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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울진 불영사 불패

기자명 신대현

350년 전 스님 셋이 의기투합해 만든 불교목공예 걸작

▲ 섬세하고 정교한 조각에 채색도 매우 뛰어난 불영사 불패들(왼쪽과 가운데). 원래는 3점이었으나 지금은 2점만 전해지고 있으며, 왼쪽 불패 뒷면에는 이를 조성했던 스님들의 발원이 기록돼 있다(오른쪽).

예술을 뜻하는 Art의 어원은 ‘어깨’라는 뜻의 Arm이다. 튼튼한 어깨와 솜씨 있는 손길로 잘 만든다는 뜻으로, 처음에는 ‘공예’ 또는 ‘기술’을 의미했다. Art는 대략 18세기 말에야 지금처럼 예술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공예는 ‘힘’을 의미하는 독일어 Kraft에서 파생된 Craft로 대체되었다. 어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공예의 특질은 예술이라는 바탕 위에 기능성과 편리성이 더해진 데 있다. 조각이나 회화 등 여타 분야보다 공예 작품이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불교미술로 보면 이 기능성과 편리성은 장엄(莊嚴)과 의식(儀式)으로 바뀌어서, 불교공예라면 대체로 장엄구이거나 의식용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처님 명호 적어 불단에 봉안
무량사 삼전패 필적하는 작품

1681년 스님 화가 3명 만행
불영사 빼어난 절경에 탄복

여름 내내 머무르며 ‘재능기부’
불패 3점 완성하고 다시 만행

불패 조성 도왔던 주지도 고승
영의정도 고매한 인품 찬탄

공예 중에서도 목재를 기반으로 한 목공예는 금속·도자·종이·가죽 등 다른 공예품에 비해 사람이 느끼는 질감이 자연스럽고 친화적이다. 그래서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발전해 왔지만 아쉽게도 문화재로서의 관심은 높지 않았다. 다행히 얼마 전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 무량사 삼전패(三殿牌) 등 불교목공예가 보물로 지정되면서 앞으로 좀 더 많은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무량사 삼전패는 불패(佛牌)로는 처음으로 보물이 되는 것이라 의미가 있었다.

불패나 전패는 위패의 개념과 기본적으로 비슷한데 불상 앞에 놓인 불탁(佛卓) 혹은 수미단(須彌壇) 위에 놓이기 마련이다. 부처님 명호를 적어 넣은 것을 불패,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 등 ‘전하(殿下)’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글을 적은 것을 전패로 구분하는데 형태는 둘 다 거의 같다. 불패·전패 중에는 뒷면에 이를 만든 연도와 과정이 적힌 것도 많아 기록문화재로서의 가치도 크다. 보통 대좌가 있고 그 위에 불꽃이나 아래위로 길쭉한 서운(瑞雲) 모습을 형상화한 본체를 올려놓은 형태다. 본체 가운데를 직사각형 모양으로 뚫어 놓고 여기에 축원문을 별도로 적은 판자를 끼워 넣고, 그 가장자리에 용이나 구름 그리고 여러 종류의 꽃이나 보주(寶珠) 등을 새겨서 화려하게 장식한다.

불패가 언제부터 나타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데 고려 불패는 아직 발견된 게 없기도 해서, 나라의 근본이념이 유교로 바뀐 조선시대부터 일반화 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절에서 유교의 상징물인 위패 형식의 불패를 두는 것을 두고 불교의 구명책(救命策)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보다는 불교의 사회융합적 기능이 발휘된 것으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우리나라 사찰에 전하는 조선시대 불패 중에서 불영사의 불패 2점은 전체적으로 형태와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할 뿐만 아니라 대좌 형식도 특이하고, 또 채색도 매우 뛰어난 편이어서 무량사 삼전패에 필적하는 불패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여기다가 조성에 관련된 묵서까지 있어 불패 연구에 아주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묵서에는 불패뿐만 아니라 전패도 각 3개씩 동시에 만들었다고 나오는데, 기록으로만 보면 이런 경우는 처음 알려진 예이다. 지금은 이 중 둘만 전한다. 두 점 모두 은행나무로 만들어졌고, 본체의 모양은 서로 비슷하지만 대좌를 다르게 해서 변화를 주고 있는 점도 작품성을 높이는 요소다.

형태를 보면, 한 점은 높이 70cm가 조금 넘어 크기가 큰 편이다. 불패 앞면 중앙에 직사각형의 면을 만들고 그 안에 먹으로 쓴 ‘雨順風調(우순풍조) 國泰民安(국태민안)’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 또 그 가장자리는 여러 가지 무늬로 장식했다. 무늬 중에는 위쪽에 황룡 한 마리가 구름 사이로 얼굴을 드러내고 있으며, 중앙 좌우에도 황룡 한 마리가 각각 양각되어 있다. 황룡이 황제나 왕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므로 자연스러운 도안인 것 같다. 가장자리는 구름 모양을 각양각색으로 화려하게 조식하였다.

몇 년 전 경상북도문화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전통문양 공모전’에서 불영사 불패의 무늬를 응용한 디자인이 입선된 적이 있으니 이 불패 무늬의 아름다움을 넉넉히 알 수 있다. 다른 한 점도 전체적으로는 비슷한 모양이고 크기만 34cm로 작을 뿐이다. 대좌는 지금 있는 두 점이 사자좌와 연화자로 서로 다른데, 불패와 전패로 구분하기 위해서 이렇게 다른 도안을 사용했을 것이다. 지금은 없는 나머지 한 점은 1988년 울진군에서 낸 ‘울진의 얼’이라는 책에 사진이 실려 있고 간단한 설명도 나와 있다. 모양은 지금 전하는 두 점과 기본적으로 비슷한데, 높이 42cm이고 가운데에 ‘十方三寶慈尊(시방삼보자존)’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불패 3점 중 중앙에 자리했던 것 같다.

미술품은 작품의 분석과 더불어 제작 배경과 과정을 함께 이해하면 감상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 면에서 ‘우순풍조’가 새겨진 불패 뒷면에 이를 만든 배경이 자세히 나오는 ‘발원문서(發願文序)’는 아주 소중한 기록이다. 포항 오어사의 철현(哲玄) 스님은 조선시대 후기의 중진 화가였다. 대작 ‘감로왕도’(보물 1239호)를 조성할 때 책임자인 수화승(首畵僧)을 맡았고, 한국불교미술박물관 소장 ‘시왕도’ 10폭 중 5폭이 바로 그의 단독 작품이다. 그는 특히 인물 표현에 능해서 조선전기에 유행했던 얼굴을 붉게 칠하는 안면홍조 표현이나 이마·코·턱을 밝게 칠하는 삼백법 등의 기법을 잘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같은 화가로서 이미 여러 작품을 함께 했던 양산 통도사의 영현(靈現)과 탁진(卓眞) 스님은 함께 멀리 송악(지금의 개성)에 다녀오는 여행을 준비했다. 1681년 봄에 ‘감로왕도’를 그릴 때 이들과 작업하면서 자세한 여행 계획을 의논했던 것 같다. 그 해 여름 안거에 맞추어 드디어 여행을 떠났다. 승려로서의 운수행각을 겸해 전국 고찰에 있는 작품들을 보려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작품들을 많이 봐야하니까. 이들은 도중에 울진 불영사로 해서 올라가기로 했다. 양성혜능(養性惠能, 1621~1696) 스님이 주지로 있었는데 그 해 봄에 ‘감로왕도’를 그릴 때 증명(證明)을 맡으면서 알게 된 사이니 자연스러운 방문이었을 것이다. 영현·탁진 스님이 오어사로 와 철현과 합류해 여기서부터 함께 길을 떠났다.

▲ 불영사의 경관은 만행길에 오른 옛스님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런데 불영사에 도착하자 주변의 빼어난 절경에 마음을 뺏겼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자고 했다. 그냥 머무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재주를 이용해 뭔가 절에 보탬이 되고 싶어 했다. 이때 그들의 심정이 발원문에 잘 드러난다. “우리들은 손에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고, 마음에는 깊은 믿음이 있었으며, 주지인 혜능대사 또한 믿음이 있는 인물이었다. 서로 믿고 화합하면서 사찰의 부족한 점을 같이 한스러워했다(手有高才心有深信 而寺住惠能大士 亦有信士也 信信相熙 同恨寺之所欠者).” 마침 절에 불패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함께 불패를 만들어 봉안하기로 했다. 일종의 ‘재능기부’를 한 것이다. 그들이 불패를 만들게 된 연유는 ‘불패와 전패란 세상이 기이한 보배로서 대중들이 정성스럽게 공경하는 것(佛牌三位殿牌三位 而爲世之奇寶 衆所感嗼次)’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발원문은 이름 그대로 발원으로 끝을 맺었는데, 말속에 불패를 완성하고 난 소회가 잘 담겨 있다. “저희 네 사람(철현·영현·탁진·혜능)이 함께 발원하노니, 금강이 불후한 것과 같이 오랫동안 대각의 지표를 이루게 하시옵소서. 또 원하건대, 이로써 일체 공덕을 널리 전하여 우리들과 뭇 중생들이 모두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해주소서!(以此四德同願金剛不朽之同 終成大覺之標歟 願以此功德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皆共成佛道)” 이 간절한 바람에서 이들 네 사람의 불도(佛道)에 대한 순수하고 참된 열정이 가득 느껴진다.

350년 전 세 스님이 의기투합해 멀리 개성까지 여행길을 나섰다가, 노중에 들른 불영사에서 생각지 않던 인연으로 불패를 조성한 다음 표연히 다시 길을 떠나는 모습을 머리에 그리면 마치 한 편의 ‘로드무비’를 보는 것 같다. 이후 세 스님이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는지 궁금한데, 철현 스님이 12년 뒤 여수 흥국사에서 석가후불탱(보물 578호)를 조성할 때 참여했으니 그들의 긴 여정은 성공한 것 같기는 하다. 불영사 불패 조성의 네 주역 중 한 사람인 주지 혜능 스님은 그로부터 15년 뒤에 일흔 여섯의 나이로 입적했다. 혜능 스님은 사실 우리 불교사의 숨겨진 고승이다. 그의 부도와 탑비가 불영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비문에 “아! 우리 대사시여, 후세에 족히 징표가 되리라(於我大師 在後足徵)” 하며 찬탄한 것만 봐도 그의 고매한 행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불영사 불패는 그 자체로 좋은 작품이지만 발원문의 내용과 함께 보면 새로운 가치가 더 드러나는 것 같다. 앞으로 불패를 위시해 여러 많은 불교목공예가 우리 앞에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1280호 / 2015년 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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