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처럼 세상 살기
왼손처럼 세상 살기
  • 김형규 기자
  • 승인 2014.12.22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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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한해를 돌아보며 불현듯 군복무 시절에 읽었던 ‘연필로 명상하기’라는 책이 떠올랐다. 20년도 지난 그때, 살아왔던 삶과 너무나도 다른 이질적인 환경으로 바늘방석 같았던 불안한 삶에 작은 위안을 주었던 책이다. 워낙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라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인터넷을 뒤져 찾아보니 ‘연필로 명상하기’는 이미 절판됐고 출판사와 번역자가 바뀐 ‘연필명상’이라는 책으로 출간돼 여전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책의 저자는 프레데릭 프랑크이다. 원래는 치과의사였는데 화가로도, 사상가로도 크게 이름을 알렸다. 특히 서양에 일본불교를 전파한 스즈키 다이세츠 스님의 영향으로 동양의 선불교에 깊이 심취했다. 그에게 그림은 세상을 들여다보는 방법이다. 간화선 수행자들이 화두를 들듯 그는 연필을 들고 세상을 본다. 연필을 들고 사물을 보면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보게 된다. 한 송이 장미를 그릴 때 그 장미꽃은 내가 바라봤던 수많은 장미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장미꽃이 된다. 꽃잎의 문양과 아름다운 색깔과 가시 하나하나의 경이로움까지, 모든 것이 세세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 꽃 한 송이에 온 우주와 내가 담겨있다. 순간순간에 깨어있으라는 선사들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다.

그리기 위해 꽃을 들여다보면
그냥 꽃 아닌 유일한 꽃 탈바꿈

왼손처럼 서툴게 세상을 봐야
삶의 경이로움 대면할 수 있어


저자는 깨어있는 삶에 가장 큰 장애는 기억이나 관성이라고 말한다. 같은 장미꽃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같은 것으로 착각할 뿐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세세하게 살피지 못하고 관성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연필로 명상을 하기위해서는 왼손의 역할이 중요하다. 자주 쓰는 오른손은 그림을 왜곡한다. 그림을 그리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재를 그리지 못하고 경험에 의해 뭉뚱그려진 과거의 이미지를 사실로 포장한다. 그러나 왼손은 다르다. 서툴기에 정직하다. 기교를 부리는 것은 고사하고 눈이 본대로 따라 그리는 것도 버겁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나 매 한가지다. 그림을 사실대로 그리는 것은 사물을 얼마나 정직하게 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올해에도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전 국민을 비탄에 빠지게 한 세월호 참사의 아픔에서 온갖 정치적인 공방까지. 그러나 돌이켜보면 벌어진 일의 진실을 감추려는 시도들 또한 많았다. 이른바 프레임 싸움이다. 생각을 왜곡된 틀에 고착화시켜 세상을 보게 만들려는 공작이다. 저질 정치공방에 속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일상의 삶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기억에 휩쓸리면 현재를 보지 못한다. 작년이나 올해가 별반 다를 게 없고,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다면 앞으로의 삶 또한 기대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듯 세상을 살펴보면 색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출근길에 만나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나 봄날 차가운 대지를 뚫고 가녀린 잎을 내미는 새싹의 맑은 기운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문득 삶이 환희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된다.

▲ 김형규 부장
그러기 위해서는 왼손처럼 살아야한다. 서툴게,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세상을 대해야 한다. 불가에는 선심초심(禪心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 사물을 마주할 때 그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수행이다.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넘치는 것은 초심으로 세상을 대하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모르는 사이에 부쩍 커버린 느낌이다. 새해에는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환희로움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펴보리라.

김형규 kimh@beopbo.com

[1275호 / 2014년 12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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