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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동기창, ‘봉경방고도’

기자명 조정육

“이름 알리기 위해 노력하기보단 어떤 이름을 얻을 것인지 고민하라”

▲ 동기창, ‘봉경방고도’, 명(明), 종이에 먹, 80×29.8cm, 대북고궁박물원.

“부디 스님께서 한역된 경전감수를 맡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불교학자로서 율사로서
불법홍포에 힘썼던 도선
동기창은 남종화로 명성
최초로 화파이론을 제시

도선 율·동기창 남북종론
모두 후대 영향 미쳤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

현장(玄奘,602~664)의 목소리는 간절하고 곡진했다. 지극하면서도 예의바른 태도에서는 유명인으로서의 권위의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큰 인물은 달랐다. 현장은 도선(道宣,596~667)보다 6살이 적었지만 그의 명성은 도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17년간의 인도 구법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황제의 후원으로 역경사업을 주도하고 있었다. 역경은 불교 경전을 정리하겠다는 현장의 개인적인 원력임과 동시에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이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경율론 삼장에 통달한 도선이 꼭 필요했다. 현장은 도선에게 서명사(西明寺) 주지를 맡기며 경전감수도 부탁했다. 도선은 현장의 제의를 기꺼이 수락했다. 유명인사의 섭외 때문이 아니었다. 불법홍포를 위한 신념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도선이 걸어온 길은 오로지 불법을 알리고 실천하기 위한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15세에 혜군(慧頵)을 은사로 출가했다. 20세에 당 황실의 존경을 받던 대선정사(大禪定寺) 지수(智首,567~635)에게 구족계를 받고 26세에 처음으로 율학을 배웠다. 지수와의 만남은 도선이 율종을 정리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9세에는 혜군과 함께 살고 있던 일엄사(日嚴寺)를 떠나 숭의사(崇義寺)로 옮겼다. 그 후 35세까지 10년 동안 순례길에 나서 고승들에 대한 일화를 수집하고 기록했다. 그 결과물을 토대로 장안에 돌아와 정리한 책이 ‘속고승전(續高僧傳)’이었다.

‘속고승전’은 양나라 혜교(慧皎, 497~554)의 ‘고승전’에 이어 양나라시대부터 도선이 살던 당나라까지 144년간에 걸쳐 활동한 고승 600여 명의 전기를 모아 기록한 책이다. 도선은 ‘선배들의 자문을 널리 구해보기도 하고 길 가는 이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혹 직접 눈으로 확인해서 기록하기도 해서’ ‘속고승전’을 완성했다. 혜교의 ‘고승전’은 ‘양고승전(梁高僧傳)’ 혹은 ‘양전(梁傳)’이라 부른 반면 도선의 ‘속고승전’은 ‘당고승전(唐高僧傳)’ 혹은 ‘당전(唐傳)’이라 부른다.

살아가면서 내 삶의 기준이 될 만한 멘토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도선에게는 승우(僧祐)법사가 멘토였다. 도선은 양나라의 승우법사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으니 위패제자라 할 수 있다. 도선은 자신이 승우법사가 환생했다고 믿었다. 실제로 그의 어머니는 꿈속에 승우법사를 만난 후 도선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도선은 ‘대당내전록(大唐內典錄)’을 지어 당시까지 번역된 경전 목록을 정리했는데 이는 승우법사의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을 본뜬 것이다. 또한 승우법사의 ‘홍명집(弘明集)’을 본떠 ‘광홍명집(廣弘明集)’을 지었다. 두 책 모두 불법 홍포에 목적이 있었다.

도선은 저술을 통해 불교학자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해냈지만 그의 위대성은 율의 제정에 있다고 하겠다. 그는 계율의 참 정신을 되살려 수행의 근간을 마련함으로써 남산율종(南山律宗)의 종조가 되었다. 이것이 그를 도선법사가 아니라 도선율사로 부르는 이유다. 그의 노력 덕분에 남산율종이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율은 여러 대중이 수행생활을 효율적으로 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규율이다. 출가자가 늘어나 여러 대중이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규율이 필요하다. 석가모니부처님에 의해 종교법인 율이 제정된 배경이다. 도선율사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인도의 율전이 번역된 지 200여 년이 흐른 뒤였다. ‘사분율’ ‘오분율’ ‘십송율’ ‘마하승지율’ 등이 번역되어 있었지만 지역과 종단에 따라 서로 다른 규정을 적용하는 등 제각각이었다. 통일된 계율의 제정이 필요했다. 도선율사는 각각의 율장이 지닌 차이점을 정리하고 모든 의식과 규범을 통일하였다. 도선율사가 제정한 남산율종은 중국을 넘어 한국과 일본 등 동북아 불교계의 승단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신라의 자장율사와 진표율사를 통해 오늘날의 조계종으로 이어진 율이 사분율이다.

계율은 대중생활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수행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할 의무다. 부처님이 가르친 8만4000법문은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學)과 경율론(經律論)의 삼장(三藏)으로 요약할 수 있다. 삼학과 삼장을 배우고 수행하기 위해서는 계율이 필요하다. 막행막식을 하는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산다고 말할 수 없듯 가르침은 실천을 통해서 드러나기 마련이다. 출가자든 재가자든 수행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계율을 지켜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도선율사는 현장의 추천으로 서명사의 주지가 되어 역경감수를 시작했다. 그러나 역경감수 못지않게 제자들에게 율학을 가르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현장법사의 입적(664) 후에는 서명사를 떠나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정업사(淨業寺)로 옮겼다. 도선율사는 평생 종남산을 의지해 저술에 전념했기 때문에 남산(南山)율사로 불렸으며 그 종파는 남산종(南山宗)이라 했다. 평생 ‘규칙을 행하는 것으로 채찍을 삼고 앉되 걸상에 의지하지 않았던’ 도선율사는 정업사에서 평생 염원하던 계단을 세우고 계단에 대한 내용을 저술한 뒤 667년에 입적했다. 세수 72세 법랍 52세였다.

1602년 이른 봄이었다. 동기창(董其昌,1555~1636)이 고(顧) 시어(侍御)와 함께 취리(欈李)에서 돌아오는데 비가 쏟아졌다. 두 사람은 비가 그칠 때까지 봉경(崶涇)에서 옛 그림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봉경방고도(崶涇訪古圖)’는 그 일을 기념하여 그린 그림이다. 기념화이긴 하되 특정한 장소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린 실경산수화는 아니다. 제시에 적은 사연은 구실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이 그림이 속한 남종화라는 장르가 더 중요하다. 그림은 위아래가 긴 축화(軸畵)이다. 축화는 감상자의 눈이 위아래로 향한 만큼 좌우가 협소해져 구도가 옹색해지기 십상이다. ‘봉경방고도’에서는 경물(景物)을 지그재그로 배치하여 단점을 보완했다. 전경에는 수종(樹種)이 다른 나무가 언덕 위에 서 있고 중경의 물을 지나 원경에 이르면 또 다시 나무가 언덕위에 서 있다. 언덕이라고는 하나 언덕인 지 바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붓에 연한 먹을 적셔 갈필(渴筆)로 수없이 내려 그은 언덕은 중력의 작용을 받지 않은 듯 가벼워 보인다. 질감표현을 위한 피마준(披麻皴)의 바위도 부스러질 듯 퍼석거린다. 당시의 문인인 진계유(陳繼儒,1558~1639)가 쓴 ‘북원(北苑:董源)과 우승(右丞:王維)의 양식을 겸했다’는 제(題)를 감안해도 쉽게 공감하기 힘든 작품이다. 그러나 남종화(南宗畵)를 그리는 특정한 공식에 의거하여 작품을 분석해보면 진계유의 극찬이 이해된다. 즉 ‘봉경방고도’는 남종화라는 맥락에서 반드시 거론해야 할 정통파 그림이라는 뜻이다. 언덕 위의 나무, 빈 정자와 누각, 피마준과 단색 등은 동원과 왕유 이래로 수없이 많은 남종화가들이 즐겨 따른 공식이었다.

동기창은 당대(唐代)의 왕유를 남종화의 시조로 여겼다. 오대(五代)의 동원 역시 왕유가 이룩한 남종화의 전통을 이어나간 화가였다. 진계유가 제시에서 동원과 왕유를 거론하며 동기창이 그들의 양식을 겸했다는 말은 동기창 또한 남종화가라는 칭찬이다. 왜 칭찬이라 할까. 그들이 세운 이론에 의하면 남종화가 북종화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다. 수준이 높은 그림이라는 자부심이다. 명대(明代) 만력(萬曆,1573~1620)년간이었다. 동기창과 진계유, 막시룡(莫是龍,1537~1587)과 심호(沈顥,1586~1661이후)는 중국 회화사상 처음으로 화파(畵派)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다. 그것이 바로 산수화의 남북종론(南北宗論)이다. 남북종론은 막시룡에 의해 가장 먼저 이론이 수립되었는데 네 사람 중 후대에 더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동기창이었다. 동기창은 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이론가였고 서예가이자 정치가였다.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남북종론은 당대의 선가(禪家)에서 착안한 이론이다. 선가에 남종과 북종이 있듯이 그림에도 남종화와 북종화가 있다는 이론이다. 남북종론의 기준은 그림이 ‘문인화인가 아닌가’였다. 문인화와 북종화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남북종론은 북종산수를 경시하고 남종산수를 우위에 둔 문인화사조의 반영이다. 이런 태도는 청록산수를 그린 직업화가를 무시하고 수묵산수를 그린 문인화가가 뛰어나다는 우월감에서 나왔다. 남북종론은 예술의 풍격으로 유파를 나눈 편견에 불과하다. 그림을 그린 사람의 신분에 따라 북종화는 수준이 떨어진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해버린 단견이다. 상대방을 깔보고 무시해야 내가 높아진다는 저급한 발상의 표현이다. 그들의 이론이 예술유파에 대한 선각자로서의 역할은 인정된다 하더라도 내용까지 옳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정립한 남북종론은 이후의 회화사에서 당연한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지금까지도 그 병폐는 여전하여 화려한 채색화를 그리면 수준 떨어지는 북종화이고 단색의 수묵화를 그리면 품격이 있다고 착각한다. 품격은 신분이나 색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사람의 정성과 예술적 완성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다.

도선율사가 제정한 율과 동기창이 정립한 남북종론 모두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도선율사의 율은 오늘날까지 큰 저항 없이 전해 내려오는 것에 반해 동기창의 남북종론은 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원인이 무엇일까. 도선율사의 율이 승단의 발전을 위한 순수한 원력에서 출발했다면 동기창의 남북종론은 그들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불순한 의도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들만의 천국을 설정해놓음으로써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문인과 비문인을 편가르기 하려는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름은 얻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이름을 얻는가가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이름으로 살고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86호 / 2015년 3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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