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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봉한, ‘매화도’

기자명 조정육

“윤회의 쇠사슬에 묶여 고통 받는 누구라도 평등하게 구제하리라”

▲ 고봉한, ‘매화도’, 청(淸), 종이에 색, 21.6×32.4cm, 일본개인소장.

밤낮 없는 수행정진으로
법화삼매 일군 천태지의
점령군 왕인 양광에게도

어떻게 해야 할까. 중생교화를 포기해야 할까. 지의(智顗, 538~597)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나라가 망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법문을 펼칠 수는 없는 법. 그렇다고 이대로 넋 놓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전란의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지의가 살고 있던 진(陳)나라가 수(隋, 581~618) 문제(文帝)의 수중에 떨어진 것은 589년의 일이었다. 문제는 후에 수양제(隋煬帝)가 되는 둘째 아들 진왕(晉王) 양광(楊廣, 569~618)을 시켜 진나라를 접수했다.

지의는 양나라의 장군 집안에서 태어났다. 양나라가 망하고 양친까지 모두 세상을 떠나자 출가사문의 길을 택했다. 18세에 상주(湘州) 과원사(果願寺)에서 계를 받고 경전 공부에 매진하다 23세가 되던 560년에 대소산(大蘇山)에서 운명적인 스승 혜사(慧思, 514~577)선사를 만났다. 오랫동안 제자를 기다렸던 혜사는 지의를 보자마자 기쁨에 겨워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영취산에서 함께 법화경의 설법을 들었는데 숙세의 인연에 따라 지금 다시 이 세상에 왔구나.”

지의는 혜사의 가르침에 따라 7년 동안 밤낮으로 법화삼매의 행법을 수행했다. 법화삼매는 경전을 독송하는 유상행(有相行)과 선정을 닦는 무상행(無相行)을 더한 수행으로 말법 세상에 태어난 사람에게 가장 알맞은 행법이었다. 지의는 법화경 28품을 모두 읽고 외우며 수행에 전념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법화경 약왕품을 독송하다 홀연 심신이 확 트이면서 깊은 삼매에 들었다. 삼매의 힘으로 총지가 발현되니 마치 높이 뜬 해가 깊은 계곡을 비추듯 법화경의 세계가 낱낱이 보였다. 이것이 ‘대소산의 개오’라고 불리는 법화삼매의 체험이었다. 그의 생애에서 처음 맛보는 선정이었다. 제자의 학문이 열매가 맺은 것을 안 혜사는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시간이 흘러 혜사는 형산으로 떠나게 되었다. 떠나기 전에 지의에게는 ‘진나라와 깊은 인연이 있으니 도시로 나가면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568년 6월22일, 지의가 30세 되던 해였다.

지의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건강(健康)으로 향했다. 진의 수도 건강은 불교가 만개한 백가쟁명의 장소였다. 지의가 건강에서 처음 만난 상대는 법제(法濟)선사였다. 60을 넘긴 법제는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해 젊은 지의에게 무례하게 대했다. 그러나 지의와의 문답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는 공손히 무릎을 꿇고 스승의 예를 갖췄다. 법제선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지의는 건강에서 유명해졌다. 경전의 강학만을 중요시하던 불교적 풍토에서 경전과 수선(修禪)을 겸비한 지의의 실천적인 가르침은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진의 황제 선제(宣帝)를 비롯한 고관대작들이 그를 찾아와 법문을 청했다. 지의는 와관사에서 8년 동안 설법을 펼쳤다. 자신의 역할이 충분하다고 느낀 지의는 천태산으로 떠날 계획을 세웠다. 풍족한 도시에서의 생활이 구도심을 흐려지게 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없지 않았다. 때마침 북주(北周)의 폐불(廢佛)소식이 전해졌다. 지의는 북주 폐불을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고자 575년 9월에 천태산으로 입산했다.

천태산에 자리 잡은 지의는 매일같이 수행정진에 매진했다. 그런 어느 날 화정봉(華頂峰) 최고봉에 올라 참선을 하고 있을 때 홀연 광풍이 불고 천둥이 치더니 온갖 형상의 귀신 떼가 나타났다. 잠시 후에는 부모님과 스승의 형체가 나타나 슬픈 얼굴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지의는 외부적인 경계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제법의 실상을 관했다. 그러자 두 가지 경계가 모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뜻으로써 얻어야 하며 글을 가지고는 나타낼 수 없는’ 깨달음을 체득했다. ‘대소산의 개오’ 이후 두 번째로 얻는 ‘화정봉의 개오’였다.

수많은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 천태산으로 향했다. 선제는 자주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고 수선사(修禪寺)를 창건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선제의 뒤를 이은 후주(後主)도 지의를 모시는 데 극진했다. 585년 3월에 지의는 후주의 거듭된 요청으로 금릉으로 향했다. 지의는 광택사에 머물렀다. 조정의 정전인 태극전에서 호국을 위한 ‘대지도론’을 설법하고 인왕반야경을 설법하는 인왕회(仁王會)를 개최했다. 586년 4월에 후주는 양무제가 그랬던 것처럼 사신공양(捨身供養)을 행했다. 후주의 황후도 지의에게 귀의해 혜해(海慧)보살이라는 호를 받았고 황태자도 궁전에서 천승법회(千僧法會)를 열고 보살계를 받았다. 황실에서는 매년 광택사로 행차하여 인왕경 강의를 들으며 봉불근행(奉佛勤行)에 전념했다.

진나라의 평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나날이 세력을 키우던 수나라가 마지막으로 진나라를 쓰러뜨림으로써 평온했던 일상은 거기서 끝이 났다. 진왕 양광이 북제 토벌군 총사령관이 되어 진나라를 접수했다. 통일이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전란의 상처는 컸다. 300여 개가 넘는 사찰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사원의 승려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나마 온전한 사원은 병영과 관청으로 징발되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지의가 전란을 피해서 온 여산(廬山)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청정도량을 짓밟는 행위를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는 붓을 들어 진왕 양광에게 청원서를 썼다. 평소 지의를 존경하고 있던 진왕 양광은 청원서를 읽고 즉시 지의의 뜻대로 행하였다. 그 덕분에 여산은 전란의 상처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591년 11월, 진왕 양광은 양주 총관부에서 천승재(千僧齋)를 개최하고 지의를 계사(戒師)로 보살계를 받았다. 지의는 양광에게 ‘총지보살(摠持菩薩)’이라는 법명을 주었고 양광은 지의에게 ‘지자대사(智者大師)’라는 호칭을 올렸다. 젊은 왕은 23세였고 지자대사는 54세였다. 양광이 지지대사에게 귀의한 것은 아버지처럼 불심이 깊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제의 둘째 아들로 황제가 될 수 없는 몸이었지만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 문제가 한 해 전에 지의에게 귀의하는 칙서를 보낸 사실도, 지의가 강남 불교계의 1인자라는 현실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진왕 양광의 야망은 그렇다쳐도 지자대사는 무슨 목적으로 점령군의 왕을 받아들였을까. 그것은 오직 윤회의 쇠사슬에 묶여 고통 받는 중생을 평등하게 구제하겠다는 일념에서였다. 지자대사에게 후주나 진왕 양광이나 중생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권력에 눈이 멀어 끝없이 피를 흘리는 젊은 왕이야말로 지자대사의 가르침이 더 필요한 중생이었다. 진왕 양광은 지자대사의 제자를 자처하며 법에 대해 물었다. 지자대사는 제자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지자대사에게 접근했던 진왕 양광은 오래지 않아 진심으로 스승을 섬기게 되었다.

과연 올까. 의심이 짙어질 무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뛰다시피 달려 나가 문을 열어보니 봄빛처럼 화사한 그녀. 붉은 입술에 옥 같은 보조개를 한 그녀가 연노랑 스카프를 두르고 서 있다. 이슬에 젖은 그녀의 머리 위로 아침 안개가 어지럽게 춤을 춘다. 안개는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먼 곳까지 향기를 흩뿌린다. 이른 새벽에 일어난 한(漢)나라 궁녀가 수정주렴 밖에서 단장을 한다한들 이만큼 어여쁠까. 고봉한(高鳳翰,1683~1748)이 그린 ‘매화도(梅花圖)’는 겨울 추위에 움츠러든 영혼에게 입김을 불어넣는 부활이다. 환영이자 신기루다. 붉은색과 옥색과 황금색으로 피어난 감탄이다.

고봉한은 청(淸)대의 문인화가로 관리 생활을 하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 심한 고문으로 오른팔을 쓸 수 없게 된 후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썼다. 왼손에 붓을 든 후 기존 화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운필(運筆)로 웅혼한 기상이 느껴지는 산수를 그렸다. 분방한 필치와 독특한 색을 혼합한 화조화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50세에 그린 ‘매화도’에는 그만의 탁월한 색감이 묻어 있다. 고봉한은 양주화파(揚州畵派)의 한 사람이다. 양주화파는 17세기에 양주(揚州)에서 활동한 화가들을 일컫는다. 정통(正統)을 고수하는 대신 독특(怪)한 개성과 자유로운 화풍을 구사하여 양주팔괴(揚州八怪)라고도 부른다. 양주는 18세기에 소금 전매를 통한 부의 축적으로 문화의 중심지로 급부상한 도시였다. 염상(鹽商)들의 후원을 받은 예술가들에 의해 양주에서 시서화가 화려하게 꽃피었다. 상인들은 문인들의 취향은 반영하되 장사하는 곳의 분위기를 환하게 살려줄 수 있는 그림을 선호했다. 장중하고 무거운 산수화 대신 밝고 경쾌한 화조화가 인기를 끌었다. 고봉한의 ‘매화도’도 이런 맥락에서 탄생했다. 고봉한은 ‘매화도’에서 한 가지 색 매화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기존 문인화가들이 절개의 상징으로 백매(白梅)만을 그릴 때 고봉한은 홍매, 백매, 황매가 어우러진 ‘절개를 버린’ 매화를 그렸다. 주문자인 상인들의 요구를 반영한 작품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고집이 아니라 자신의 그림을 감상한 사람의 마음이었다.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재주를 쓸 수 있는 사람 고봉한. 이것이 오늘날까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지자대사는 진왕 양광의 도움을 받아 형주에 옥천사(玉泉寺)를 건립했다. 맹수와 뱀이 들끓어 삼독(三毒)의 늪이라 불리던 산이 청정한 도량으로 바뀌었다. 지자대사는 청정한 도량에서 ‘법화현의(法華玄義)’와 ‘마하지관(摩訶止觀)’을 강의했다. 수많은 제자들이 옥천사로 몰려들었다. 지자대사는 전란의 상처로 얼룩진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법문을 베풀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595년 봄, 지자대사는 진왕 양광의 거듭된 요청으로 양주로 돌아왔다. 진왕 양광은 지자대사에게 ‘유마경소(維摩經疏)’의 저술을 의뢰했다. 지자대사는 ‘어리석은 자신을 돌아보면 적당한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진왕 양광은 물러서지 않았다. 지자대사는 9월에 천태산으로 돌아와 ‘유마경소’ 집필에 몰두했다. 지자대사를 따라 수많은 제자들이 천태산으로 왔다. 대중들이 수백 명에 이르자 엄격한 생활규정을 제정했다. 선방에서의 좌선과 도량에서의 참회 그리고 승단의 일을 관장하는 것 등에 대한 10가지 규정이었다. 하루 네 번의 좌선과 여섯 번의 예불을 정하고 이를 어겼을 때 행해지는 벌칙까지 세밀하게 정했다. 절 안팎에서 어육신주(魚肉辛酒)를 금하고 쟁론(爭論)과 비방을 금지하는 등 불도 수행에 필요한 규정도 엄수할 것을 요구했다. 고구려의 파약(波若)도 이 시기에 지자대사에게 입문했다.

천태산에 들어와 집필과 대중교화에 전력한 지자대사는 597년 11월22일에 선정에 든 것처럼 단정히 앉아 67세의 세연을 마쳤다. 지자대사에 의해 확립된 교관쌍수의 사상은 제자 관정(灌頂)에 의해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와 ‘천태소오부(天台小五部)’로 정리되었다. 이론과 실천, 교상(敎相)과 관심(觀心)을 강조한 천태 교학은 당(唐)대의 담연(湛然,711~782)에 의해 다시 주목을 받게 된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85호 / 2015년 3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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