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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윤리

기자명 함돈균

‘공(空, sunya)’이라는 개념으로 압축되는 불교적 허무주의는 ‘인생이 허무해!’와 같은 식으로 세상에서 회자되는 말과는 상관이 없다. 불교의 ‘허무’는 고정된 것, 고착된 것, 그 자체의 성질, 불변의 실체를 부정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만상을 끝없는 변화와 생성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실체 개념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이 ‘나’ ‘자아’란 개념이다. 만상에 실체가 없다면 ‘나’ ‘자아’도 실체가 없을 것이다. 자아의 ‘실체 없음’을 풀어서 얘기하면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첫째, ‘나’도 시간에 따라 끝없이 변화한다. 둘째, ‘나’ 속에는 나와 접속한 무수한 타자들이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타자’의 담지자이기도 하다. 셋째,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정체성은 인지착오적 오해일 수 있다.

불교의 허무주의적 인식론은 노장철학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동아시아 특유의 사유로 진화했다. 예컨대 언어와 실체 개념에 대한 ‘장자’의 회의주의는 동아시아 선불교 성립에 상당한 이론적 모티프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학평론가로서 내가 이 책에서 특히 좋아하는 대목은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최고의 문장 중 하나로 손꼽히는 ‘제물론(齊物論)’의 ‘땅에서 부는 퉁소소리’ 같은 부분이다.

그 유명한 문장에서 ‘남곽자기’는 온갖 구멍을 거치며 들려오는 땅의 갖가지 ‘바람소리(퉁소소리)’를 대단히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문장에서 중요한 구절은 묘사 초점인 ‘퉁소소리’가 아니라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吾喪我)”는 구절이다. 땅의 여러 구멍을 거치며 나는 수많은 바람소리는 본래 없던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늘 불고 있던 소리이지만 평소에 내 귀에 들리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는 ‘퉁소소리’가 아니라 그것에 열리지 못하는 ‘내 귀’다. 어떻게 이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는가. 그의 비법은 ‘나는 나를 잃어버리는’ 방법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말은 내가 멍한 상태로 무언가에 홀려있거나 몰두하고 있다는 식의 뜻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를 어떤 ‘시적인’ 상태에 대한 유비로 읽는다면, 이는 멍한 정신상태가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주관적 의지와 관념들을 누그러뜨리고, 바깥의 존재에 나를 개방하는  순간을 뜻한다. ‘바깥’의 ‘소리’가 잘 들리려면 내 주관적 의식에 힘을 빼야 한다. 타자를 영접하려면 자아의 울타리를 허물거나 낮춰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귀가 열리고 존재의 생생하고 다양한 실상을 지각하게 되며, ‘나’는 온갖 외물이 거주하고 공존하는 타자들의 우주가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시인이 시를 쓰는 상태이다. 전통 시가에서 종종 언급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란 표현을 흔히 ‘사물에 대한 주관적 도취 상태’로 이해하지만, 그건 시적 상태에 대한 오해다. 오히려 거꾸로다. 거기에서 포기되는 것은 주관이다. ‘자아’라는 이름의 완강한 허상과 그것을 구축하고 있는 자기고집을 포기함으로써 지각되지 못했던 존재의 또 다른 양상을 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인 자기 포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철학적 허무주의와 닿는 지점이 있으며, 타자를 발견하는 긍정의 윤리가 된다.

박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인문학자로서 품평한다면, ‘나는 나를 잃는다’는 저 남곽자기의 포즈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아쉬움을 지적하고 싶다. 대통령의 얼굴표정은 지나치게 완강했으며, 목소리는 필요 이상의 과잉 자신감으로 차 있었다. 국가의 침몰을 보는 듯한 위기의식 속에서 온국민이 극단적 심리공황에 빠졌던 2014년을 겪었지만, 2015년 신년기자회견의 목소리와 눈빛은 2014년 신년회견 때 그것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자아에는 ‘시간’도 ‘국민’이라는 타자도 깃들지 못한 것 같았다. 대통령의 ‘나’는 자아의 실상에 대한 인지착오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집권세력에게 필요한 것은 ‘건국절’ 논란 같은 허깨비 국가정체성 강화(재규정) 놀음이 아니다. 타자를 억압하는 폭력적 자기 과잉 상태를 깨닫고, 근거 없는 자아의 고집스러움을 누그러뜨림으로써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개방된 ‘허무주의’의 윤리, 그것이 필요하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husaing@naver.com

[1280호 / 2015년 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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