인들에게 행복과 안녕을 빌어주었다.

문화란 기후풍토 같은 자연환경의 영향을 받고 민족 또는 국가 구성원 간의 정서 및 심정적 유대감이 많이 작용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문화 간 특질이나 차이는 말할 수 있어도 그 상대적 우월을 논하는 건 불필요한 일인 것 같다. 그래도 불교문화로 범위를 좁혀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인도나 중국보다 불교를 늦게 접했으니 도입 초기에는 아무래도 불교 선진국으로부터 배울 게 많았을 것이다. 불교미술을 보더라도 불교가 공식 인정된 4세기 후반부터 한동안은 인도나 중국의 그것을 따라가기 바빴을 게 당연하다. 그러면 우리 불교미술이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게 활짝 핀 시점은 언제였을까?

불교미술 황금기 알리는 걸작
삼존불에 반가상 배치 이례적
틀 얽매이지 않는 파격 돋보여

간결하고 소박한 이미지 특징
신라의 갸름한 얼굴과 대조적
신체 각 부위 비례도 뛰어나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 절벽의 인암(印巖)으로 불리는 바위 위에 7세기 백제 때 조각한 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다. 지금은 ‘서산 마애삼존불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해진 이 마애불은 조각의 세련되고 완숙한 솜씨로 보나 작품에서 우러나오는 예술적 감각으로 보나 우리나라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마애불 입구는 길이 좁고 계단으로 된 구불구불한 길이 나 있는데, 여기를 다 건너면 마애삼존불이 문득 시야에 들어온다. 자연에 그대로 노출된 채로 천 년이 훨씬 넘도록 모진 풍상을 어떻게 견디어왔을까 궁금하다.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 위쪽을 의도적으로 깊게 파내서 삼존불의 머리 위는 마치 우산처럼 앞쪽이 불룩 튀어나오게 해놓은 게 비결인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바위 면에 직접 와 닿는 비바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마애불 양쪽으로도 주변에 산이 둘러쳐져 있어 세찬 바람을 막아주고 있는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 고대불상의 압권이 미소에 있음을 보여주는 마애불 본존상(좌), 좌협시 반가사유상(중간) 및 우협시 보살상 얼굴(우).

삼존상은 잘 다듬어진 바위 면 가득히 새겨져 있는데, 불상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보살상이 배치된 구도다. 좌우 보살상은 왼쪽에 삼산관(三山冠)을 쓴 입상 그리고 오른쪽은 오른손을 뺨 위에 대고 의자에 앉아 있는 반가상(半跏像)이다. 삼존상에 반가상이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파격이 돋보이는 그런 마애불이다. 삼존상을 밑에서 받치고 있는 연꽃들도 모난 데 없이 둥그스름한 볼륨감이 아주 좋고,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 격조를 잃지 않은 백제 연꽃의 우아한 감각이 잘 드러나 있어 연화 대좌 중 일류로 꼽을 만하다. 삼존상 모두 얼굴이 둥글고 풍만한 편인데 특히 본존상은 약간 두툼하게 올라 솟은 눈두덩, 가늘게 휜 반달형 눈, 후덕한 얼굴의 살집 등이 신라 불상에서 많이 나타나는 갸름한 얼굴과 잘 대비된다. 무엇보다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퍽 인상적으로 다가와 넉넉하고 자비롭다는 느낌을 준다.

조각 기법이 번잡하지 않고 간결하게 형상을 잘 표현해 냈고, 언뜻 보면 다소 소박해 보이는 이미지이지만 자세히 보면 신체 각 부위의 비례감도 썩 뛰어난 데다 음각으로 파낸 선각의 깊이와 너비가 신체 부분마다 달라 멀리서 볼 때 입체감이 잘 살아나고 있다. 한마디로 여느 작품에 비길 바가 아닌 아주 세련되고 공교한 불상이란 걸 알 수 있다. 이렇게 작품의 솜씨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긴장을 풀고 근심을 다 풀어버리게 하는 매력이 이 불상의 가장 큰 미덕인 것 같다. 사람들은 불상 앞에선 다소 긴장하는 게 보통인데, 왜 이 불상은 쳐다볼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가? 그 이유가 삼존상의 미소 덕분인 걸 깨닫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중앙 여래입상의 파안대소를 비롯해 세 불보살상의 얼굴 모두 후덕하면서도 환한 미소가 얼굴 전체에 가득 퍼져 있는 게 여간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이를 보는 사람도 함께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 작품을 보노라면 백제 사람들은 행복이 전염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서산 마애삼존불의 존재가 일반에 알려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다. 인근 주민들은 이 마애불을 수시로 오가면서도 그저 산자락에 있는 여느 흔한 불상으로만 생각했지 백제 불교 최대의 조각품인지는 몰랐었다. 그러다가 1958년 이 부근에서 금동불상 하나가 출토되면서 비로소 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마애불을 가장 먼저 주목한 사람은 부여박물관장 연재(然齋) 홍사준(洪思俊, 1905~1980) 선생이다. 홍사준 선생은 업적에 비해 대중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백제 미술 연구에 아주 큰 역할을 한 분이다. 지난 10월 뒤늦게 보물로 지정된 백제 유일의 비석 ‘사택지적비’도 민간에 빨래판으로 쓰이던 것을 선생이 발견해 부여박물관으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선생은 이 마애불을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그 환한 미소가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신비한 미소와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국보 반가사유상이 신라가 아닌 백제 작품이라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우리 고대 불상의 압권은 ‘미소’에 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세계로 눈을 넓혀 보더라도 이만한 작품성 높은 미소가 담긴 작품은 찾아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로부터 이 마애불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학자들도 본격적인 조사와 연구를 진행해 7세기 백제시대의 작품임을 밝혀냈다. 특히 훗날 동국대 총장과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을 지낸 황수영(黃壽永) 선생의 연구가 두드러졌다. 그 때의 일화가 하나 있다. 황수영 선생이 어느 학술회장에서 이 서산마애불 발견을 학계에 보고할 때였다. 깜깜한 실내에 슬라이드 화면을 비추고 그 옆에서 열심히 설명하는 중에 문득 미소를 지었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청중들 모두 선생의 미소와 마애불 본존의 그것이 너무 닮았다며 감탄을 연발했다. 이로부터 선생의 미소는 백제의 미소를 판에 박은 ‘명품 미소’로 회자되었다.

보물·국보급 작품치고 이 마애불상만큼 작품의 양식이나 형식보다는 여기서 풍겨 나오는 정서적인 느낌을 많이 언급하는 예도 드물다. 특히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부분이 ‘미소’인데, 얼마나 천진하게 웃고 있는지 보는 사람도 함께 미소로 화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누가 처음 말했는지 모르지만 이 미소를 가리켜 ‘백제의 미소’라고 했다. 그리고 이 미소는 곧 백제미술의 본질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 미소는 ‘우리나라 사람의 미소’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 백제의 문화는 곧 ‘우리’의 문화이니까. 최근 서울지법의 한 부장 판사가 후배 판사들에게 재판을 진행할 때 서산 마애불의 미소 같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온 국민을 따뜻하게 맞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해서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 마애불의 미소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면 그렇게 말했을까. 이 마애불의 미소는 아마도 국보급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서산 마애불상은 7세기에 오면서 우리나라 불교미술이 황금기를 맞게 되었음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7세기의 백제는 이 외에도 태안 마애삼존불과 예산 사면석불 등 걸작도 함께 내놓았다. 이런 명작들이 잇달아 나올 수 있었던 7세기 백제 문화의 배경과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문화는 살아 숨 쉬는 생물과 한가지여서 태어나 자라나고 절정을 누리다가 사라진다. 사람도 그렇고 문화도 그렇고 자신이 뿌리내린 곳에 안주만 해서는 큰 발전을 이루기 어렵다. 외부의 자극과 격려를 과감하고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때 더욱 발전하게 된다. 백제 문화도 마찬가지여서 이토록 성숙하는데 거름이 되었던 건 바로 끊임없이 다른 지역의 문화를 섭렵하고 받아들여 이를 토착 문화에 조화시킨 진취성에 있었을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서산 마애불이기도 하다.

백제는 우리나라 역대 왕조 중에서 바다를 가장 잘 활용한 나라이기도 했다. 역사서나 유적 중에 백제가 근거리에 있는 중국을 비롯해 멀리 인도나 동남아지역까지 교류했던 해상왕국이었음을 나타내는 자료는 아주 많다. 불교가 중국으로부터 백제에 전해진 것은 주로 물길을 통해서였다. 백제는 국토의 서남단에 자리하여 동남부의 신라, 북부의 고구려에 막혀 있는 꼴이었다. 당시 주요 외교 국가였을 중국과 일본과의 육로 통행은 애당초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대신 백제는 바닷길을 뚫었다. 고구려나 신라보다도 더 일찍 바다를 경험했고 그 바다를 활동의 터전으로 삼았다. 백제가 문화적으로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다소라도 앞서 갈 수 있었던 건 바다를 이용한 국제교류가 활발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해외 교류에서 육지는 막강한 고구려가 가로막고 있어서 제약이 무척 많았을 것이지만, 너른 바다를 통해서는 아무 것도 걸릴 게 없었다. 따라서 세계사에서 보이는 다른 많은 훌륭한 문화들과 마찬가지로 백제 문화를 풍요롭게 해 준 배경은 다름 아닌 바다였다. 서산 일대는 이러한 백제 해외교류의 최첨단 지역 중 하나인데, 바로 여기에 서산 마애불이 자리한 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백제문화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7세기의 불교미술은 바다를 통해 백제의 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결과인 것이다.

어느 역사학자는 백제를 ‘동방의 로마제국’으로 표현했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건 바로 7세기의 백제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싶다. 천 년도 넘은 그 옛날 너른 황해를 드나들던 백제 사람들에게 행복과 안녕을 빌어주었던 서산 마애불의 황홀할 정도로 순박한 미소가 저 바다 물결 속에 비추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찬란하게 꽃피었던 백제 문화의 정수도 저 미소와 함께 일렁였을 것이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70호 / 2014년 11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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