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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반가상은 미륵보살인가?

‘반가상=미륵’ 통념…인도·중국 사례로 일부 학자들 부정

▲ 국보 83호 공식명칭에서 ‘미륵보살’이 사라졌다. 미륵임에도 미륵이라 부르지 못하는 이 상황은 학자들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심정인 셈이다. 왼쪽 사진은 일본 교토 코류지(廣隆寺)의 목조반가상. 한국에서 건너간 불상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 83호 반가상과 매우 흡사하다. 가운데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오른쪽은 일본 교토 코류지에 전하는 두 번째 반가사유상. 지금은 일본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과거에는 박물관의 유물 설명이나 교과서 등에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란 명칭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다양한 백과사전에서 아직도 이 용어를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예전에는 반가사유상에 미륵보살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한국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623년 신라가 일본에 보낸
교토 코류지 반가상과 비슷

‘일본서기’ 등 고대문헌에는
반가상, 미륵보살 언급 없어
인도·중국 미륵도 다른 형태
국립중앙박물관 ‘미륵’ 삭제

도상학적으로 미륵보살 타당
한국 반가상 독자성 인정하고
이렇게 만든 이유 연구해야

하지만 미술사의 연구범위가 넓어지고, 중국과 멀리 인도의 불교미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과연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인가?’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의문은 미륵보살상이라는 것을 의심하기보다는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 대부분의 불교미술사학자들은 반가사유상이 미륵보살을 표현한 것이라는데 미묘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큰 논쟁거리라고 볼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다소 의아하게도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반가상이 아닌 일본 코류지(廣隆寺)에 봉안된 목조반가상 때문에 종종 첨예하게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일본의 국보 1호라고 해서 유명한 이 코류지의 목조반가상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3호 반가상과 매우 유사하여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각별한 사랑을 받는 반가상이다. 따지고 보면 이 반가상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바다 건너간 이 불상에게서 진한 감동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보 83호 반가상과 똑같은 이 상이 우리나라에서 건너갔다는 사실에 무슨 논쟁거리가 있겠나 싶겠지만, 문제는 복잡하다. 이 코류지 상의 경우, 차라리 아무런 문헌사료가 남아있지 않았다면 국보 83호상과의 연관성을 들어 별다른 의심 없이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어느 나라 불상으로 간주되었겠지만, 문제는 다소 부정확한 점이 있는 문헌사료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미술사에 있어서 문헌은 많은 경우 상황을 정리해주기보다는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우선 이 목조반가상이라고 생각되는 불상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은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이다. 이에 의하면 603년에 성덕태자가 진하승(秦何勝)이라는 사람에게 불상을 하사했고, 그 불상은 봉강사(蜂岡寺)에 봉안되었다고 한다. 이 봉강사가 바로 코류지이다. 이어 623년에는 신라에서 불상과 금탑 등을 보냈는데, 이 중에 불상은 다시금 코류지에 봉안했다는 기록이다. 여하간 ‘일본서기’에는 두 불상이 등장하고 모두 코류지에 봉안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가상이라는 말도 없고, 미륵보살이라는 말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현재의 목조반가상 및 이와 함께 전시되고 있는 또 다른 1구의 반가상을 합쳐서 이들이 바로 ‘일본서기’에서 언급한 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코류지에서 890년에 편찬된 ‘자재교체실록장(資財交替實錄帳)’에서는 이 절에 ‘높이 2척8촌의 금색미륵보살상’이 2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약 이 미륵보살상 2구가 유사한 크기로 보아 현존하는 코류지의 두 반가상을 일컫는 것이라면, 반가상이 미륵보살이라는 매우 확실한 증거가 되므로 이는 중요한 기록이다. 국보83호와 닮은 반가상은 나뭇결이 드러나 있지만, 과거 사진에서는 다른 목불상처럼 금박이 입혀졌던 흔적이 보여서 충분히 ‘금색상’으로 불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헤이안 시대에 쓰여진 ‘성덕태자전력(聖德太子傳曆)’과 같은 헤이안 시대인 1169년 편찬된 ‘부상략기(扶桑略紀)’에도 616년에 신라에서 상을 보내왔고, 이 상을 코류지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보여서 신라 제작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런데 다시금 1314년에 쓰여진 문헌에는 코류지 금당의 본존은 신라에서 보내온 높이 2척의 미륵상이고, 그 동쪽에 2척8촌의 금동여의륜관음, 서쪽에 약사를 안치했다고 나와 있다. 높이도 조금 다르고 존명도 하나는 여의륜관음으로 변했다. 금동이라는 재질상의 차이는 혹 직접 만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착오로 볼 수도 있다.

끝으로 1499년의 기록에는 다시 2척8촌의 상이 백제에서 온 미륵상이고, 2척 크기의 상은 신라에서 온 여의륜관음이라고 밝히고 있어 앞서의 기록과 차이가 있고, 거기에 백제설까지 등장하여 사태는 점점 복잡해진다. 이 정도 되면 이 문헌들의 기록이 애초 불상이 건너간 시대 사람들의 시각이 아니라, 글이 쓰여질 당시 사람들의 시각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불상이 건너온 후 100년경 쓰여진 기록에서는 미륵이라는 말이 없었는데, 왜 갑자기 미륵이라는 설명이 튀어나온 것이며, 그나마도 왜 또 관음보살이라는 명칭까지 끼어드는 것일까? 특히나 반가상이라는 특이한 자세의 상임에도 왜 이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없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 이후의 기록에 대해서는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국보 83호와 유사한 반가상은 대체로 한국전래설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조금씩 등장했으며, 특히 신라전래설과 백제전래설이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는 국보 83호의 제작지가 신라인가 백제인가 하는 우리나라 학자들의 논란과도 얽혀있는 문제여서 흥미롭다. 코류지의 또 다른 반가상은 이제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불상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면 기록 속의 우리나라 전래 불상 두 구 중의 하나는 사라진 것일까?

일본학자들의 이러한 논란은 결국 일본 속의 우리 문화의 흔적을 찾는 것이기에 우리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고, 우리의 연구 성과 역시 일본학계에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문헌기록에는 반가상이라는 언급이 없어서, 문헌 속의 불상이 이들 반가상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냐가 초미의 관심인데, 바로 이때 유일한 단서가 ‘미륵’인 것이다. 다시 말해 문헌들은 ‘반가상’이라고 언급하지 않았지만, ‘반가상’이기 때문에 ‘미륵’으로 본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반가상=미륵보살”의 근거가 대체로 우리나라에서 비롯된 듯하다. 더구나 코류지의 반가상이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상이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사실상 큰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던 ‘반가상=미륵보살’의 개념에 대해 우리가 뭔가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재미난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 운강석굴 제12굴 측벽 감실의 도솔천 도상. 중앙의 교각미륵보살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반가상이 협시하고 있다. 북위시대.

‘반가상=미륵보살’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인도와 중국에서 반가상이 미륵보살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근거로 삼는다. 이 도상은 주로 ‘싯다르타 태자 사유상’으로 인식되었고, 때문에 코류지 상도 미륵이 아닌 ‘성덕태자상’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까지 등장했다. 한편 중국에서는 미륵보살을 의자에 앉아 발목을 교차시킨 ‘교각(交脚)좌세’로 묘사했던 것이 거의 분명하다. 그러나 인도나 중국에서 반가상을 미륵으로 인식했는가 아닌가의 문제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인식했는가의 문제는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만약 중국과 우리나라가 같았다고 한다면, 왜 우리나라에서는 교각좌세의 보살상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미륵보살이 없었다는 뜻일까?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 경주 신선사 마애불상군. 왼쪽 보살상과 가운데 불입상이 마치 오른쪽 반가상으로 안내하는 듯하여 수기삼존이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에서 반가상은 주로 교각좌의 미륵보살상 양옆을 협시하는 도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가운데 미륵보살은 제외하고 협시였던 반가상 도상만 가져와서 주존의 도상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의 반가상도 어떤 존상의 협시였다면 중국처럼 좌우가 바뀐 반가상이 골고루 나타나야 할 것이지만, 우리나라 반가상은 모두 오른발을 왼쪽다리 위에 올린 자세이다. 특히 경주 단석산 신선사의 마애불 중에 등장하는 반가상은 협시보살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중앙의 본존불상으로부터 경의를 받는 듯한 자세로 앉아있다. 보살임에도 부처로부터 지극한 경의를 받는 이 보살은 석가모니로부터 수기(受記)를 받는 미륵보살의 도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럼에도 국립박물관에서의 공식명칭에서 ‘미륵보살’은 사라졌다. 미륵임에도 미륵이라 부르지 못하는 이 상황은 학자들이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심정인 셈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풀어야할 과제는 반가상이 미륵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라 왜 우리나라는 교각이 아닌 반가좌의 자세로 미륵을 표현했는가를 밝히는 일일 것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indijoo@hanmail.net


[1281호 / 2015년 2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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