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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연재를 마치며 [끝]

양 불교의 이념적 화합이 한국불교 미래 좌우

▲ 그림=최병용 화백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에 대한 비교를 마치고자 한다. 원고를 마감하면서 1990년대 초 한국에 상좌부 위빠사나 수행을 본격적으로 보급했던 거해 스님과의 일화가 다시 생각난다. 거해 스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첫 호에서 소개 한바 있다.

초기불교의 대승 비판은
불자들에게 극심한 혼란
대승은 초기 근거하지만
훨씬 더 수승한 이치 담아

당시 필자는 어느 도심 포교당에서 거해 스님을 초청하여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대개 절에서 열리는 법회는 낮 12시쯤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난 후에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순서에 따라 의식을 집전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법당 앞줄에서 눈을 감고 앉아 계시던 거해 스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의식을 집전하는 거사님을 제지했다. 그러면서 부처님 앞에서 행하는 이런 의식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스님은 곧 법상에 앉으셨고 이를 시작으로 한국불교의 여러 신행형태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스님은 먼저 한국불교에 있어 보살신앙은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대승경전에 나오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제외한 모든 불보살들은 힌두교의 신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부처님 옆에 힌두의 신상들을 모셔놓고 예불을 하는 것은 정법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스님은 또 대승불교의 세세상행 보살도(世世常行 菩薩道)라는 가르침은 세세생생 윤회하자는 말이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불교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종교이기 때문에 보살도를 실천하기 위해 계속 태어나겠다는 것은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스님은 대승불교의 불성(佛性)과 법신(法身)사상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다. 불교는 무아의 진리를 궁극으로 삼기 때문에 우주에 편재한다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데 대승불교는 불성과 법신을 말하며 불교를 아트만과 브라만을 주장하는 힌두종교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그 밖에도 스님은 한국불교의 수행방법과 신행풍토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간화선으로는 생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거나 돈오돈수 혹은 돈오점수와 같은 경지는 부처님 가르침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다라니 독송이나 염불정근 역시 불교수행이 아니라고 했다. 대승불교에 대한 스님의 신랄한 비판에 불자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더러는 스님에게 반발하여 법당에서 나가버리는 신도도  있었다. 필자 역시 스님의 이와 같은 설법에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함께 토론까지 했지만 일치하는 점을 찾기란 매우 힘이 들었다. 필자가 새삼 원고를 마무리하며 거해 스님과의 일화를 꺼내는 이유는 현 한국 불교의 내적흐름에 이런 분위기가 그대로 방치된 채 흘러가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과연 남방의 상좌부 불교가 초기불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수행의 방법에 있어 이론이 있을지 몰라도 남방 상좌부가 불교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모든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이상 남방불교는 초기불교라고 해야 옳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와 같은 초기불교의 확장이 대승불교의 위축을 가져온다는데 있다. 현재 한국불교의 분위기를 보면 남방불교권의 영향에 의해 퍼지고 있는 초기불교의 확장에 별 다른 우려를 하지 않고 있다. 도리어 초기불교의 확장이 한국불교를 새롭게 할 것이라는 기대마저 느껴진다. 고목(枯木)과도 같은 한국불교에 새순이 돋는 것처럼 초기불교를 신선한 가르침으로 여긴다.

조계종의 경우 초기불교의 확장에 따른 한국불교의 변화에 대한 연구나 분석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수행법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관심을 쏟고 있을 뿐이다. 초기불교가 안고 올 대승불교의 지각변동에 대해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초기불교가 배제된 대승불교는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초기불교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불교는 대승불교를 표방하면서 초기불교를 등한시 해왔다. 한국불교의 이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대승불교 자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가져오게 했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초기불교에 대한 공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한국불교는 이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일은 한국불교에 있어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더욱 보호되고 확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중생을 행복으로 이끄는데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초기불교의 가르침보다 훨씬 수승한 이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가 대승불교의 정신을 바르게 구현하지 못해서 그렇지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분명 초기불교의 가르침보다 위대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필자는 일찍이 한국의 대승불교에 위기가 올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부처님의 직설을 주장하는 초기불교에 의해 대승불교의 신행 및 수행관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관음기도·지장기도 같은 보살신앙이 사라지고 ‘법화경’ ‘화엄경’ ‘원각경’ 같은 경전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는 실정이다. 대승경전을 설하는 도량이 드물고 모든 명상의 주류가 남방 위빠사나에 근거한 방법들로 채워지고 있다. 대학의 학위논문도 대승불교에 관한 내용들보다 초기불교에 관한 내용들이 더 많다. 불과 이십년 넘는 기간에 한국불교는 급격한 이념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대립관계가 아니다. 초기불교는 대승불교의 기반이며 근거이다. 대승불교가 초기불교를 거부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를 대승의 길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초기불교를 신봉하는 불자들 역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초기불교를 신봉하면서도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는 초기불교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이념적 화합은 앞으로 불교가 발전하는데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종단과 지도자들에게 풀어야 할 과제를 안겨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75호 / 2014년 12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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