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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견자본성(見自本性)

기자명 인경 스님

돈오는 스스로 본성을 보는 것

거친 신체적인 느낌은 점차적으로 가라앉으면서 소멸되고, 마음은 고요해지고 산뜻하게 깨어날 것이다.

스스로 본성을 보는 것[見自本性], 이것을 간략하게 줄여서 ‘견성(見性)’이라고 부른다. 견성은 바로 돈오와 동일한 의미이다. ‘본성을 본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마음의 작용을 본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본래적 바탕 그 자체를 본다는 의미를 가진다.

마음의 변화를 관찰한다면
거친 느낌이 점차 소멸되고
고요함·산뜻함이 깨어날 것
이 패턴을 깨닫는 게 견성

마음의 작용을 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마음의 변화를 관찰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화가 났다면, 화가 난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화가 났다면, 우리는 불쾌한 대상을 향해 공격하는 경향을 가진다. 문을 쾅 닫거나 거칠게 욕설을 퍼부을 수가 있다. 이때 눈을 감고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것이 ‘성품을 본다[見性]’는 의미이다.

가장 먼저 자신의 화난 마음상태를 본다. 그런 다음에 거친 숨결, 뜨거워진 열기, 주먹에 가해진 긴장감과 같은 신체적인 불쾌한 느낌을 본다. 또한 어떤 생각이 화를 불러일으킨 것인지 무의식적인 생각을 찾을 수도 있다. 혹은 화가 났던 오랜 어린 시절의 기억, 트라우마를 다시 만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과정이 ‘마음을 본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눈을 감고 내면을 향해 일념회광(一念廻光)하면서 계속적으로 관찰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거친 신체적인 느낌은 점차적으로 가라앉으면서 소멸되고, 마음은 고요해지고 산뜻하게 깨어날 것이다. 그러면 어떤가? 우리는 그 결과로서 화의 본질이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空]는 통찰과 함께 반복적으로 화가 발생하는 패턴[因緣]을 발견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이것을 일차적으로 ‘견성(見性)’이라고 말한다.

견성의 첫 번째는 대상을 관찰해 그 본질을 통찰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초기불교적인 관점이고, 심리치료적인 의미를 가진다. 견성의 두 번째는 사물 그 자체, 바탕을 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대승 불교적 관점으로, 동북아시아에서 견성이라고 할 때는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보조국사는 다음과 같은 문답을 소개한다.

“잠깐, 지금 까마귀 소리를 듣는가?”
“듣습니다.”
“그러면 듣는 성품을 돌이켜서 들어보라. 그곳에는 허다한 소리가 있는가?”
“여기에서 일체의 소리나 온갖 분별을 가히 얻을 수가 없습니다.”
“기특하고 기특하다. 이것이 바로 관음(觀音)의 이치에 들어가는 문이다.”

주목해야할 핵심 질문은 ‘듣는 성품을 돌이켜서 들어보라’는 것이다. 초점은 외적인 대상인 까마귀 소리가 아니라, 까마귀 소리를 듣는 성품을 들어보라는 것이다. 까마귀 소리를 듣는 것은 허다한 소리와 분별이 존재한다. 이것은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다. 하지만 듣는 것을 다시 돌이켜서 들어보라는 것은 바로 ‘그 듣는 것 자체를 들어보라[聞性]’는 의미이다. 눈으로 볼 때는 보는 것 자체를 보라[見性]는 것이고, 맛을 느낄 때는 맛보는 것 자체를 맛보라[覺性]는 것이다.

이것은 외적인 대상에 대한 인식, 분별적인 앎이 아니다. 이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분별에 대한 인식, 곧 이차적인 인식이다. 듣고 보는 성품, 그 자체에 대한 본질적 인식, 깨달음이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 자체를 만나게 된다. 외적인 대상에 반응하는 마음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마음[本性], 스스로 존재하는 마음[自性], 모든 현상이 돌아가는 바탕[法性]을 체험한다. 이것을 우리는 견성체험이라고 부른다. 견성체험이란 바로 궁극적인 종교적 체험이다. 보조국사는 계속하여 이런 견성체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점검한다.

“그렇다면 분별이 없다면, 그것은 허공이 아닌가?” “공하지 않아서 밝고 밝아서 어둡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공하지 않는 바탕[體]인가?”
“모양이 없어서 가히 이름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와 조사들의 생명이다. 다시 의심하지 말지어다.”

그렇다. 그렇다. 이것은 밝고 밝아서 어둡지가 않다. 이것은 무겁지가 않으며 산뜻하고 가볍다. 이것은 경이로움이고 행복감이다. 이것은 분명하고 분명한 깨달음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의 본래적인 모습이다. 근본적인 삼매이고 우리의 변함없는 성품, 바탕이다. 대상을 향해 허다한 분별을 하는 것도 결국은 이런 바탕에 근거해 가능한 바이다. 여기에 이르면 나와 너는 서로 하나가 되고, 어디에 있든지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며, 시공을 초월해 서로 계합하여 알아보지 않겠는가?

인경 스님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1288호 / 2015년 4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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