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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기-하

본성을 결정하는 것은 내부 아닌 외부의 조건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사물이 이렇다면, 사람이라고 다를까? 사람에겐 다른 동물과 다른 특별한 본성이 있다는 식의 생각은 아주 흔한 것이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니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니 ‘놀이하는 동물’이니 하는 얘기는 안 들어본 이를 찾기 힘들다. 그리고 여전히 많이들 당연하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동일한 물질도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의 성질로 나타나
인간인 흑인이 노예된 것은
끔찍한 백인 만난데서 기인

그러나 동물의 행동을 관찰한 동물행동학의 연구에 따르면, 사람만이 생각한다는 건 오래된 착각이다.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이 ‘생각’한다. 시튼의 ‘동물기’에 등장하는 ‘늑대왕 로보’는 인간을 조롱할 정도의 탁월한 판단력을 갖고 있으며, 덫에 걸린 여친의 주위를 며칠 간 맴돌다 여친인 레베카가 잡혀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잡혀선 인간이 준 일체의 먹이를 거부하고 함께 죽는다. 이는 나처럼 평범한 인간은 생각하지 못하는 고전적인 비극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숭고한 행동이다. 벌들이 정교한 언어를 구사하며, 돌고래는 고유명사까지 사용한다. 개나 고양이, 심지어 쥐들도 다양한 종류의 정신병을 앓는데, 이는 그들이 인간만큼이나 ‘정신’을 가진 동물임을 뜻한다.

사람이나 동물에 어떤 불변의 본성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 받았던 것은 흑인들이었다. 백인들이 이른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뒤, 인디언이 ‘인간’인지를 둘러싸고 대대적인 논쟁이 있었다. 아마존 지역의 인디언 과라니 족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다루는 영화 ‘미션’이 보여주듯이, ‘인간’이란 판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노예사냥의 대상이 되며, 동물이나 사물처럼 매매되는 상품이 됨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논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흑인도 인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휴머니스트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흑인은, 인간과 본성을 달리하는 ‘동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흑인이 노예가 되었던 것은 저 끔직한 백인들과의 만남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총으로 무장한 백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이라면, 인디언들이 자유인이었듯이 흑인들 역시 자유인이었다. 백인들이 들이닥친 이후라도, 백인과의 만남을 피할 수 있었다면, 노예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비록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하지만, 백인들이 옆에 있다고 해도 노예가 되지 않는다. 연기적 조건이 흑인의 운명을, 그들의 ‘본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런 연기적 사유와 누구보다 근접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게 맑스라고 한다면 많은 이들은 뜻밖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때 그는 헤겔이나 포이어바흐처럼 인간에겐 고유한 본성이 있는데, 자본주의에 이르러 그것을 상실한 ‘소외’상태에 빠졌다는 식으로 생각했지만, 곧 그로부터 벗어나 역사적 조건에 따라 모든 것의 본성이 달라진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를 그는 ‘역사유물론’이라고 명명하는데, 이때 ‘유물론’은 물질의 실재성을 강조하는 통상의 ‘유물론’과 무관하다. 이런 발상법을 요약하기 위해 그는 바로 흑인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임노동과 자본’)

흑인을 노예로 만드는 것은 그의 동물적 본성 같은 게 아니라, 총 든 백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형성된 특정한 관계, 그런 특정한 조건이다. 그 조건, 그 관계가 달라지면, 흑인은 얼마든지 자유인이 될 수 있다. 덧붙이면, 맑스는 같은 글에서 흑인만이 아니라 방적기 같은 기계나 사물도 불변의 본성은 없으며, ‘특정한 관계’에 따라 다른 본성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고 착취하는 관계를, 그 역사적 조건을 바꿈으로써 다른 세상, 다른 ‘인간’이 출현하리라는 그의 신념은 이런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든 사물이든, 어떤 것도 불변의 본성은 없다. 그게 없기에,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본성’들이 있는 것이다. 본성 아닌 본성들이. 그렇다면 이 수많은 본성들을 본성이 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연기적 조건이다. 바이올린이 만나는 ‘이웃’, 흑인이 만나는 ‘이웃’이다. 어떤 것의 본성은 그것이 만나는 이웃이, 수학자들이 좋아할 말로 하면, ‘이웃관계’가 결정한다. 칼은 당근의 ‘살’이란 이웃과 만나면 도구가 되지만, 사람의 살이란 이웃과 만나면 흉기가 된다. 좋은 본성을 가지려면, 좋은 이웃을 만나야 한다. 연기적 조건이 그렇듯, ‘이웃’이란 밖에서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이올린이나 흑인의 본성은 그것의 내부에 있는 게 아니라 ‘외부’에 있다고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연기적 사유는 어떤 것의 본성을 그 ‘외부’에 의해 포착하는 ‘외부성의 사유’다.

이런 사고의 방법은 인간이나 사물 이하의 매우 미시적인 수준에서도 유효하게 작동한다. 예컨대 유전자를 구성하는 A, G, T, C라는 뉴클레오티드는 세 개씩 짝을 이루어 그에 대응하는 아미노산을 만드는데, 똑같은 아데닌(A)이 옆에 A와 G를 끼고 AAG로 결합되면 리신이란 아미노산이 되지만, 왼쪽에 A 대신 C(시토신)가 와서 CAG가 되면 글루타민이란 아미노산이 된다. 동일한 아데닌(A)이 이웃관계에 따라 다른 ‘본성’의 아미노산을 구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연기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 다른 아미노산을 만드는 것이다. 이 이웃관계에서 떼어내 아데닌 자체의 본성을 말하는 것은, 앞서 본 예에서처럼 아무 의미가 없다. 유전자란 A, G, T C라는 뉴클레오티드가 어떤 이웃관계를 이루며 배열되는가에 따라 아주 다른 ‘본성’의 유전형질을 만들어낸다. 동일한 유전자도 세포질이나 이웃한 세포 등의 ‘환경’에 따라 다른 형질의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유전자의 작용 또한 연기적 조건에 기대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연기적 사유는 동일한 것조차 조건에 따라 그 본성을 달리함을 본다. 불변의 실체나 동일성을 찾는 사유는, 밥에서 쌀을 보고 풀이나 술에서도 쌀만 본다. 반면 연기적 사유는 동일한 쌀이 어떤 조건에 처하는가에 따라 밥이 되기도 하고, 술이 되기도 하며, 풀이 되기도 함을 본다. 전자가 다양한 것들 사이에 있는 공통된 요인을 찾아내는 ‘분석’의 방법을 사용한다면, 후자는 동일한 요인이 다른 조건과 만나 다른 것이 됨을 보는 ‘종합’의 방법을 사용한다. 전자는 현실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역행적 사고라면, 후자는 저 멀리서부터 현실로 내려오는 순행적 사고다. 전자가 다양성을 제거하여 동일한 것에 이르려는 환원적인 사고라면, 후자는 동일한 것이 조건에 따라 달라짐을 보는 다양성의 사고다. 하나가 변함없는 것을 통해 변화 없는 세계에 대한 소망을 암묵적으로 배양한다면, 다른 하나는 무상한 변화의 세계를 긍정하고 그 변화의 선을 타고 갈 것을 가르친다. 이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상반되는 사유의 방향인 것 같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일 게다. 그러나 그 선택이 자신의 사고를 어디로 밀고 가는지는 알고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78호 / 2015년 1월 1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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