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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여문영, ‘강촌풍우도’

기자명 조정육

마음 밖에 부처 없고 부처 밖에 마음 없다

▲ 여문영, ‘강촌풍우도(江村風雨圖)’, 명, 비단에 연한 색, 169×104cm, 클리블랜드 미술관.

당(唐) 개원(開元,713~742) 년간의 일이다. 마조도일(馬祖道一,709~788)이 전법원(傳法院)에 머물면서 매일 좌선(坐禪)을 하고 있었다. 남악회양 대사는 그의 근기를 알아보고 물었다.

도일, 남약회양에게 심인 얻어
개원사에서 남종 선법 펼쳐내
한반도 선종 역사에 큰 영향

비바람 풍경 그린 ‘강촌풍우도’
삶의 폭풍 언제나 곁에 있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작용

“스님은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대사는 암자 앞에서 벽돌 하나를 집어다 갈기 시작했다. 도일이 물었다.

“벽돌을 갈아서 무엇을 하시렵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벽돌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지 못하거늘, 어찌 좌선을 하여 부처를 이루겠는가?”
“그러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소가 수레를 몰고 가는 것과 같으니, 수레가 가지 않으면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소를 때려야 옳은가?”

도일이 대답이 없자, 대사가 다시 말했다.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는 것인가. 앉은뱅이 부처(坐佛)를 배우는 것인가? 만일 좌선을 배운다면 선(禪)은 앉고 눕는 데 있지 않고, 앉은뱅이 부처를 배운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습이 아니다. 머무름이 없는 법(無住法)에서 취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대가 만일 앉은뱅이 부처라면 곧 부처를 죽이는 일이니, 만약 앉는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를 통달한 것이 아니다.”“어떻게 마음을 써야 무상삼매(無相三昧)에 부합하겠습니까?”
“그대가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배움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의 요체를 설함은 저 하늘이 비를 뿌리는 것과 같으니, 그대의 인연이 맞았으므로 마침 도를 보게 된 것이다.”
“도는 빛깔도 형상도 아니거늘 어떻게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심지법안(心地法眼)으로 도를 능히 볼 수 있으니, 모습 없는 삼매도 그러하다.”

눈(眼)은 깨달은 마음이다. 진리를 깨닫게 되면 부처의 눈인 불안(佛眼) 혹은 마음의 눈인 심지법안(心地法眼)을 갖춘다고 한다. 선(禪)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찾는 것을 ‘눈’을 찾는다고 표현한다.“거기에 생성과 파괴가 있습니까?”

“만일 생성과 파괴, 모임과 흩어짐으로 도를 보는 자는 도를 보는 것이 아니다.”

도일은 깨우침을 받고 심의(心意)가 초연해졌다. 남악회양을 10년 시봉하였는데 그 경지가 날로 더하였다. 도일은 속성(俗姓)이 마씨(馬氏)라서 후세 사람들이 마조(馬祖), 마대사(馬大師)라 불렀다. 어릴 때 출가하여 수행하다 남악회양 선사를 기연으로 심인을 얻었다. 769년에 강서성(江西省)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를 중심으로 남악회양으로부터 전수받은 남종(南宗)의 선법을 널리 펼쳤다. 그가 홍주를 중심으로 새롭게 펼친 마조선법(馬祖禪法)을 홍주선(洪州禪) 혹은 홍주종(洪州宗), 강서선(江西禪)이라 한다. 이때 호남(湖南)에서는 석두희천(石頭希遷)이 석두종(石頭宗)을 세워 크게 번창했다. 이후 중국의 선종은 강서의 홍주종과 호남의 석두종이라는 양대 산맥으로 뿌리를 내렸다. 우리가 흔히 쓰는 ‘강호(江湖)의 제현(諸賢)’이라든가 ‘강호의 대덕(大德)스님들’이란 표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마조선은 강서를 넘어 중국을 대표하는 선이 되었고 우리나라 선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 선종 9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7산 선문이 마조선을 이어받았다.

마조도일은 일체의 법이 마음의 법이며, 마음은 만법의 근본이라 했다. 그러므로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 달마대사에서부터 시작된 선종(禪宗)의 4대 종지(宗旨) 즉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가르침이 역대 조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옴을 알 수 있다. ‘사가어록(四家語錄)’과 ‘조당집(祖堂集)’에는 마조선사가 제자들을 가르친 일화가 간략하게 적혀 있다.

대주혜해(大珠慧海) 스님이 처음 마조대사를 찾아와 참례하자 대사가 물었다. “어디서 오느냐?” “월주(越州) 대운사(大雲寺)에서 옵니다.” “여기에 와서 무엇을 구하려 하느냐?” “불법을 구하려 합니다.” “자기의 보배창고(寶藏)는 살피지 않고서 집을 버리고 사방으로 치달려 무엇을 하려느냐. 여기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무슨 불법을 구하겠느냐?” 대주 스님은 드디어 절하고 물었다. “무엇이 저 혜해의 보배창고입니까?”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그대의 보배창고이다. 그것은 일체를 다 갖추었으므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작용이 자유 자재하니 어찌 밖에서 구할 필요가 있겠느냐?” 대주 스님은 그 말끝에, 본래 마음은 깨달음을 말미암지 않음을 스스로 알고 기뻐하며 절을 했다. 대주 스님은 6년을 마조대사를 섬긴 뒤에 돌아가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을 지었다. 제자가 묻고 대주혜해 스님이 대답하는 형식으로 된 이 책을 본 마조대사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월주(越州)에 큰 구슬(大珠)이 있는데 뚜렷하고 밝은 광채가 자재하게 사무쳐 막힌 곳이 없구나.”

제자 중에는 달을 가리키는 스승의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쳐다 본 총명한 제자도 많았다. 대매법상(大梅法常) 스님이 마조대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바로 마음이 부처다(卽心卽佛).” 법상 스님은 그 자리에서 깨닫고 그때부터 대매산에 머물렀다. 마조대사는 법상 스님이 대매산에 머문다는 소문을 듣고 한 스님을 시켜 찾아가 묻게 했다. “스님께서는 마조 스님을 뵙고 무엇을 얻었기에 갑자기 이 산에 머무십니까?” “마조 스님께서 나에게 ‘바로 마음이 부처다’라고 하였다네. 그래서 여기에 머문다네.” “마조 스님 법문은 요즘 또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요즘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하십니다.” “이 늙은이가 끝도 없이 사람을 혼돈시키는구나. 너는 네 맘대로 비심비불해라. 나는 오직 즉심즉불일 뿐이다.” 그 스님이 돌아와 마조대사에게 대매법상과의 대화를 얘기했다. 마조대사가 말했다. “매실이 익었구나.”

마조대사의 교수법은 혜능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혜능대사가 법성사에서 깃발을 보고 마음이 흔들린다고 했던 일화 말이다. 마조대사가 백장회해(百丈懷海)를 데리고 들길을 걷고 있었다. 이때 들오리가 날아갔다. 마조대사가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갔느냐?” “저쪽으로 날아갔습니다.” 백장의 대답을 들은 마조대사가 갑자기 백장의 코를 잡아 틀었다. 백장이 아프다고 소리치자 마조대사가 말했다. “날아갔다더니 여기 있지 않느냐?” 일체법이 마음법이고 만법이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가르침을 깨우쳐준 일화다.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진다. 주룩주룩 쏟아진 것이 아니라 좌악좌악 쏟아진다. 퍼붓듯 내리 긋는 비바람 때문에 세상은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다. 사선으로 쓸어내린 붓질이 보이는가. 대각선으로 쏟아지는 비는 농도가 다른 두 가지 색을 교차하듯 그려 넣어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듯하다. 막무가내 쏟아지는 빗줄기에 나무들이 몸살을 앓는다. 언덕위에 뿌리를 드러낸 나무는 금세라도 가지가 부러질 것 같다. 대부벽준(大斧劈皴)으로 그린 바위와 산봉우리는 흑백 대비가 심해 느낌이 더욱 강렬하다. 강한 농담대비, 과장적으로 꺾인 나뭇가지의 표현 등은 남송(南宋)의 하규(夏珪) 작품을 보는 듯하다. 마원(馬遠)과 하규에 의해 시작된 남송의 산수화양식은 명대(明代) 절파(浙派)화풍에서 그 맥을 잇는다.
 
‘강촌풍우도(江村風雨圖)’는 여문영(呂文英, 1421~1505)의 작품이다. 여문영은 자가 활창(闊蒼)으로 인물화와 산수화를 잘 그린 명대의 절파 화가다. 8대 성화제(成化帝:재위 1464~1487년)와 9대 홍치제(弘治帝:재위 1487~1505) 때 궁정화원(宫廷画院)이 흥성해 이름 있는 화가들이 운집했다. 여문영을 비롯해 여기(呂紀), 왕악(王諤), 임량(林良), 곽허(郭詡), 은선(殷善) 등이 이 시기에 활동했다. 그러나 명대에는 정식 화원제도는 성립되지 않았다. 대신 궁정화가에게 일정한 직위를 주어 궁중회화의 제작 수요를 맡게 했다. 즉 화가들에게 금의위지휘(錦衣衛指揮:궁정 호위병)를 주거나, 남경의 문연각(文淵閣), 북경의 무영전(武英殿), 인지전(仁智殿) 등의 전각 대조(待詔)직을 주어 궁중회화를 담당하게 했다. 여문영은 1488년에 당시 화조화(花鳥畵)의 일인자인 여기(약 1475~1503 활동)와 함께 금의위지휘를 제수 받았다. 두 사람 모두 홍치제의 총애를 받았고, 합작품도 여러 점 남겼다. 합작품에서는 두 사람이 각각 자신의 특장을 살려 여문영이 인물을, 여기는 화조를 그렸다. 사람들은 여문영을 ‘소여(小呂)’, 여기를 ‘대여(大呂)’라고 불렀다.

여문영의 작품으로는 ‘화랑도(貨郞圖:행상인)’ 춘하추동 4폭, ‘희춘도(嬉春圖:봄을 즐거워함)’ 2폭, ‘궁장왜왜(宮妝娃娃:집에서 단장하는 여인)’ 등의 인물화가 남아 있다. 여기와의 합작품으로는 ‘죽원수집도(竹園壽集圖)’와 ‘용녀참사도(龍女斬蛇圖)’ 등이 전한다. 여문영의 작품은 거의가 인물화다. 이런 상황에서 ‘강촌풍우도’는 산수화도 잘 그렸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강촌풍우도’는 얼핏 보면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의 소상야우(瀟湘夜雨)를 연상시킨다.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쳐진 소상강(瀟湘江)은 중국 최대의 호수인 동정호(洞庭湖)로 흘러든다. 이곳은 산수가 아름답고 수많은 신화가 깃들어 있어 문인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무엇보다 회오리바람과 폭우가 잦은 곳이다. 그러나 비 내리는 명소가 어디 소상강 뿐이랴. ‘강촌풍우도’는 소상강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작품이다.

비바람이 소상강에만 불지 않듯 우리가 만나는 삶의 비바람도 특정한 시점에만 불지 않는다. 다섯 살에는 알사탕 때문에 요동치던 비바람이 열다섯에는 시험 때문에 요동친다. 스물다섯에는 취직 때문에 소용돌이치던 태풍이 서른다섯에는 자식 때문에 사고가 난다. 서른다섯의 태풍은 마흔 다섯에도 계속되고 쉰다섯, 예순 다섯에도 그치지 않고 몰아친다. 그렇다면 인생을 끝마칠 때까지 평생 동안 몰아치는 비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 걸까.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맑은 날에도 가슴 속에서 여전히 쿵쾅거리는 비바람은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마조대사는 말한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만들어낸 작용이라고.
마조가 병이 들었다. 원주(院主)가 문안을 드렸다.

“스님께선 요즈음 건강이 어떠하신지요?”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이니라.”

일면불은 1800년을 사는 반면 월면불은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 본래면목, 법신, 불성을 깨닫고 나면 장수와 단명에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하물며 잠깐 지나가는 비바람이겠는가.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92호 / 2015년 4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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