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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왕유, ‘강간설제도’

기자명 조정육

법장과 왕유, 상 없는 충실함으로 대가 일구다

▲ 왕유, ‘강간설제도(江干雪霽圖)’, 당, 비단에 색, 28.8×117.2cm, 프리어 갤러리.

“대사님. 심오한 바다와 같은 화엄세계가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화엄의 깊은 뜻이 무엇입니까?”

측천무무 앞서 법문 펼친 법장
평생 화엄철학 위해 헌신하며
훗날 화엄종 개조로 널리 칭송

왕유는 그리는 데 만족할 뿐
자신 시서화에 큰 의미 안 둬
사람들은 문인화 시조로 숭배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년)가 법장(法藏, 643∼712)에게 물었다.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측천무후는 법장이 화엄법회를 열자 두 개의 부도에서 오색 빛이 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궁궐에 초청했다. 언제 세월이 이렇게 흘렀던가. 법장은 측천무후의 주선으로 십대덕(十大德)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현수(賢首)대사라는 칭호까지 사사받았다. 그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흘렀다. 법장의 속성은 강(康)씨로 선조는 강거국(康居國:사마르칸트)사람이었다. 조부 때 장안(長安)으로 이주하여 중국에서 살았다. 그의 어머니는 이상한 빛을 삼킨 태몽을 꾼 후 법장을 낳았다. 법장은 16세에 법문사(法門寺) 사리탑 앞에서 연비공양을 하고 법을 구하고자 입산했는데 지엄(智儼, 602∼608)의 ‘화엄경’ 강의를 듣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마치 물을 이 병에서 저 병으로 옮긴 듯했고, 우유를 물에 섞듯이’ 조화를 이루었다. 신라에서 온 의상(義相, 625~702)도 지엄의 문하에서 법장과 함께 화엄학을 공부했다. 그 인연으로 말미암아 법장은 훗날 자신의 저서를 의상에게 보내 잘못이 있으면 지적해달라고 부탁한다. 지엄이 입적한 후 법장은 측천무후가 창건한 태원사(太原寺)에서 삭발하여 득도했다. 측천무후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때 32세의 패기 넘치던 수행자는 어느새 62세가 되었고 천하를 호령하며 무서울 것 없던 측천무후도 80세가 되었다. 30여 년의 세월 동안 한 사람은 수행자로, 한 사람은 권력자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그 시간동안 법장은 ‘화엄경’을 30여 회 이상 강의하고 역경에도 참여했다. 그가 ‘화엄경’을 강의하거나 독송할 때는 입에서 빛이 나와 천개(天蓋)가 되어 공중에 머물렀다. 그가 ‘십지품(十地品)’을 강론할 때는 하늘에서 꽃이 내려오고 오색의 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법장의 도력은 기우제를 지낼 때도 그 영험이 드러났다. 기도승으로서의 능력도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세월은 철벽같은 여제(女帝)의 마음도 무너뜨렸다. 측천무후는 평생 불법에 의지해 살아왔지만 여든 나이가 되고 보니 더욱 더 불법의 따뜻한 품이 그리웠다. 오늘 장생전(長生殿)에서 법장에게 법문을 청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80화엄’의 역경이 완료되었음을 기념하기 위한 법회는 명분일 뿐이었다.

그런 측천무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법장의 법문은 어렵기 그지없었다. 측천무후는 고향처럼 편안한 법장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대사님, 이 늙은 저를 위하여 ‘화엄경’의 세계를 이해하기 쉽게 들려주십시오. 그런 뜻이었다. 법장은 측천무후의 심정을 모르지 않았다. 무후를 위해 마땅히 비유할만한 물건이 없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법장의 눈에 모서리의 금사자상(金獅子像)이 들어왔다. 금사자상을 매개로 한 법장의 화엄법문이 시작됐다.

“금(金)에는 자성이 없습니다. 유능한 장인에 의해 제작될 수 있는 조건을 수반해야만 비로소 사자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드러난 것은 다만 조건[緣]에 의해 생기(生起)한 것입니다. 때문에 연기(緣起)리고 합니다.”

법장은 금사자상을 가리키며 연기를 밝힌 다음 색과 공을 구별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설법은 곧바로 삼성(三性)으로 이어졌다.

“사자의 모습은 허상이고 오직 참된 것은 금뿐입니다. 사자는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금은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둘을 형색(形色)과 공(空)이라 부릅니다. 공은 고유한 형상을 가지지 않으므로 형색에 관련시켜서 말하게 되는데, 그렇게 하여도 형색이 환상으로 존재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으므로 형색과 공이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사자가 마음에 의해 존재하는 것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하고 사자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의타기성(依他起性)입니다. 그러나 금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므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합니다.”

법장의 설명이 계속됐다. 금으로써 사자를 수렴해 버린다면 금 이외의 사자 형상은 없게 되므로 형상이 없다[無相]는 것을 말했다. 바로 생성되는 것을 볼 때 이는 다만 금이 생성된 것이고 금 이외의 다른 존재는 없으므로 사자에 비록 생성 변화 소멸이 있다 해도 금이라는 본체에는 본래 더하고 덜함이 없다. 그러므로 생성됨이 없다는 사실을 말했다.

여기까지 설법을 마친 법장은 불교를 오교십종(五敎十宗)의 교판으로 분류하고 그 중 화엄종을 으뜸으로 삼아 일승원교(一乘圓敎)의 사상을 설파했다. 즉 모든 현상은 일체가 하나이니 일체와 하나는 모두 자성이 없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고 하나는 일체이니 원인과 결과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힘과 여럿의 작용은 서로 흡수되고 그들의 팽창과 흡수는 자재롭다는 것이 일승의 완전한 가르침인 일승원교였다. 법장의 오교십종의 교판은 각 교파의 교설을 망라한 뒤, 각각의 의미를 부여함과 동시에 화엄종의 입장에서 공(空)과 유식(唯識)의 이론까지 회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일체사물을 ‘화엄경’의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로 설명하려는 법장의 비유에는 평생 화엄철학을 위해 헌신해 온 수행자의 신념이 가득했다.

왕유(王維, 701∼761)가 그린 ‘강간설제도(江干雪霽圖)’는 눈이 그친 평원 산수의 청담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림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좌우에만 경물이 들어서 있을 뿐 그림의 상당 부분은 눈 덮인 강이 차지했다. 가장 중요한 자리를 넓은 공간으로 비워놓을 수 있는 여유가 새삼 돋보인다. ‘멋진 그림을 완성하고 싶다’는 붓을 든 자의 욕심이 전혀 묻어있지 않는 작품이다. 만상이 눈에 덮여 고요한 겨울날. 명징한 바람 소리에 겨울 한기마저 숨죽일 만큼 조용하다. 모래톱에 내려앉느라 이따금씩 끼룩거리는 새소리만이 적막한 고요를 깨뜨릴 뿐이다. 진계유(陳繼儒, 1558∼1639)가 남북종론(南北宗論)을 논할 때 ‘남종의 왕유파는 맑고 온화하며 조용하고 한가롭다’고 평한 경지가 바로 이런 걸까. 붓질을 더하기보다는 덜어냄으로써 선비된 자의 그윽한 운치와 담백한 문인정신을 보여주고자 한 작품이다. 오른쪽에는 눈에 뒤덮인 절벽이 대문처럼 서 있고 절벽 밑으로는 아담한 민가가 들어서 있다. 속기(俗氣)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곳이지만 민가가 있으니 신선계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인간계가 맞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두 사람이 길에 서서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지금 얼어붙은 강과 죽림의 바람소리와 언덕 위로 뻗은 세 그루 겨울나무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특별할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대화 주제다. 그러나 욕심 없는 그들의 삶만큼이나 맑고 청신한 주제다.

왕유는 성당(盛唐)의 시인이자 화가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자를 마힐(摩詰)이라 한 것도 불교 경전인 ‘유마힐경(維摩詰經)’에서 따왔다. 그의 시 속에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던 불교적인 정서가 잘 녹아 있어 후인들은 그를 시불(詩佛)이라 칭송했다. 9세 때부터 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했던 그는 21세에 진사합격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안록산의 난 때 반군의 포로가 되어 곤욕을 치렀지만 그의 관료생활은 비교적 평탄해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이르렀다. 후에 그의 이름 대신 왕우승(王右丞)이라 부르게 된 이유도 그의 벼슬 때문이었다. 그는 31세에 부인과 사별한 후 재취(再娶)하지 않고 평생 홀로 살았다. 성품이 고요하고 한적한 것을 좋아하였는데 병약한 어머니를 위해 장안(長安)에서 멀지 않은 종남산(終南山)의 망천(輞川)에 망천장(輞川莊)이라는 별장을 짓고 운치 있는 생활을 즐겼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망천장을 절에 희사했다.

그는 망천장에서 흥이 일 때마다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그는 시서화가 모두 뛰어난 진짜 문인이었다. 그가 망천에서 지은 시 ‘종남별업(終南別業)’ 20여 수와 망천장을 그린 ‘망천도(輞川圖)’는 소식(蘇軾, 1037∼1101)이 극찬한 것처럼 “시 중에 그림이 있고[詩中有畵] 그림 속에 시가 있는[畵中有詩]” 경지의 표현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되었다. ‘망천도’는 원본이 사라져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모사도(模寫圖)가 뒤를 이었다. 왕유의 ‘망천도’와는 별 관련성이 없어 보이지만 제목이 좋아 망천도라는 이름을 단 그림도 줄을 이었다. 소식이 묘사한 왕유의 그림은 ‘소리없는 시[無聲詩]’가 되었고 왕유의 시는 ‘소리가 있는 그림[有聲畵]’이 되었다. 사람들은 소식이 정리한 왕유의 그림 세계를 예술목표로 삼았다. 수묵으로 된 평원산수를 그리면 자신들도 왕유처럼 격이 높은 화가가 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왕유는 동기창과 막시룡에 의해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러나 왕유는 자신의 그림과 시의 결합에 대해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을 뿐이었다. 더구나 남종문인화의 시조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왕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글과 그림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의 뒤에 줄서기를 한 사람들이 그를 문인화의 시조로 삼고 숭배하기까지 한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얼마나 황망했을까.

법장은 두순(杜順)과 지엄에 이어 화엄종의 제3조가 되었다. 그러나 법장은 ‘60화엄’의 주석서인 ‘탐현기(探玄記)’, 화엄교학의 개론서인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등 수많은 저술을 통해 화엄교학을 체계화시킴으로써 사실상 화엄종의 개조가 되었다. 특히 ‘화엄오교장’에서는 불교 전체를 오교십종으로 분류하여 화엄 교판을 세웠다. ‘화엄오교장’은 화엄종을 최고위에 둔 교판으로 여러 교판들 중 가장 늦은 시기에 성립된 만큼 정교하고 완벽했다. 이렇게 화엄학의 집대성에 평생을 바친 법장이었지만 자신이 화엄종의 개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속한 교단이 화엄종이라는 종파의식도 없었다. 화엄종이란 명칭은 4조인 징관(澄觀, 738∼839)이 ‘화엄경소’에서 처음 사용했으며 화엄조사를 처음 세운 이는 5조 종밀(宗密, 780∼841)이었다. 왕유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남종문인화의 시조가 되었듯 법장 또한 그러했다. 명칭이야 어떠하든 법장과 왕유가 이룬 성과는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들을 따른 사람들이 시조나 개조의 뜻을 제대로 이어갔는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지엄을 스승으로 삼아 일생 동안 화엄연구에 매진한 법장은 70세를 일기로 대천복사(大薦福寺)에서 입적했다. 제자들로는 징관, 문초(文超), 정법사(靜法寺) 혜원(慧苑) 등이 있었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88호 / 2015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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