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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오현- 아지랑이

기자명 김형중

어리석은 인생을 읊은 철리시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아지랑이’

수행으로 얻은 깨침 통해
자신의 실상을 인식하고
인생에 대한 관조는 물론
견처 읊은 깨달음의 노래

오현(1932~) 스님의 시는 불교의 심오한 사색과 깨달음의 세계를 일상적인 평이한 시어로 쉽고 감동적으로 읊고 있다.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인 ‘아득한 성자’가 하루살이의 삶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일깨워준 시라면, 공초 문학상 수상작인 ‘아지랑이’는 실체가 없는 허상인 아지랑이를 쫓아 헤매는 부질없고 어리석은 인생을 읊은 철리시이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이다.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이 공(空)이다. 선사(禪師)들이 말하는 깨달음이란 인식 작용의 주체가 되는 내 마음을 깨닫는 것이요, 현상세계의 사물들이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고 마는 고유한 실체가 없는 공의 세계임을 깨닫는 것이다.

‘금강경’에는 “일체의 모든 현상은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그림자 같네. 이슬과 같고 또 번개와 같아라”하여 공사상을 여섯 가지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다. 인생은 구름 같고, 아침 이슬 같고, 꿈과 같다. 실체가 없는 허상을 붙들고 발버둥을 치다가 가는 것이 인생이다. 깨닫고 보면 인생은 별 것이 아니다.

‘아지랑이’는 오도(悟道)의 세계인 공의 세계를 아지랑이란 시어를 통해 멋지게 시화하였다. 필자는 ‘아지랑이’를 구도자가 투철한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실상을 인식하고, 인생에 대한 관조와 견처(見處)를 읊은 깨달음의 노래라고 보고 싶다.

1연 1행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의 시구는 백 척의 긴 장대 끝에서 한 발을 내딛느냐 마느냐 생사를 걸고 구도 일념으로 임하는 수행자의 자세를 읊고 있다. 송나라 석상선사(986~1039)는 “백 척이나 되는 대나무 끝에 오르는 일이 귀한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2연 1행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의 시구에서는 드디어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충천 대장부의 기개를 보이고 있다. 이 시를 살려내는 시어가 ‘낭떠러지’와 ‘절벽’인데 시어가 신선하고 긴장감을 준다. 칡넝쿨을 생명줄 삼아 우물 속에 매달려 있는 나그네에게 밤낮으로 흰 쥐와 검은 쥐가 나타나 칡넝쿨을 번갈아가면서 갉아먹고 있는 현실은 낭떠러지나 절벽처럼 위태롭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하는 삶이 우리의 인생이다. 수행자의 마음은 모름지기 이와 같아야 한다.

3행 ‘우습다’는 깨달음의 겸손한 표현이다. 인생을 깨닫고 보니 내가 그 동안 실체가 없는 아지랑이를 붙들기 위해서 발버둥친 것이 우습다. 깨닫고 보니 세상은 허망한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다. 죽음을 등에 지고 벼랑 끝에 서 있는 우리의 인생, 덧없는 재물과 미인, 명예를 쫓아서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지랑이 인생이요, 허공에 핀 꽃을 찾는 허망한 인생이다.

오현 스님의 ‘아지랑이’는 불교의 오도송이나 선시가 전통적으로 한시 형식을 취하여 왔는데 본격적으로 한글시로 읊은 점과 난해한 불교용어를 배제하고 일상적인 시어를 선택하여 일반 대중의 곁으로 가깝게 다가간 점이  훌륭하다. 한국문학사에서 최초로 시조 시형에 선시를 도입한 선구자로 ‘동방의 제일 시승(詩僧)’이다. 만해 이후 ‘유심’의 복간을 통해 선시의 이론 정리와 창작에서 최고의 성과를 이룬 시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만해의 진정한 후예이다.

김형중 동대부중 교감·문학박사 ililsihoil1026@hanmail.net


[1290호 / 2015년 4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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