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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김농, ‘향림소탑도’

기자명 조정육

“무상대도를 얻기 위해선 무한의 노력이 필요하다”

▲ 김농, ‘향림소탑도(香林掃塔圖)’, 청, 종이에 먹, 61.5×28cm, 중국 소주박물관.

“무릇 사문이란 3천 가지 위의(威儀)와 8만 가지 세행(細行)을 갖추어야 하거늘, 대덕(大德)은 어디서 왔기에 도도하게 아만을 부리는가?”

혜능대사 만나 견성한 영가
확철대오 경지 노래로 읊은
‘증도가’ 지금까지도 애송돼

김농의 대표작 ‘향림소탑도’
열심히 청소하는 사미 표현
마음 때 청소해 깨달으려면
무한한 노력이 뒷받침돼야

혜능대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영가(永嘉, 665~713)가 조계산(曹溪山)에 도착했을 때 혜능 대사는 상당(上堂)하여 법문을 하고 있었다. 객승이 남의 문중에 찾아왔으면 예를 갖추는 것이 도리였다. 그런데 영가는 혜능대사에게 절도 하지 않고 대사를 세 번 돌고 나서 육환장을 짚고 우뚝 섰다. 영가는 31세, 혜능대사는 58세였다. 젊은 수행자가 어른 앞에서 취할 태도가 아니었다. 혜능대사가 화를 낸 것은 젊은 객승이 버릇없어서가 아니었다. 젊은 객승의 방자함을 빌미로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영가가 대답했다.

“나고 죽는 일이 중대하고 무상(無常)은 빠르기 때문입니다.”

혜능대사가 물었다.

“어찌하여 무생(無生)을 체득하여 빠름이 없는 도리를 요달하지 못하는가?”

영가가 대답했다.

“본체는 곧 무생이고 본래 빠름이 없음을 요달하였습니다.”

이에 혜능대사가 흔연스럽게 말하며 영가를 인가했다.

“그렇다. 참으로 그렇다.”

그 모습을 보고 대중이 모두 깜짝 놀랐다. 영가는 그때서야 비로소 위의를 갖추어 혜능대사에게 정중히 예배를 드리고 하직인사를 올렸다. 혜능대사가 말했다.

“돌아감이 너무 빠르지 않은가?”
“본래 스스로 움직이지 않거늘, 어찌 빠름이 있겠습니까?”
“누가 움직이지 않음을 아는가?”
“스님께서 스스로 분별을 내십니다.”
“그대는 무생의 뜻을 참으로 잘 터득하였구나.”
“무생에 어찌 뜻이 있겠습니까?”
“뜻이 없다면 누가 분별하는가?”
“분별도 또한 뜻이 아닙니다.”

혜능대사가 탄복하면서 말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하룻밤 쉬어가라.”

그때부터 사람들이 영가를 일숙각(一宿覺)이라 불렀다. 조계산에서 하룻밤만 자고 갔다는 뜻이다. 다음날 영가가 혜능대사에게 하직을 고했다. 혜능대사는 몸소 대중을 거느리고 영가를 전송했다. 열 걸음쯤 걸어가던 영가가 석장을 세 번 내리치고 말했다.

“조계를 한 차례 만난 뒤로는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노라!”

영가현각(永嘉玄覺, 665~713)은 당대(唐代)의 고승으로 어려서 출가했다. 그의 형도 출가했다. 고향인 영가현에서 살았기 때문에 영가대사라 불렀다. 영가는 혜능대사를 만나기 전에 이미 ‘대반야경’ ‘열반경’ ‘유마경’ 등 여러 경전에 두루 통달했다. 처음에는 천태지관(天台止觀)을 익혔는데 선종의 혜능대사를 만나 견성 오도하여 인가를 받았다. 혜능대사를 만나고 고향에 돌아오자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밀물처럼 모여들었다.

육조(六祖) 헤능대사에게서는 그의 종지를 계승할 수 있는 뛰어난 제자가 무수히 많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도 청원행사(靑原行思,?~740), 남악회양(南嶽懷讓,677~744), 남양혜충(南陽慧忠,?~775), 하택신회(荷澤神會,?~760), 영가현각 등 5명의 제자는 5대종장(五大宗匠)으로 부를 정도로 수행력이 탁월했다. 특히 청원행사와 남악회양은 그 제자의 활발한 활동에 힘입어 중국 선종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남악계는 마조(馬祖,709~788)~백장(百丈,720~814)~황벽(黃蘗,?~850), 임제(臨濟,?~867)로 이어졌고 청원계는 석두(石頭,700~791)~약산(藥山,745~828)~운암(雲巖,782~891)~동산(洞山,807~869)~조산(曹山,840~901)으로 이어졌다. 선종사(禪宗史)에서 남악과 청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이 혜능대사를 만난 사연을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남악회양은 15세 때 출가했다. 수계를 받고 5년 동안 율장을 공부했으나 참다운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이때 혜능대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 갔는데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떤 물건이 여기에 왔는가?” 혜능대사가 남악에게 화두를 던진 것이었다. 답을 할 수 없었던 남악은 8년 동안 각고의 정진 끝에 홀연히 깨친 바가 있었다. 남악이 혜능대사를 다시 찾아갔다. 혜능대사가 물었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남악이 대답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여 육조 혜능대사에게 인가를 받고 15년 동안 시봉하였다. 남악은 “일체 만법이 모두 마음을 따라 일어난다(一切萬法 皆從心生)”고 했는데 이 사상은 혜능대사가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고 한 사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곧 남종선(南宗禪) 사상체계의 근간이다. 그는 즉심즉불(卽心卽佛)과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강조했다. 그리하여 “그대의 마음이 곧 불(佛)이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일심(一心)을 정하기 위해서다. 삼계유심(三界唯心)이니 삼라만상이 일법(一法)에 인(印)하는 것이거늘 모든 소견(所見)의 색(色)은 모두 자심(自心)일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혜능대사의 두 번째 수제자인 청원행사는 어려서 출가했는데 성격이 과묵했다. 어느 날 혜능대사의 법석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절하고 물었다. “무엇에 힘써야 계급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혜능대사가 반대로 물었다. “그대는 지금까지 어떤 일을 했는가?” 청원이 대답했다. “성인(聖人)이 가르치신 무위(無爲)의 진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혜능대사가 물었다. “그러면 어떤 계급에 떨어졌는가?” 청원이 대답했다. “성인의 진리도 위하지 않았는데 무슨 계급이 있겠습니까?” 그때부터 혜능대사가 청원을 수제자로 삼아 가장 윗자리에 앉혔다. 청원은 혜능에게 법을 전해 받고 길주(吉州) 청원산(靑原山) 정거사(靜居寺)에 머물렀다. 청원은 선의 경계나 불법에 대한 고정된 틀이 없었다. 다만 일상생활 자체가 그대로 선이고 선이 바로 생활 자체였다. 그의 사상은 후대에 마조가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한 조사선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선종의 역사에서 청원행사와 남악회양의 위치는 영가현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연재에서 두 사람을 제치고 영가현각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증도가(證道歌)’ 때문이다. ‘증도가’는 영가현각이 혜능대사를 만나 확철대오한 경지를 읊은 노래로 지금도 선가에서 널리 애송되고 있다. ‘증도가’에 들어 있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는 선종의 돈오(頓悟)사상을 압축한 표현이다. 이는 ‘한 번 뛰어 넘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점차로 닦아 성불한다(漸修)’는 교종(敎宗)과 반대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증도가(證道歌)는 무슨 뜻일까. 성철(性撤, 1912~1993)선사에 의하면 증(證)은 증오(證悟)의 준말로 구경(究竟)을 바로 체득함을 의미한다. 근본 무명인 제8 아뢰야식까지 완전히 벗어나 대원경지에 들어가 진여본성을 확철히 깨친 것을 증이라 한다. 이는 견해와 지혜로 알아차리는 해오(解悟)와는 다르다. 도(道)는 보리(菩提) 또는 각(覺)이라 한다. 구경각을 성취한 구경처로 증이 곧 도이고 도가 곧 증이다. 가(歌)는 영가현각이 혜능대사를 만난 후 확철히 깨우치고(證) 구경각을 성취한(道) 경지를 시가형식으로 표현한 노래다.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으니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다.”

이렇게 시작된 ‘증도가’는 부처님으로부터 달마대사를 거처 육조 혜능까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져 내려온 증오처(證悟處)가 담겨 있다.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릴 수 있고 단박에 부사의한 해탈경에 들어갈 수 있는 수선(修禪)의 요의(要義)가 기록되어 있어 후대 학인들에게 등불 같은 책이다. 한번 내 마음을 깨치면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되어 있어 무생법(無生法)을 알고 단번에 여래지에 들어가는 세계를 알려주는 책이다.

절집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된 모양이다. 삭발하지 않은 머리카락이 목까지 내려왔다. 뒷모습이라 더욱 눈에 띈다. 사미승은 무릎까지 내려 온 먹물옷을 입고 빗자루질에 여념이 없다. 먹으로만 그린 단색의 단조로움은 쓱쓱 그은 바지에서 생동감을 얻는다. 붓질 몇 번으로 헐렁한 바지통을 입체적으로 살려낸 절묘함을 보라. 선이 꿈틀거릴 듯 살아있다. 상의의 무거움은 하의의 활동성을 방해하지 못한다. 고수의 붓질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현장감이다. 바지를 그린 붓질로 짚신까지 마무리했다. 빗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빗자루가 바닥을 뒤덮은 듯 퍼져있다. 사미승이 얼마나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는지 짐작가는 대목이다.

사미승이 몸을 향한 쪽으로는 다음과 같은 제발(題跋)이 현판처럼 적혀 있다. “불문(佛門)에서는 청소를 최우선의 일로 삼는다. 사미에서부터 노승에 이르기까지 일찍 일어나서 부지런히 하지 않은 자가 없다. 향림(香林)에 탑이 있는데 쓸고 닦고 쓸고 닦았다. 사리가 환하게 빛나서 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손 안에 있는 것 같았다.”

‘향림소탑도(香林掃塔圖)’는 김농(金農,1687~1764)의 대표작이다. 김농은 자가 수문(壽門), 사농(司農)이고 호가 동심(冬心), 곡강외사(曲江外史)로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한 사람이다. 기행과 괴벽으로 유명했는데 쉰 살이 넘은 늦은 나이에 그림을 배웠다. 어렸을 때부터 시문에 뜻을 둔 덕분에 그의 그림은 예서(隸書)와 해서(楷書)를 펼쳐놓은 듯 깔끔하고 거침없었다. 권세와 부귀에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강직하면서도 서권기(書卷氣) 넘치는 사의화를 제작했다. 만년에는 불교에 깊이 심취하여 ‘향림소탑도’ 같은 선화(禪畵)를 남겼다. 속되지 않는 붓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탑이 있는 향림이 어딘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미에서 노승에 이르기까지 빗자루 들고 청소하는 도량이라면 모두 향기 나는 숲이 아닐까.

영가현각의 ‘증도가’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사항이 있다.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는 청소와 같은 것이다. 아무런 공부 없이 무조건 좌선한다고 해서 얻어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사미승이 쓸고 닦고 쓸고 닦는 것을 반복한 끝에 사리가 빛나듯 깨달음의 세계 또한 무한한 노력을 기울여야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영가현각은 “나는 일찍이 많은 겁 지나며 수행하였다”라고 고백했다. 한 생(生)이 아니라 여러 생을, 한 겁(劫)이 아니라 여러 겁을 수행해야 무상대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선사들의 행적을 살펴보고 게송과 오도송을 읽고 나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이다. 노력 없이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불문에서 청소를 최우선의 일로 삼듯 우리 또한 우리 마음의 때를 청소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계속 청소를 하다보면 인연이 성숙되어 어느 순간 확철대오하는 기연(機緣)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영가현각은 오도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713년에 39세로 입적했다. 혜능대사도 같은 해에 입적했다. 세상에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던 만큼 후학들을 지도할 수 있는 시간도 짧았다. 그러나 그가 지은 ‘증도가’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신심을 증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매번 흔들리며 걸어가는 나에게도 이정표 같은 책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91호 / 2015년 4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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