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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무상-중

동일성 찾는 욕망이 ‘같다’라는 오류 만들어

▲ 일러스트=김주대 문인화가·시인

세상의 실상, 그것은 무상이다. 차이만이 존재하건만, 왜 우리는 어디서나 동일성을 찾으려 할까? 동일성과 짝된 차이만을 보게 되는 것일까? 사실 철저하게 무상함을 보는 것만으로는 대단히 곤혹스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가령 학교에서 수업을 할 때 출석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무상을 깊이 통찰했다면, 출석을 부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지난주에 온 사람과 오늘 온 사람의 동일성을 멋대로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이진경’이라는 같은 이름을 써서 기고하고 연재하는데, 이 또한 어느새 어떤 동일성에 사로잡힌 것을 뜻한다.

일상서 동일함을 찾는 건
실상 있다는 무지서 비롯
무지하지만 이마저도 몰라
실상 본다는 착각에 빠져

무상의 통찰을 철저하게 관철하기로 맘먹었다면, 우리는 산사 앞에서 본 동물이 무엇이었는지 말할 수 없을 것이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며, 직업이 뭐냐거나 어디 가느냐는 말에 답하지 못할 것이다. 눈앞에서 상대방이 하는 말 또한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무상’이란 말의 발음조차 사실 매순간 다른 주파수를 갖는, 다른 소리로 듣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에게 한정된 게 아니다. 저기서 다가오는 동물이, 얼마 전에 자신의 친구를 잡아먹은 넘과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넘임을 알지 못한다면, 저 토끼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긴가 민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일단 비슷하게 생긴 넘이면 ‘같다’고 생각하고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차이를 정확히 보려고 머뭇거리다간 어느새 다음 생의 문턱을 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동물들이 ‘분별’에 연연해하는 일차적인 이유다. 그런 기억들은 신체에 새겨지며, 세포나 세포 이하의 층위에 침전된다. 유전자에 기억된 먹이와 적에 대한 기억이 그런 것일 게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동일화하려는 의지가 생겨나고,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욕망이 생겨나게 된 것일 게다. 동일성 없는 차이란 카오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성은 무상을 보려는 입장에선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필수적인 유용성을 갖는 필요이고 누구도 피하기 힘든 ‘필연’인 것이다. 그래서 매순간 달라져 가는 것에서 공통성이나 유사성을 찾아 연결하며 동일성을 만들어내려는 의지가 작동하는 것이고, 그것이 다음번에 어디선가 유사한 것을 보면 ‘같다’고 지각하고 판단하게 하는 ‘씨’(종자)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좀 더 확실하게 이름이라도 붙여 놓으면, 심지어 그 대상이 눈앞에 없어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알려주고 명령할 수 있게 된다. 이름 붙은 것들, 언어로 말해지는 것들은 그런 점에서 편의를 위해 무상을 지우는 동일성의 힘과 의지를 가동시킨다. 언어로 말하는 것이 언제나 ‘실상’을 놓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언어를 쓰지 않고선, 명언종자를 가동시키지 않고선 무상의 가르침도, 세상의 존재론적 진실로 알려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석가모니가 자신이 깨달은 것이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말 말고는 전할 길이 없기에 망설이다 세간으로 내려가는 것도, 선사들이 도란 말로 전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전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무지가 실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면, 이는 근본적으로 동일성 때문에 무상의 실상을 볼 수 없는 이런 조건에서 기인한다. 근본적 층위에서 발생하는 이 무지란, 새끼줄을 뱀으로 오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뱀을 뱀이라고 보는데 포함된 오인이다. 눈앞의 대상이 전에 본 뱀과 ‘동일한’ 대상이라고 보는데서 오는 오인이다. 따라서 그것은 눈을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눈을 사용하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귀가 막혀 들리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귀로 분별하기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지 ‘빛(明)이 없어서’ 무상의 실상이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눈이 필요로 하는 빛에 의해 무상의 실상이 가려지는 것이다.

이런 무지를 ‘근본적 무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세상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알려고 하는 욕구와 함께 온다. 이게 오류라면, 말을 잘못해서 야기되는 오류가 아니라 말을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야기될 수밖에 없는 오류고, 생각을 하지 않거나 생각을 잘못해서 오는 오류가 아니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면할 수 없는 오류다. 지식이 없음이 아니라 지식으로 인해 야기되는 오류다. 그때그때 발생하는 우연적인 오류가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인 필연적 오류다. (칸트의 용어를 확장해서 사용한다면 ‘선험적 가상’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선험적 가상이란 이성의 잘못된 사용이 아니라 이성을 사용해야 하기에 피할 수 없는 가상을 뜻한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필요와 편의를 위해 치러야 하는 필연적 대가다. 일체유위법이 “꿈같고 환영 같다(如夢幻)”(<금강경>)할 때 ‘환’이란 개인의 주관적 착각이 아니라 모두의 이 필연적 착각을 뜻한다고 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무지란 동일성을 찾는 빛 속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무지는 자신이 세상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음을 모른다. 반대로 그것을 세상을 잘 보고 있다는, 실상을 잘 알고 있다는 오인을 동반하는 것이란 점에서 이중의 무지다. 이것이 ‘전도망상(顚倒妄想)’을 야기하는 이유고, 그것이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고 있는 이유다. 그래서 이 무지는 벗어나기 힘들다. 자신이 무지한 줄 알면 무지를 벗어나려 애쓰겠지만, 모르기에, 아니 세상을 잘 알고 있다고 믿기에 벗어날 생각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가 바로 옆에 있어도 부처인 줄 모르고, 부처가 노파심을 갖고 설법을 해도 귀 기울일 줄 모른다. 떨어지는 잎새를 가리키며 실상을 보라고 하면, 그 지는 잎새에서 실상을 보는 게 아니라, 잎새 뒤에 있는, 이파리가 모두 떨어져도 그대로, 동일하게 남아 있는 나무를 보고, 그것이 바로 본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렇게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것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고, 차이들의 바다 속에서 동일성이란 고기를 잡는 것이 그처럼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하고 불가피하다면, 그것을 굳이 ‘필연적’이란 말까지 붙여서 ‘무지’라고 비난할 건 없지 않은가? 반대로 그것이 바로 세상을 사는 지혜라고, 무상한 카오스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인간의 지혜라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무상함과 차이가 일차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보는 것만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카오스가 일차적이라고 해서 카오스를 지혜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럴 수도 있다. 사실 ‘코스모스’나 ‘질서’, ‘조화’란 개념은 그런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화려한 성공과 영화의 순간이 좋다고 그것을 동일하게 유지하려고 하지만, 그게 실상이 아니기에 지나가 버리는 것에 ‘허무’와 고통을 느끼는 것 아닌가? 옆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과의 사랑이 동일하다고, 아니 영원히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기에, 그 사람이 변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이 식어가는 것에 고통스러워하지 않는가? 뉴스나 영화에서 종종 보듯이, 그 사람이 영원히 떠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도록 하기 위해 변심의 조짐을 보이는 연인을 스토킹하며 협박하거나 심지어 죽여버리는 것도 무상의 실상 대신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애착과 집착 때문 아닌가? 사랑하는 이가 내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에서 고통을 느끼고, 내 뜻대로 행동하게 하기 위해 고통을 가하는 일은, 수많은 이들이 경험하는 일 아닌가?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solaris0@daum.net

[1282호 / 2015년 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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