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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양산 통도사 성담 스님 진영

기자명 신대현

당대 최고 문장가가 쓴 찬문이 압권…19세기 고승 진영의 대표작

▲ 양산 통도사에 소장된 성담 스님 진영. 섬세하면서도 전통적 기법에 충실해 회화적 가치가 높다.

미술이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적 표현이라는 정의는 르네상스 이후에 나타난 인식이다. 미술이 발생한 배경을 기능 면에서 이해한다면 사실 ‘알림’과 ‘기억’이라는 목적이 더 컸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자보다는 그림이 훨씬 대중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전통 기법 따르는 섬세한 묘사
그림 자체로 회화적 가치 출중

김정희·권돈인이 지은 찬문엔
학문·예술서 이룬 뛰어난 경지
고스란히 드러나 깊은 감흥 전해

선사의 가르침·모습 담아내는
진영의 본래 목적에 충실히 부합

미술의 여러 장르 중에서 이런 기능이 가장 잘 남아 있는 분야가 바로 초상화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진영(眞影)이라고 부르는데, 선사(先師)의 모습을 남겨 그의 가르침을 알리고 기억하는데 이만큼 적합한 게 없었다.

성담의전(聖潭倚琠, ?~1854)의 진영에는 이 알림과 기억이라는 의도가 아주 잘 드러나 있다. 의전 스님에 대한 자료는 그다지 많지 않으나, ‘동사열전’에 간략한 행장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스님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불경뿐만 아니라 유교와 도교의 경전까지 두루 읽었다. 영호남의 이름난 강백과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얻어 수행과 학업에 정진한 결과 그의 명성은 곧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사명대사의 법맥을 이어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 초의의순(草衣意恂, 1786~1866)과 같은 당대 고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승이 되었다고 한다. ‘동사열전’ 외에 진영의 찬문을 통해 문장도 뛰어나 글로써 문인들을 감동시킨 통도사의 대강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내로라하는 유학자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에서도 당대의 최고 명사였던 김정희와 권돈인과는 특히 절친한 사이였다. 그들과의 인연과 교유의 흔적이 이 진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림을 보면 구도가 아주 효과적으로 구성된 게 눈에 띈다. 의자에 앉은 주인공을 중앙에 배치해 한눈에 척 들어오게 했는데, 의자가 그다지 높지 않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편하다. 주인공 앞에는 자그마한 서안(書案)이 있고 그 위에 경서 네 권이 올려져 있다. ‘범망경’, ‘유마경’, ‘은중경’ 세 권이 나란히 놓였고 다른 한 권은 지금 막 읽고 있는 것처럼 펼쳐져 있다. 펼쳐진 면에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이라는 소제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대방광불화엄경’이 틀림없을 것이다. 오른손은 서안 위에 두고, 왼손으로 주장자를 잡아 왼쪽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 놓은 것도 일반적인 도상에서 흔히 보이는 그대로다. 다만 주장자와 서안 바닥의 장식무늬가 똑같은 것은 다소 이색적이다. 이 그림이 전통 도상을 충실히 따랐다는 증거는 손에서도 확인된다. 오른손의 새끼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또 나머지 네 손가락은 안으로 주먹 쥐듯이 굽혀 있는 데 비해 바깥을 향하여 펼쳐져 있는 것은 다른 진영에서도 거의 예외 없이 보이는 특징이다. 대개 이러한 손 모양은 염주를 잡을 때의 동작이다. 또 얼굴의 표현이 자연스럽고 의자 옆면의 학 장식, 그리고 가사 자락의 섬세한 표현 등에서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녹록치 않은 필력을 읽을 수 있으니 19세기 중반 고승 진영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하다.

진영 한 켠에 적어 넣은 찬문(讚文)은 주인공의 생애를 알리고 또 후세에 기억되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형식은 헌시(獻詩) 또는 짧은 기문(記文) 형태를 띠며, 그 중에는 문학적 아취가 높은 글도 상당수 있다. 찬문이 있음으로 해서 진영의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 의전 스님 진영의 찬문은 그 10년 전 영의정을 지냈던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이 지었다. 그는 1813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로에 첫발을 내딛었고 이조 판서와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낸 뒤 1845년 마침내 가장 높은 자리인 영의정까지 올랐던 명망가였다. 막역한 친구였던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그에 대해서 ‘뜻과 생각이 뛰어나다’라고 평한 바 있다. 학문뿐 아니라 예술에도 높은 경지를 이루었는데 예서 글씨에 관해서는 ‘동국(東國)에 일찍이 없었던 신합(神合)의 경지’라는 극찬을 받았고,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세한도(歲寒圖)’라는 멋진 작품을 남겼다. ‘세한도’라고 하면 보통 김정희의 그것이 우리에게 훨씬 익숙하지만 사실 그의 작품도 만만치 않은 수준을 보인다. 이처럼 최고 지성 중 한 명이었던 권돈인은 성담 스님의 진영에 어떤 찬문을 남겼을까?

“성담 스님은 나와 세속의 경지에서 함께 노닐었다. 잔잔한 연못처럼 참선에 몰두하는가 하면, 부처님의 뜻을 잘 좇아 내전(內典, 불경)도 명철히 익혔다. 시인들과 잘 어울렸고 나는 불가에 의탁하여 스님과 우의를 쌓았다. 작년 내가 있는 여차석실(如此石室)을 찾아와 며칠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올 봄에 다시 만날 것을 서로 약속하였건만 지금 그 스승인 정허(靜虛)로부터 작년 12월3일에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입적하기 며칠 전에 영축산 고개가 사흘 동안 울었고 또 금강계단에는 닷새 동안 방광이 있었다고 한다. 여러 학인 스님들은 곧바로 진영을 그려 스님의 도를 전하려 하였고, 이에 나한테 글을 부탁한 것이다. 나 역시 늙었다. 스스로 이제 생사의 번뇌와 함께 모든 허물도 다하였다고 생각하였지만,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 보니 새삼 절절히 슬픈 마음이 인다 (聖潭師 從余於丹乙廣陵之間 師凝靜淵黙 深契佛指 明習內典 出入詩家 余託以空門友誼 去年委訪於如此石室 留數日泊 約以今春又相逢 今其師靜處書來 去年臘月三日 聖潭示寂 前幾日 寺之山靈鷲三日鳴 戒壇又五日放光 諸學人 卽寫其影 以傳其道 屬余一言 余且老 自請死生煩惱諸漏已盡 特亦有切悲者存).”

이 찬문은 그림 왼쪽 위 직사각형으로 마련된 구획 안에 달필의 글씨체로 적혀 있다. 유불(儒彿)의 차이를 두지 않고 도반처럼 여겼던 의전 스님을 보내면서 옛일을 회상했는데, 의전 스님이 선과 교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시도 잘 지어 시인들과 교분을 쌓았던 상황이 잘 나와 있다. 또 불교의 가르침대로 공부해 생사와 번뇌를 벗어났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친한 벗을 잃자 가눌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는 표현에서는 작가의 절절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위의 글에 이어서 곧바로 헌시가 나온다. 그 중 ‘금강계단이 방광하고 영축산이 울어댄 것은 바로 스님의 열반 때였네. 못은 텅 비고 물은 잔잔해 항상 고요하나 스님은 여기에 삼매를 내보이셨구나(潭空水定了常寂 師如是又出三昧).’ 하는 구절에는 고승을 잃은 통도사 대중들의 비통함이 스며있다.

특히 이 그림은 권돈인이 글씨까지 직접 썼다는 점이 흥미롭다. 진영에 적힌 찬문은 지은이와 글씨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찬문 맨 끝에 그의 낙관도 보이는데 이런 경우는 다른 진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얼마나 의전 스님과 친했고 또 그의 떠남을 아쉬워했는지 알 만하다. 성담 스님이 태어난 해는 정확히 모르지만, 입적한 연도로 볼 때 권돈인과 비슷한 연배였을 것 같다. 권돈인은 나아가 당대의 명사였던 김정희에게도 성담을 소개했다. 추사가 성담을 만나 느낀 인상이 그가 쓴 ‘권이재 돈인에게 주는 글’에 나온다.

“일전에 영남의 승려 성담이 그대의 소개를 받고 나를 찾아와 무료하고 우울한 일상에서 다행히 며칠을 그와 함께 보냈소. 그대의 주위에서 온 사람이라 그런지 확실히 남보다 뛰어난 데가 있더군요.”

▲ 추사 김정희의 찬문 ‘성담상게’. 최고 문장가다운 득의의 표현으로 진영에 나타난 고승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권돈인과 김정희는 세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일생의 지기로 지냈고 한편으론 서로의 인품과 학문을 존경했던 사이였다. 취미도 비슷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중국의 서화를 얻게 되면 함께 감상하고 연구했다. 김정희는 권돈인의 소개를 받고 자기를 찾아온 성담을 보자마자 그의 됨됨이에 반했고 두 사람은 곧바로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 이 인연은 오래도록 이어졌으니, 나중에 의전 스님이 입적하자 그가 헌시를 쓴 것도 이런 배경이 있어서였다. 이 글은 현판(懸板)으로만 전해지는데, 제목이 ‘성담상게(聖潭像偈)’, 곧 ‘성담 스님의 상(진영)에 대한 게송’으로, 진영의 찬문인 게 확실하다. 아마도 의전 스님의 또 다른 진영에 썼던 찬문인 모양이다.

“얼굴엔 달이 가득하고 머리엔 꽃이 피었네. 아아! 성담 스님이 바로 이 그림 속에 있으니 이로써 내 슬픈 마음 달래리. 대비의 모습이 바로 이러할지니, 문자와 반야가 서로 당겨 빛을 뿜는구나!(面門月滿 頂輪花現 噫嘻 聖師 宛其在茲 可以塞 老淸之悲歟 是大悲相歟 文字般若 互攝發光)”

김정희는 이 진영을 보면서 스님을 잃은 슬픔과 아쉬움을 달랜다고 한데 이어, 스님이야말로 바로 관음보살이라고 했다. ‘문자’와 ‘반야’란 각각 교(敎)와 선(禪)을 상징하여 의전 스님이 교학에 능통했음을 말한 것이다. 교와 선을 함께 닦음으로써 환한 달빛이 활짝 핀 꽃을 비추듯이 절묘하게 조화된 경지를 묘사했다. 과연 김정희다운 득의의 표현이고, 단순한 문학적 수사(修辭)를 넘어서 진영에 나타난 고승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김정희의 문장이 최고로 꼽히는 까닭을 새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통도사에 있는 이 진영은 제작연도가 의전 스님이 입적한 다음 해인 1855년으로 뚜렷한 데다 당대 최고 명사들의 문적(文蹟)까지 담고 있어 가치가 아주 높다. 회화라는 측면에서도 전통 형식을 잘 계승하여 19세기 중반 진영의 한 전범으로 두어도 좋을 듯하다. 또 진영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핵심인 찬문도 갖췄다. 찬문을 ‘주인공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고인에 대한 회고를 담은 글’이라고 정의할 때 의전 스님 진영에 나오는 그것은 그에 딱 들어맞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를 지은 권돈인은 찬문의 한 전범을 보여주려는 듯이 말끔한 문장으로 잔잔한 감흥을 잘 담아냈다. 지금까지 진영을 연구하면서 찬문은 퍽 소홀하게 다뤘는데, 이 진영을 보면 찬문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새삼 알 수 있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1282호 / 2015년 2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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