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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작자미상, ‘현장삼장상’

기자명 조정육

“정법을 구할 수 있다면 해골산이 문제겠는가”

▲ 작자미상, ‘현장삼장상’, 일본 가마쿠라시대 전기, 비단에 색, 135.1×59.5cm, 일본 동경국립박물관.

“그래. 너는 무슨 이유로 시험을 보려하느냐?”

13세에 승과시험에 합격해
구법여행 발원한 현장법사
56개국 통과해 인도 도착
날란다대학에서 불경 공부

북인도 군대 호위 받으며
불경 640질과 함께 귀국길
17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와

소년은 13세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당당했다. 그 모습을 본 시험관이 물었다. 며칠 후 낙양(洛陽)에서 승과시험이 있을 예정이었다. 14세 이상부터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소년은 빨리 승려가 되고 싶었다. 10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먼저 출가한 둘째형인 진소(津素)를 따라 낙양의 정토사(淨土寺)에 들어온 그였다. 덕망 높은 스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하루 빨리 정식 승려가 되어 세상에 널리 정법(正法)을 펼치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었다. 내년까지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소년은 용기를 내어 시험관을 찾아가서 자신도 시험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당돌하면서도 야무진 소년의 태도를 본 시험관은 출가하려는 목적을 물었다.

어린 소년의 대답은 이와 같았다.

“멀리로는 석가여래의 뜻을 이어 나가고, 가까이로는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을 빛내고자 합니다.”

겸손하면서도 열의에 찬 소년의 대답을 들은 시험관은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학문은 쉽게 이룰 수 있지만, 인물을 얻기는 어려운 법”이라는 말로 소년의 시험참가를 허락했다. 승과시험에 합격한 소년에게는 현장(玄奘,602~664)법사라는 법명이 주어졌다. 현장법사의 속명(俗名)은 진위(陣褘)로, 하남성(河南省)에서 출생했다. 뛰어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예의가 발랐다. 시험관을 찾아갔던 사건은 정토사에 있을 때 발생한 일이다. 그만큼 그는 정법(正法)에 대한 의지가 확고했고 불법을 공부하려는 열의가 뜨거웠다.

수(隋)가 망하고 당(唐)이 세워지는 과정 속에서 현장법사의 공부는 순탄치 못했다. 전쟁과 기근으로 법을 배우는 일과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 그를 가르치던 고승대덕(高僧大德)은 전란을 피해 각지로 흩어졌고, 현장법사도 5년 정도 머물렀던 정토사를 떠나 형과 함께 장안(長安)으로 피난을 갔다. 장안의 장엄사(莊嚴寺)에서 다시 쓰촨성(四川省)으로 옮긴 형제는 그곳에서 2~3년을 더 공부했다. 622년, 20세 때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현장법사는 형과 헤어져 다시 장안으로 돌아왔다. 장안은 새로 들어선 당의 황제가 수도로 삼은 도시였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외국인들이 살고 있었고, 각 나라의 춤과 음악을 구경할 수 있었다. 불교는 물론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기독교 등 세계의 종교가 유입되어 있었다. 인도와 서역에서 온 전법승들이 절을 세워 불교를 전파하고 있었고, 260년에 인도에 처음 구법 여행을 떠난 것을 필두로 많은 중국 승려들이 서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났다. 현장법사는 장안에서 외국어를 배웠으며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 경전을 공부했다. 그렇게 15년을 보냈다.

그런데 현장법사는 불경 공부를 하면 할수록 답답했다. 불교 교리가 한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오류가 많았고, 여러 불교 종파가 자기 종파의 가르침에 맞는 내용만 고집하다보니 가르침 사이에 모순이 많았다. 현장법사는 자신이 직접 인도에 가서 완전한 불경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때마침 중국에 온 인도 승려를 통해 날란다대학과 정법장(正法藏) 계현(戒賢) 스님의 명성을 듣게 되었다. 인도구법행에 대한 열망은 더욱 강해졌다. 결심이 확고해진 현장법사는 당 태종에게 출국을 허락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황실에서는 답이 없었다. 당시 당나라는 이제 막 통일을 완성한 상황이라 국내 정세가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공무를 제외한 그 어떤 일로도 국경을 빠져나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현장법사는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마음은 번민과 갈등에 휩싸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장안에 있는 탑에 들어가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현장법사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수미산을 보았다. 수미산은 불교의 세계관에서 우주의 중심을 이루는 산이다. 수미산은 금, 은, 수정, 주석 등의 보배로 이루어져 있고 주변에는 큰 바다가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꿈속에서 현장법사는 큰 바다를 건너 산에 오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때 거센 바람이 불더니 물속에서 솟아난 연꽃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현장법사를 산꼭대기로 날려 보내주었다. 꿈을 깬 현장은 드디어 자신이 떠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스물일곱 살의 현장법사는 인도를 향해 구법여행의 첫발을 내딛었다. 국가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가는 상황이라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낮에는 사람들 눈을 피해 숨고 밤에만 이동했다. 양주를 거쳐 국경을 앞에 둔 과주를 지날 때는 첩자에 의해 고발당했다. 다행히 지역 관리가 불심이 깊어 그가 빨리 떠나도록 도와주었다. 드디어 당의 국경선인 옥문관을 빠져 나와 고비 사막 앞에 섰다. 그의 눈앞에는 석탄처럼 쌓인 모래 언덕 사이로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늙고 야윈 붉은 말을 타고 모래와 자갈이 끝없이 이어진 사막 한가운데로 무작정 들어갔다.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뿐이었다. 새도 동물도 물도 없는 사막에서 모래 언덕이 파도처럼 움직였다. 모래돌풍이 불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예전 길을 지우고 새 길을 만들었다. 그래도 뚫고 가야만 하는 길이었다. 현장법사는 막막한 사막길을 오직 말 한 필을 동무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햇살이 강렬해 수십 개의 바늘이 얼굴을 찌르는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들고 있던 물을 떨어뜨려 완전히 빈손이 되었다. 5일 동안 물 한 방울 없이 사막을 횡단했다. 멀리서 신기루가 보였다. 사막이 끝나는 곳에 숲이 우거진 우물이 보여 달려가 보면 뜨거운 모래만이 있을 뿐이었다. 인도에 도착하기는커녕 사막을 벗어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았다. 그는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올렸다. 드디어 말 위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 말이 타클라마칸 사막의 하미 오아시스에 데려다 주었다.

하미에서 잠시 머무를 때였다. 고창국왕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심이 깊었던 고창국 국문태(麴文泰)왕은 당에서 뛰어난 스님이 오셨다는 얘기를 듣고 현장법사를 초대했다. 고창국에서 열흘을 머문 현장법사가 다시 구법여행을 떠나려고 하자 국문태왕은 그의 앞길을 막고 자기 나라의 국사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거듭되는 거절에도 왕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결국 현장법사는 사흘 동안 곡기를 끊고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왕은 손수 현장법사에게 공양을 올리며 마음을 바꿔주기를 간청했지만 현장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대신 현장법사는 한 달 동안 고창국의 주민들에게 법문을 들려주기로 했다. 왕은 부처님의 법을 전해주는 위대한 법사가 자신의 등을 밟고 오를 수 있기를, 자신이 그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현장법사는 왕의 뜻을 받아들였다. 약속대로 한 달 동안 대중들에게 설법을 마친 현장법사는 다시 길을 떠났다. 왕은 현장법사가 인도까지 가는 도중에 거치게 될 각 나라의 왕들에게 편지를 썼다. 현장법사가 그들의 영토를 잘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과 더불어 금은 비단 같은 선물도 듬뿍 실어주었다. 고창국왕은 현장법사가 구법여행을 하는 내내 지속적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현장법사는 다시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 여러 나라에 머무르며 곳곳에 산재한 사원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기록을 남겼다. 현장법사가 보고 기록한 각 나라의 역사와 지리, 생활상과 민속, 종교 등은 지금까지도 당시 서역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책으로 인정받고 있다. 가는 도중 산적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길 때도 있었다. 얼어붙은 천산 산맥을 넘을 때는 일행 중 열에 서넛이 죽었고 말과 소는 더 많이 잃었다. 눈사태를 만나 곁에 있던 사람이 사라지기도 하고, 추위와 배고픔에 쓰러진 사람도 있었다. 현장법사도 이때 냉병을 얻어 ‘발작하면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현장법사는 키르키스탄에서 서돌궐의 대칸을 만나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로 향했다. 사마르칸트로 가기 위해 붉은 모래사막을 횡단할 때의 심정을 현장법사보다 먼저 사막을 건넜던 법현 스님은 이렇게 적고 있다.

“여기서부터 북서쪽으로 가면, 거대한 모래사막으로 들어간다. 물이 없어서 풀도 없다. 길이 아득히 없어져서 그 범위를 헤아릴 수 없다. 큰 산과 흩어져 있는 백골을 길잡이 삼아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다.”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위험한 여행이었지만 그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천산산맥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56개 나라를 통과한 다음에야 인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는 도중 협조적인 국왕을 만나 환대를 받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모래바람과 배고픔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현장법사는 기도를 했다. 사막에서 기도하고 눈 속에서 기도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기도했다. 걸음걸음마다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한 사람이 자신의 신념을 이룰 때까지 얼마만큼의 정성과 기도가 필요한지 현장법사의 생애가 말해준다.

드디어 인도에 도착했다. 언어가 다르고 문자가 다르고 외모가 다르고 사는 모습이 다른 인도에 도착한 현장법사는 감개무량했다. 그는 곧장 잘랄라바드에 있는 불영굴(佛影窟)로 향했다. 불영굴은 부처님이 독룡 고팔라를 제도한 후 자신의 그림자를 남겨두었다는 유명한 성지였다. 가는 길에 도적이 칼을 빼어들고 달려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둑들은 현장법사의 담대한 배짱과 확고한 신념을 보고 칼집에 칼을 도로 집어넣고 함께 따라갔다. 현장법사의 인도행은 매사가 그렇게 자신의 삶을 깊게 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식이었다. 진심어린 기도로 불영굴에서 부처님의 그림자를 본 현장법사는 페샤와르에서 카니슈카 왕의 대탑을 발견했다. 간다라 지방과 마투라 유적지를 둘러보며 아쇼카왕이 세운 대탑을 목격했으며 많은 불상과 보살상을 친견했다. ‘때로 밧줄을 잡고, 쇠줄을 당기며, 허공에 걸린 잔도를 타고, 위태로운 다리를 건너’ 탁실라를 지나고 카슈미를 거쳐 북인도로 향했다. 그는 부처님의 고향인 카필라바스투와 열반지인 쿠시나가라를 순례하고, 녹야원과 보드가야를 방문했다. 모두 부처님의 일생에서 중요한 성지였다.

구법여행을 시작한 지 만 8년이 지난 637년. 드디어 목적지 날란다대학에 도착했다. 날란다대학은 인도에서 가장 훌륭한 가람이면서 각 나라의 승려들이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유학 올 정도로 유명한 대학이었다. 수천 명의 비구가 생활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날란다대학에서는 매일 100여개의 강좌가 열렸다. 교과과정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를 비롯하여 인도 고유의 베다나 산스크리트어 문법, 의학, 천문학, 수학과 주술 등 다양한 과목이 전부 들어있었다. 날란다대학에 도착한 현장법사는 감격했다. 자신이 평생 와보고 싶었던 불교학의 중심지에 도착했다는 감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3년 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던 계현법사를 만났기 때문이다. 날란다 대학의 종장(宗匠)인 정법장은 106세로 병세가 위중하여 3년 전에 세상을 떠나려했다. 그러나 꿈속에 세 분의 보살이 나타나서, 3년 후에 중국에서 비구가 찾아오면 대법(大法)을 가르치라는 계시를 받고 병세가 호전되어 현장법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말을 들은 현장법사가 어찌 전율하지 않겠는가? 현장법사는 열과 성을 다해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지순례를 계속했다. 인도에서 10년 남짓 체류하는 동안 날란다대학과 주요 사원을 순례하며 스승을 만나고 불경을 공부했다. 룸비니, 보드가야, 녹야원, 쿠시나가라 등 부처님의 4대 성지를 둘러보고 각지의 성지도 순례했다. 인도에서 만족할 만큼 충분히 공부하고 순례를 마친 현장법사는 마침내 귀국을 결심했다. 정법장 존장이 그를 붙잡으며 굳이 귀국하려는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대법(大法)을 구하여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바람은 이제 돌아가서 제가 들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설명하고, 이들이 듣고 이해하게 하여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그의 말에 스승은 더 이상 제자를 잡지 못했다. 현장법사는 귀국을 위해 경전과 불상과 필사본 등을 꾸렸다. 643년 4월이었다. 현장법사는 북인도 왕의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길에 올랐다. 장안을 떠난 지 만 17년만이었다. 인더스강을 건널 때 풍랑을 만나 경전을 잃어버리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불경 640질을 가지고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고원을 넘어 천산남로를 거쳐 장안으로 향했다. 현장법사가 왕복기간에 들른 나라는 모두 110개국이었고 여행거리는 5만 리(약 1만6000km)였다. 이 거리는 교통이 발달된 지금 자동차나 기차로도 횡단하기가 힘든 어마어마한 거리였다. 동아시아 3국에서 현장법사는 몰라도 삼장법사와 손오공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삼장(三藏)법사란 경율론에 통달한 위대한 사람을 뜻하는데 ‘서유기(西遊記)’의 유명세 덕분에 현장법사의 대명사가 되었다. 험한 사막을 지나고 설산과 절벽을 넘으며 갖은 고생을 하면서까지 천축을 다녀온 현장법사의 여행이야기는 아주 인기 있는 소재였다. 명나라 때의 소설가 오승은(嗚承恩)은 당시까지 구전되어 내려오던 현장법사의 이야기에 상상력을 입혀 ‘서유기’라는 소설을 완성했다. 책 속에서 현장법사는 배경으로 점잖게 물러나 있고 말썽꾸러기 손오공(원숭이)과 저팔계(돼지), 사오정(괴물) 등이 주인공이 되어 현장법사를 따라 천축까지 가는 동안 온갖 희한한 요괴를 물리친다는 설정이었다. 이 소설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아서 여러 차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현장법사가 귀국하는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 ‘현장삼장상(玄奘三藏像)’이다. 등에 대나무 책 상자를 짊어진 행각승(行脚僧)이 양 손에 불자(拂子)와 두루마리 경전을 들고 걸어간다. 목에는 인생의 무상함을 잊지 않는 수행승임을 보여주는 해골 목걸이를 두르고, 귀에는 고귀한 존재임을 상징하는 금귀걸이를 달고 있다. 이 그림은 일본 카마쿠라(鎌倉時代:1192~1333) 시대 때 제작되었는데 현장법사의 사리탑이 세워진 중국 서안의 흥교사(興敎寺) 비석의 탑본을 모본으로 하고 있다. 이밖에도 일본에는 현장 법사의 생애를 12권의 두루마리에 그린 ‘현장삼장회(玄奘三藏繪)’가 현존한다. ‘현장삼장회’는 법상종(法相宗)의 종조(宗祖) 현장법사의 일생을 탄생에서 열반까지 도회한 그림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중국의 당나라와 백제의 불교문화를 받아들여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건설하려던 나라시대(柰良時代:710~794)부터 현장법사에 대한 인기가 매우 높았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794년~1185)에 현장법사의 초상화가 유입되고 한 세기 뒤에 ‘현장삼장회’가 그려진 것도 그런 인기를 반영한다.

‘현장삼장상’은 현장법사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렸을 뿐 실제 모습은 아니다. 인도로 떠날 때는 죄인처럼 몰래 떠났으나 귀국길은 성대했다. 떠날 때는 대답도 없었던 당 태종은 현장법사의 귀국을 기꺼이 반겼다. 그의 귀국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운집했고 꽃을 뿌리며 환영했다. 황제는 현장법사에게 정무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현장법사는, 불가의 수행자로서 불법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겠다는 말로 황제의 요청을 정중히 물리쳤다. 대신 인도에서 가져온 불사리 150과를 비롯해 불상과 경율론 657부를 홍복사(弘福寺)에 봉안했다. 태종은 현장법사가 홍복사에서 역경작업을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현장법사는 역경작업과 함께 인도 여행길에 들렀던 서역 여러 나라에 대한 내용을 담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도 저술했다. 648년에 자은사(慈恩寺)와 번경원(翻經院)이 완공되자 이곳으로 옮겨 역경사업에 몰두했다. 현장은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자은사에 탑을 세워달라고 황제에게 요청했다. 이 탑이 바로 ‘큰 기러기 탑’으로 불리는 높이 644m의 7층 누각식탑 대안탑(大雁塔)이다. 657년에는 새로 건립된 서명사(西明寺)에서 거처하다 다시 옥화사(玉華寺)로 옮겼다. 현장법사는 664년 2월 입적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역경작업에 전념했다. 번역된 경전의 오류를 바로잡고 누락되거나 필요한 부분을 보충했다. 그가 번역한 경전은 ‘유가사지론’ ‘해심밀경’ ‘섭대승론’ ‘성유식론’ 등의 유식 경론과 ‘대비바사론’ ‘구사론’ 등의 아비달마론서, ‘반야심경’ ‘대반야경’ 등의 반야경론을 포함해 모두 75부 1335권에 이르렀다.

현장법사가 ‘멀리로는 석가여래의 뜻을 이어 나가고, 가까이로는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을 빛내고자’ 걸었던 ‘현장법사 루트’는 지금도 수많은 여행가들이 따라 걷고 싶은 최고의 여행코스가 되었다. 현장법사의 여정을 따라 중국에서 인도로 여행가는 것도 의미 있다. 여기에 현장법사의 ‘구도심’을 되새길 수 있는 구법(求法)여행을 더한다면 더없이 값진 여행이 될 것이다. 우리의 이런 노력에 의해 ‘석가여래의 뜻’이 이어지고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이 빛나지 않겠는가. 우리 또한 현장법사와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87호 / 2015년 3월 2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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