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6. 점수와 습기

기자명 인경 스님

점수는 깨달음 의지해 성스러움 이루는 과정

“점수란 비록 본성을 깨달아 부처와 다름이 없다고 할지라도 시작도 없는 오랜 습기(習氣)는 단박에 제거할 수가 없는 까닭에 깨달음에 의지하여 닦아 점차로 공력을 훈습하고 성스런 태아를 오랫동안 장양하여 성스러움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습기란 행위 만드는 잠재적 힘
각인된 행동 쉽게 변하지 않듯
마음 작용도 동일하게 나타나
단박 제거 어렵기에 점수 필요

이것은 점수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핵심된 용어는 습기(習氣)가 아닌가 한다. 습기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돈오(頓悟)와 더불어서 점수(漸修)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습기를 단박에 제거하기가 어렵기에 오랫동안의 점수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습기란 ‘익혀진 기운’이란 의미로서 선악의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잠재적인 힘을 말한다. 이 용어는 유식불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것으로 ‘성유식론’에서는 습기를 제8식에 저장된 종자와 동일한 의미로서 종자의 다른 이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떤 경험이 반복되면 특정한 형태로 훈습되어 나중에 잠재적으로 발생하는 힘을 얻게 되는데 이것을 종자(種子)라고 한다.

이를테면 ‘콩 심는 데는 콩이 나고 팥 심는 데는 팥이 난다’는 말이 있다. 비유적으로 콩의 행위를 반복하면 나중에는 콩과 같은 행동이 나오고, 팥의 행위를 반복하면 팥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종자는 과거 행위의 결과이고 미래에 특정한 행위를 발생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서구의 행동심리학에서 유명한 파블로프의 개 실험 결과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개에게 밥을 주면서 종소리를 반복적으로 울렸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종소리만 듣고도 파블로프 개는 침을 흘렸다. 보통의 개들은 냄새를 맡고서 침을 흘린다. 하지만 파블로프 개는 종소리를 듣고서 침을 흘린다.

반복된 행위는 유사한 조건이 되면 다시 반복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보통의 개들은 냄새에 반응하도록 학습되어 있지만, 파블로프 개는 종소리에 반응하도록 새롭게 조건화된 것이다. 이런 학습은 특정한 원인과 조건 아래에서 훈습된 행동이다. 유식심리학으로 해석을 해보면, 파블로프 개는 종소리에 침을 흘릴 수 있는 잠재적인 힘, 곧 종자가 저장되어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종자는 곧 익혀진 힘이고, 학습된 행동이고, 가까운 미래에 특정한 행동을 반복할 수 있는 조건화된 힘이다.

이것을 인지행동치료(CBT)나 심리도식치료에서는 도식(schema)이라고 말한다. 도식은 아주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기에 형성되고, 평생을 통해 더욱 공고해지는 경향을 가진다. 그 내용은 인지, 감정, 신체적인 기억들로 구성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는 구조이며, 상당한 수준으로 역기능적이라고 정의된다.

쉽게 말하면 어린 시절에 익혀진 행위는 어른이 된 이후로도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성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성격은 어린 시절에 가족 구조 속에서 익혀진 행위들로서 상당기간 동안에 반복된다. 어떤 성격적 행동은 각인되어서 평생을 통해서 변하지 않고 유사한 행동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어떤 개인을 우리가 알게 되면 우리는 그의 특정한 성격을 이해한다. 그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일상에서 상대방을 비난할 때 사용하는 말로 “또 그런다”는 말이 있다. 그 이전에 그에 대한 정보가 입력되어 있다가 그것과 유사한 행동을 하면 우리는 “또 그러네”라고 말하게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우리의 행위는 마음에 저장되었다가 그와 유사한 환경이 오면 동일한 행동을 하게 된다. 이것을 ‘습기’라고 한다. 이것은 기억이고, 신체적인 느낌과 함께 일어나고, 감정과 생각을 동반한다. 때문에 이것을 문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문화 속에서 태어난 사람은 일정한 환경 속에서 거의 유사한 행동을 한다는 점은 바로 이것을 잘 설명한다.

문제는 어떤 습기는 심각하게 역기능적이라는 점이다. 이 부분은 개선이 필요하고 교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쉽게 단박에 수행되지 않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천천히 조금씩 개선된다는 점에서 ‘점수’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경 스님 명상상담연구원장 khim56@hanmail.net

1292호 / 2015년 4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