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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삼일암에서 훗날의 사자후를 챙기다

기자명 김택근

‘대저 육조의 종지는 육조가 항상 주창한, 오직 돈법만을 전한다[唯傳頓法]고 하는 것으로 점문(漸門)은 일체 용납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교가(敎家)의 점수사상이 혼입되어 선문이 교가화됨으로써, 순수선은 없는 실정이다.’ 이렇듯 성철은 지눌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 송광사 삼일암. 성철 스님은 송광사에서 당대의 선지식 효봉 스님을 친견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누구에게도 오도의 순간을 얘기하지 않았다. 경허는 사미승의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은 구멍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용성은 ‘경덕전등록’의 ‘달은 만궁(彎弓)과 같은데 비는 적고 바람은 많다’는 구절을 읽고 대오했다. 만공은 통도사 백운암에서 새벽 종소리를 듣고, 한암은 스승 경허로부터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를 듣고, 경봉은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견성했다. 그러나 성철의 견성에 대한 인연은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법문과 강설, 또 회고담을 통해 동정, 몽중, 숙면일여의 단계를 거치며 미세망상만이 남아있는 마지막 마계(魔界)인 제8아뢰야식마저 멸진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매일여의 경지에 이른 후에도 다시 사중득활(死中得活)의 경계에 이르러 비로소 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생각이나 분별로 과거나 미래를 인식하지만,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무심경지에 들어가면 과거·현재·미래가 다 끊어져 버린다. 이를 ‘과거와 미래가 끊어졌다[前後際斷]’고 한다. 그리 되면 밖으로는 모든 인연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이 허덕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무심경지가 도(道)에 든 것이 아니었으니 여기서 다시 깨쳐야 한다. 이 경계를 선종에서는 ‘죽은 자리에서 다시 살아난다[死中得活]’고 한다. 성철은 이 경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념불생 전후제단이 되어 대무심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거기서 살아나지 못하면 이 사람은 크게 죽은 사람[大死底人]입니다. 크게 죽은 사람은 구경각을 성취하지 못했으며 도(道)를 이루지 못했으며 견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만한 경계에 도달하려고 해도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또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다면 이것은 도가 아니고 견성이 아니라고 고불고조(古佛古祖)가 한결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매일여 경지를 증득했어도 한 차례 더 공부해서 크게 죽은 뒤 다시 소생하라는 가르침이다. 성철은 훗날 도반인 향곡에게 사중득활의 경계에 이르렀는지를 물은 바 있다. 아마 향곡이 오매일여의 경지에 들어 대무심지에 이르렀지만 죽은 자리에서 다시 살아났는지 알고 싶었을 것이다. 향곡은 34세인 1944년에 깨달음을 얻어 운봉으로부터 전법게를 받아 이미 경허 스님의 적손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1947년 문경 봉암사에서 정진하던 중에 성철이 향곡에게 물었다.

“‘죽은 사람을 죽여라 하면 바야흐로 산 사람을 볼 것이요[殺盡死人 方見活人], 또 죽은 사람을 살려라 하면 바야흐로 죽은 사람을 볼 것이다[活盡死人 方見死人]’고 한 말이 있는데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향곡이 이 말을 듣고 몰록 무심삼매에 들었다. 삼칠일(21일) 동안 침식을 잊고 정진하다가 활연대오하여 오도송을 읊었다.  그렇게 도반까지 분심을 일으켜 대오에 이르도록 한 성철이건만 정작 자신의 견성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다.

“당신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사담조차 없으셨다.” (불필 스님)
“성철 스님을 모시던 당시엔 무섭고 어려워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원택 스님)

그런데 그런 이유를 맏상좌 천제 스님은 나름 이렇게 설명했다.

“‘금강경’에도 기록되어 있다. 깨친 것을 인식하면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갇혀 있는 것이다. 우리의 고정관념 속에서 깨달음이란 것은 신비로움을 연상하는데, 그것조차 초탈한 것이 깨달음의 경지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묻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것 아닌가.”

‘금강경’은 시종 상(相)을 여의라고 이른다. 성철은 아상을 주관, 인상을 객관, 중생상을 공간, 수자상을 시간 개념으로 파악했다. 주관은 ‘나’라는 모습에서, 객관은 나를 떠난 상대방에게서, 공간은 나와 남의 어울림에서, 시간은 내 목숨이 영원할 것이라는 집착에서 생겨났다고 보았다. 이처럼 독창적으로 사상(四相)을 해석하고, 상을 버려서 견성한 선승이 어찌 깨침의 인연 따위를 붙들고 있겠느냐는 말이다. 제자 천제의 설명은 엄숙하다. 추호도 그런 인연 따위를 들어 성철의 견성을 의심하지 말라는 얘기이다. 물론 성철의 견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천제가 지적한 신비를 좇는 속인의 입장에서 아쉬울 따름이다. 분명한 것은 아무도 묻지 못했(않았)고, 성철은 말하지 않았다.

성철은 깨친 후 순천 송광사를 찾아갔다. 선방인 삼일암에서 하안거를 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당대 선지식 효봉 스님(1888~1966)이 주석하고 있었다. 성철은 큰스님을 찾아가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하고 싶었을 것이다. 인가받고 싶었을 것이다. 송광사는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명찰이었다. 일찍이 고려시대 지눌 보조국사(1158~1210)가 정혜결사운동을 펼쳐 불법을 다시 일으킨 승보사찰이었다. 그래서 선승이 정진하는 선방이 법당보다 위에 있다. 삼일암은 송광사 16국사 중 제9대 조사인 담당국사가 이곳의 물을 마시고 3일 만에 깨쳐서 그리 부른다고 알려져 있다.

효봉은 1925년 38세에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신계사 미륵암 선원에서 석 달 동안 앉아만 있어 절구통수좌라는 별명과 함께 ‘정진 제일’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1930년 법기암 뒤에 토굴을 짓고 ‘깨닫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 맹세했고, 1년6개월이 지난 어느 여름날 홀연 깨쳐서 토굴을 박차고 나왔다. 훗날 총무원장과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지냈다. 학눌(學訥)이라는 법명은 보조국사 지눌의 덕화를 본받겠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성철은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깨달음에 대한 스승의 인가, 사자상승(師資相承)에 대한 중요성을 설파했다.

‘승가에는 두 종류의 스승이 있다. 하나는 삭발을 허락하고 계를 주는 스승[得度師]이고, 또 하나는 마음을 깨우쳐 법을 이어받게 해주는 스승[嗣法師]이다. 만약 수계한 스승에게서 마음을 깨우쳐 법을 전해 받게 되면 법을 전해 받은 스승을 겸하게 되지만, 다른 스승으로부터 마음을 깨우쳐 법을 받게 되면 법을 전해 받은 스승을 따로 전하게 된다. 법을 이은 스승의 계통을 일러 법계·법맥, 혹은 종통·종맥이라고 한다. (……)

이를 일컬어 혈맥을 서로 이어받음[血脈相承]이라고 한다. 이는 마치 아버지의 피가 아들에게 전하여짐과 같이 스승과 제자[師資]가 주고받아서 부처님의 법을 서로 이어서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법맥을 전하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혈맥을 서로 이어받은 법맥 즉 종통은 제삼자가 변경시켜 바꾸지 못한다.’

성철은 깨쳤으니 법맥을 이어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송광사에서 효봉과 어떤 인연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신 보조국사 지눌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습득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의 사찰이었다. 정혜결사를 통해 고려불교를 일으킨 지혜와 법음이 스며있었다. 당시에는 보조국사가 걸쳤던 장삼과 가사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700년이 지났지만 지눌의 자취가 선명했고, 보조국사의 법향이 그윽했다. 성철은 지눌이 남긴 글들을 독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심결’을 읽다가 한 구절에 눈길이 멈췄다.

‘예로부터 모든 성인이 먼저 깨치고 뒤에 닦지 않음이 없으니 닦음을 인연으로 깨친다.’

제성불성 막불선오후수 인수내증 (從上諸聖 莫不先悟後修 因修乃證)

하지만 혜능 스님은 ‘육조단경’에서 이렇게 일렀다.

‘자기 성품을 스스로 깨쳐서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으니 또한 점차가 없느니라.’

자성자오 돈오돈수 역무점차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

지눌과 성철은 경을 통해 홀로 공부했다. 둘은 육조혜능을 최고의 스승으로 모셨다. 그런데 지눌은 ‘먼저 깨치고 뒤에 닦음[先悟後修]’을 주창했다. 성철은 자신과 지눌의 깨침을 살펴보았다. 지눌은 창평 청원사에 머물 때 ‘육조단경’을 읽고 처음으로, 또 예천 보문사에서 ‘화엄경’과 ‘화엄신론’을 읽고 두 번째로, 다시 지리산에서 ‘대혜어록’을 읽고 세 번째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이는 자신의 깨침과는 달랐다. 똑같이 ‘육조단경’ ‘화엄경’ ‘대혜어록’을 보았지만 고려시대의 지눌은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아닌 돈오점수(頓悟漸修)를 주창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지눌이 조계종 종조의 지위를 얻기 전이었기에 성철은 ‘깨달음에 대한 이견’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훗날 조계종이 지눌을 종조로 모심으로써 종지(宗旨)마저 흔들렸다. 이를 보고는 참을 수 없었다. 성철은 ‘돈황본 육조단경’을 펴내며 책머리에 이렇게 적었다.
‘조계육조(曺溪六祖) 이후 선은 천하를 풍미하여 당·송·원·명 시대에 불교가 꽃을 피우게 한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종지가 많이 변하여 육조의 정통사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대저 육조의 종지는 육조가 항상 주창한 “오직 돈법만을 전한다[唯傳頓法]”고 하는 것으로, 점문(漸門)은 일체 용납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중간에 교가(敎家)의 점수사상이 혼입되어 선문이 교가화됨으로써, 순수선은 없는 실정이다.’

이렇듯 성철은 지눌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로써 한국불교에 돈점논쟁이 불붙었으니, 송광사 삼일암의 정진은 훗날의 사자후를 챙김이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293호 / 2015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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