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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업과 실업

극지연구소 김예동 소장이 ‘남극을 열다 (지식노마드, 2015)’를 보내왔다. 이 책은 그가 저술한 일본 남극탐험의 개척자인 시라세 노부의 전기이다. 백색의 제 7대륙이라고 부르는 남극은 지구표면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륙의 98%가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는 황량한 땅이다. 남극은 연구를 위한 몇몇 나라의 과학기지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대부분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미지의 땅으로 남아있다.

남극은 18세기에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최초로 발견했으나 남극탐험의 영웅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들은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과 영국의 팰컨 스콧이다. 이들은 20세기 초 남극점 정복을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였으며 아문센이 1911년 12월 14일 먼저 남극점에 도달했었다. 아문센은 남극점에 노르웨이 국기를 게양하고 고국에 보내는 편지를 텐트 안에 남겼다. 만일 자신이 귀환하지 못할 경우 뒤따라 오는 스콧 탐험대가 그 편지를 갖고 귀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아문센은 무사히 귀환하였으나 스콧은 1912년 1월 17일 남극점에 도달한 후 귀환 중 불행하게도 조난을 당해 전 대원과 함께 사망하였다. 1912년 11월에 구조대가 스콧의 텐트를 발견했을 때 찾은 그의 1912년 3월 29일자 마지막 일기에는 ‘신이여, 우리 가족을 돌보아 주소서!’라고 적혀있었다.

아문센과 스콧은 유럽열강의 제국주의적 해외 팽창에 힘입어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남극탐험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시라세 노부는 일본 정부가 그의 남극탐험 계획에 대한 재정지원을 거절하자 대중강연과 신문, 잡지를 통하여 범국민적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약 12만 엔(현재 액수로 약 14억 원)을 모아 남극탐험에 나섰다. 이 중 4만 엔은 자신의 빚으로 충당하였다. 시라세 노부는 1861년 일본 도호쿠 지방 아키다 현 니카오 시 정련사(淨蓮寺) 주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당나라 현장 스님의 인도 여행기 ‘대당서역기’를 읽고 크게 감동하여 대를 이어 승려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탐험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어렵사리 모은 국민의 성금으로 27명의 시라세 탐험대는 범선을 개조한 카이난마루(開南丸)호를 타고 1910년 11월 29일 토쿄 만을 출발하였다. 그로부터 망망한 태평양을 건너 1911년 3월 9일 마침내 남극에 도달하였다. 시라세 탐험대는 비록 남극점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갖은 악조건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남극탐험을 수행하고 귀중한 과학 자료를 수집하여 1912년 6월 20일 전원 무사히 토쿄에 돌아왔다.

시라세는 남극탐험에 진 빚을 갚느라 평생 어렵게 살았으며 1946년에 아이치 현의 한 허름한 셋방에서 85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거인으로 추앙받으며 1981년에는 시라세가 태어난 절에 동상이 세워졌고 1990년에는 그의 고향에 시라세 남극탐험대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현재 일본 남극탐험용 쇄빙선의 이름은 시라세 호이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정치가 허업이라고 말했다. 일신의 영달만을 도모하는 모든 정치적 행위가 허무하게 끝난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그렇다면 허망하지 않은 실업은 무엇일까?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빛나는 인간의 행위일 것이다. 우리나라 극지연구소 소장이 국민의 혐일(嫌日)감정의 부담을 안고 시라세의 전기를 썼다. 이것은 시라세의 일생이 결코 허업이 아니라 실업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생을 허업이냐 아니면 실업으로 마감하느냐는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당장 이익이 없다고 남들이 하지 않는 일, 그러나 인류의 존엄과 지식 그리고 복지를 확대하는 일이라면 서슴없이 하는 것은 실업으로 남을 것이다. 굳이 종교의 이름을 빌 필요가 없다. 뜻만 있다면 태평양을 건너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 수많은 전인미답의 남극대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화 서울대 명예교수 kleepl@naver.com


[1284호 / 2015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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