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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심사정, ‘홍련도’

기자명 조정육

“내가 번역한 경론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 후에도 혀만은 타지 않으리라”

▲ 심사정, ‘홍련도’, 비단에 색, 29.6×20.7cm, 국립중앙박물관.

‘아무리 왕명이 지엄하다한들 파계는 파계다. 나는 이미 계행을 어겼으니 수행자라고 할 수 없다.’

파계를 강요당하면서도
역경 매진했던 구마라집
중국의 4대 역경승 평가

역모집안서 태어났지만
화업에 정진했던 심사정
눈부신 그림세계 일궈내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승방을 나왔다. 어찌 인생이 이다지도 힘들까. 구마라집은 심한 좌절감을 느꼈다. 이런 일이 벌써 두 번째였다. 첫 번째 사건은 여광(呂光)에 의해서였다. 383년, 전진(前秦)왕 부견(苻堅)은 여광을 보내 구자국(龜玆國)과 오기국(烏耆國)을 정벌하도록 했다. 목적은 오직 하나. 구마라집을 얻기 위해서였다. 부견은 4년 전, 379년에도 도안(道安)을 얻으려 양양(襄陽)을 공격했다. 구자국을 정벌하려는 명분은 ‘도의를 품고 있는 사람 때문’이라고 했다. 도의를 품고 있는 사람이 구마라집이었다. 당시 구마라집의 명성은 서역 여러 나라에 퍼져 있었다. 양양에 도안이 있다면 구자국에는 구마라집이 있다는 소문이 부견의 귀에까지 들렸다. 이미 도안을 얻어 천하에 위세를 떨친 부견은 구마라집까지 얻고 싶은 욕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결국 부견은 구마라집을 얻기 위해 구자국을 공격했다. 부견은 여광을 전별하면서 구자국을 정복하거든 ‘곧바로 역말을 급히 달려 구마라집을 후송하라’고 명령했다.

구자국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안 구마라집은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구마라집을 사로잡은 여광은 실망했다. 저 사람이 한 나라와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작은 그릇은 큰 그릇을 담지 못하는 법. 여광은 구마라집의 지혜와 국량을 측량할 정도로 그릇이 크지 못했다. 여광은 구마라집을 평범한 사람이라 여겨 구자국의 왕녀를 아내로 삼게 했다. 수행자를 수행자로 여기지 않는 모욕적인 처사였다. 구마라집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 모습을 본 여광이 비아냥거리듯 한마디 던졌다.

“도사의 지조는 당신 아버지보다 나을 것이 없지 않는가? 어찌하여 한사코 사양하는 것인가?”

구마라집의 아버지 구마염(鳩摩炎)은 천축 사람으로 대대로 재상을 지낸 명문집안 출신이었다. 구마염은 재상의 지위를 사양하고 출가하여 동쪽으로 향했다. 구마염의 명성을 들은 구자국왕은 그를 영접하여 국사(國師)로 삼았는데 그의 총명함을 욕심내어 자신의 누이동생과 강제로 혼인시켰다. 구마라집이 태중에 있을 때 왕녀는 저절로 천축어에 능통할 정도로 깨달음과 총명함이 배가 되는 것을 느꼈다. 이런 능력은 구마라집이 출생한 후 바로 사라졌다. 얼마 후 구마라집의 모친은 출가하기를 원했다. 출가사문을 파계시켜 혼인하고서 이번에는 자신이 출가하겠다는 것이었다. 소설로도 꾸며내기 힘든 소설 같은 현실이었다. 구마염의 반대에 부딪친 왕녀는 결국 다시 아들 하나를 더 낳은 후 출가를 허락받았다. 구마라집도 어머니를 따라 7세에 출가했다.

구마라집은 스승에게 경을 배울 때 하루에 천 게송, 즉 3만2천 단어를 암송했다. 스승이 경의 뜻을 전수해주면 즉시 심원한 이치를 통달하였다. 9살 때는 어머니를 따라 계빈국(罽賓國)으로 갔다. 왕족 출신이라 고국에서는 특별대우를 받는 것이 아들의 수행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염려해서였다. 계빈국은 소승불교가 융성했다. 구마라집은 계빈국에서 반두달다(盤頭達多)를 만나 3년 동안 소승교학을 섭렵했다. 반두달다는 매번 구마라집의 재주와 지혜가 특별히 뛰어남을 알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구마라집의 명성은 오래지 않아 계빈국 왕의 귀에까지 들렸다. 왕은 구마라집을 궁중으로 초청하여 외도 논사들과 논박하게 했다. 구마라집은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불손하게 대한 외도들을 단번에 꺾어버렸다. 그의 명성은 더욱 유명해졌다. 여러 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주겠다고 그를 초빙했지만 세속적인 명예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12살 때 어머니를 따라 다시 구자국으로 돌아온 뒤 사륵국(沙勒國)으로 향했다. 사륵국에서는 베다와 음양, 천문과 논리학 등 불교 이외의 학문에 대해서 배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스승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를 만나 대승불교에 입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스승에게서 ‘제법이 공(空)하고 무상하다’는 설법을 듣고 깊이 궁구하여 대승의 밝은 이치를 깨달았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내가 옛날에 소승(小乘)을 배운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황금을 알지 못한 채 놋쇠를 가지고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긴 것과 같다’고 탄식했다. 대승경전을 섭렵한 구마라집은 옛스승 반두달다를 초청해 모든 존재가 공하다는 공사상을 설명했다.

“대승은 심오하고도 사념이 없어 존재하는 모든 법은 공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승은 한쪽으로 치우치고 분별하여 여러 가지 잃어버리는 결함이 많습니다.”

한 달 남짓 계속된 문답을 통해 드디어 대승의 위대함을 알게 된 반두달다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스승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을 도리어 제자가 그 뜻을 열어 준다고 하는 것을 네가 증험하는구나. 이제부터 화상은 나의 대승의 스승이고, 나는 화상의 소승의 스승이오.”

이를 계기로 구마라집의 명성은 서역은 물론 중국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부견이 여광을 보내 구자국을 치게 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여광이 구마라집을 파계시키며 아버지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지적할만큼 그의 개인사는 많은 사람들의 화젯거리였다. 여광에게 구마라집은 파계한 아버지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말을 마친 여광은 구마라집에게 독한 술을 마시게 하고 여자와 함께 밀실에 가둬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후진(後秦)왕 요흥(姚興)에 의해서였다. 요흥은 전진왕 부견을 살해하고 후진을 세운 장군 요장(姚萇)의 아들이었다. 부견은 여광을 보내 구자국을 멸망시키면서까지 구마라집을 얻고자 했으나 요장에게 살해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구자국을 정벌한 여광은 구마라집과 함께 돌아오던 길에 부견의 살해소식을 접했다. 그는 부견을 대신해 후량(後凉)이라는 나라를 세워 스스로 왕이 되었다. 구마라집도 어쩔 수 없이 양주(涼州)의 여광 곁에서 16,7년 동안을 머물렀다. 그 기간 동안 구마라집은 비록 불법을 펼칠 수는 없었지만 경전번역에 필요한 중국어를 습득하고 익힐 수 있었다.

한편 요흥은 여광에게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광은 구마라집의 지혜가 적국의 왕에게 이용될 것이 두려워 그 청을 거절했다. 마침내 여광이 죽고 그의 사촌이 즉위한 혼란기를 틈타 요흥은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모셔올 수 있었다. 401년 12월 20일이었다. 구마라집이 요흥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요흥은 불교에 무관심했던 여광과 달리 신심이 두터웠고 역경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요흥은 구마라집을 국사의 예로 지극하게 맞이했다.

구마라집은 요흥의 배려로 소요원(逍遙園)의 서명각(西明閣)과 대사(大寺)에 머물면서 역경에 종사할 수 있었다. 구마라집에 의해 비로소 역경사업이 개인적 차원에서 벗어나 국가적 차원으로 체계화되었다. 그는 『반야경』『유마경』『법화경』등 대승경전을 재번역했으며 『중론』『십이문론』『백론』『대지도론』 등 반야사상 계통의 논서들과 대승론서를 역출했다. 그는 역경장을 강설장으로 이용했다. 그의 문하에 기라성 같은 문도가 모여들었다. 도생(道生), 도융(道融), 승조(僧肇), 승예(僧叡)를 비롯한 2천여명의 뛰어난 제자들이 그의 역경을 도왔다. 제자들은 스승의 지도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잘못 번역된 경전의 뜻과 오류를 수정하고 바로잡았다. 제자들은 구마라집의 강의 내용을 토대로 경전의 주석서를 집필했다. 여산의 혜원법사는 편지를 통해 구마라집에게 불교에 관한 의문점을 질문했다.

이런 구마라집을 곁에서 지켜본 요흥은 한없이 그에게 매료되었다. 타고난 총명함은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종일토록 사람들을 가르치고 지도함에 한 치의 게으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인자하고 후덕한 성품은 보는 사람마다 저절로 고개를 수그리게 했다. 어디 그뿐인가. 구마라집에 의해 경전 번역에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그가 번역한 경전의 문체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비유 또한 적절했다. 정확한 표현과 수려한 문장은 중국인들에게 번역 경전만으로도 충분히 불교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구마라집은 진제(眞諦), 현장(玄奘), 불공(不空)과 함께 중국의 4대 역경승(譯經僧)으로 평가받는다. 네 사람 중 두 사람만 꼽는다면 당연히 구마라집과 현장을 들 수 있다. 구마라집의 번역은 구역(舊譯)이라 부른 반면 현장의 번역은 신역(新譯)이라 부른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구마라집의 번역 용어는 현장의 것보다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외국인인 구마라집이 이렇게 정확한 중국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타고난 천재성과 자라온 환경 그리고 부단한 노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과 다른 천축의 풍속과 문장 체계를 중국어로 바꿀 때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지 않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대의를 잘 살리더라도 문채를 잃으면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처럼 맛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남에게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마라집은 번역이 제2의 창조라는 진리를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불법홍포를 향한 그의 열정은 단지 번역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경전에 대한 논서를 저술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 땅에서는 논서를 지어봤자 아직까지 이해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음을 알고 그만두었다. 다만 요흥을 위해서 『실상론(實相論)』 두 권과 『유마경(維摩經)』에 주석을 달았을 뿐이다. 이 논서들은 더 이상 첨가하거나 깎아낼 부분이 없을 정도로 정확했다. 문장의 비유는 완곡하고 간명했으며 현묘하고 심오했다. 요흥의 감동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빼어남도 흠이 되는 것일까. 요흥은 다음과 같은 말로 구마라집을 파계시켰다.

“대사의 총명함과 뛰어난 깨달음은 천하에 둘도 없습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 불법의 종자에 후사가 없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그 말과 함께 기녀 열 명을 억지로 받아들이게 했다. 두 번째 파계였다. 설령 왕의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한 일이라 해도 모든 것은 본인의 책임이었다. 승방을 나온 구마라집은 다시는 승방에 머물지 않고 따로 관사를 지어 살았다. 그날 이후 강설할 때면 매양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비유하면 연꽃이 더러운 진흙 속에서 피는 것과 같다. 오직 연꽃만을 취하고 더러운 진흙은 취하지 말라.”

심사정(沈師正,1707~1769)은 산수(山水)와 영모(翎毛)도 잘 그렸지만 화훼(花卉), 초충(草蟲)은 더 잘 그렸다. 「홍련도(紅蓮圖)」는 화조화에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는 강세황(姜世晃)의 평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물총새가 연꽃을 향해 날아든다. 연꽃의 붉은 색과 물총새의 가슴색이 호응을 이룬다. 연꽃은 만개하다 못해 떨어지기 직전이다. 잎사귀도 누런색으로 변했다.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들어서고 있다. 연꽃의 계절이 끝나가고 갈대의 계절이 시작되지만 수초사이에서 꽃대를 올린 연꽃은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색을 잃지 않는다. 심사정은 명문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조부가 영조시해사건에 가담함으로써 졸지에 역모 집안의 죄인이 되었다. 그는 몰락한 양반 집안의 후예가 되어 평생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화업(畵業)에 정진하다 일생을 마쳤다. 그가 발 담고 있는 현실은 진흙 그 자체였지만 그림이라는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가 이룩한 그림세계는 시들어가면서도 물총새의 눈길을 빼앗을 정도로 아름다운 연꽃과 같았다.

구마라집도 두 번의 파계라는 진흙 속에서 고귀한 연꽃을 피워냈다. 그는 자신이 발 뿌리를 더럽힌 진흙을 탓하지 않고 오직 연꽃을 피워내는 데만 전념했다. 그래서 인생을 마무리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다.

“법상(法相)의 만나고 헤어짐으로 인해 아직 내 뜻을 다 펴지 못하였는데 이제 세상을 뒤로 하게 되었다. 나는 암둔한 사람이었는데도 잘못하여 역경을 맡게 되었다. 모두 3백여 권의 경과 논을 번역하였는데 오직 『십송률』 한 부만은 미처 번잡한 것을 산삭(刪削:필요 없는 글자나 구절을 지워 버림)하지 못하였다. 『십송률』의 근본 뜻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어긋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번역된 모든 경전들이 후세에 널리 퍼지기를 발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서 성실한 맹서를 발하노니, 만약 내가 전역(傳譯)한 것에 잘못됨이 없다면 나를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구마라집은 70세를 일기로 편안히 눈을 감았다. 409년 8월 20일이었다. 거장의 유해는 곧바로 외국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였는데 장작이 다 타고 시신이 다 타 없어졌건만 그의 혀만은 재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 사람의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84호 / 2015년 3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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