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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대진, ‘어락도’

기자명 조정육

“땀 흘려 일하는 자, 무엇을 해도 떳떳할지니”

▲ 대진, ‘어락도(漁樂圖)’부분, 두루마리, 명, 비단에 연한 색, 46×740cm, 프리어 갤러리.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는 마조도일의 제자다. 속성이 왕씨(王氏)인데 어릴 때 속세를 떠나 삼장(三藏)을 두루 공부했다. 마조선사가 교화를 펼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서당지장(西堂智藏,735~814)과 함께 입실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날아가는 오리 때문에 마조선사에게 코를 잡혔던 백장선사는 강서성 홍주의 대웅산(大雄山)에서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그 후 대웅산은 백장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백장선사, 선원청규 제정해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규정
자신도 힘든 노동 이어가며
‘일일부작 일일불식’ 실천

백장선사는 야호선(野狐禪)과 관련된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백장선사가 설법을 하면 늘 한 노인이 와서 법문을 듣고 대중과 함께 흩어졌다. 하루는 노인이 가지 않고 혼자 있었다. 선사가 물었다.

“서 있는 사람은 무엇 하는 사람인가?”

노인이 대답했다.

“저는 가섭불(迦葉佛) 때 이 산에 살았습니다. 그때 한 학인이 묻기를,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하기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대답하여 여우의 몸(野狐)을 받았습니다. 지금 스님께서 대신 이 몸을 바꿀만한 한 마디를 해 주십시오.”
“지금 물어라.”
“많이 수행한 사람은 인과에 떨어집니까?”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

노인은 말끝에 크게 깨닫고 선사에게 하직하면서 말했다.

“제가 이제는 여우 몸을 벗고 산 뒤에 있을 것입니다. 불법대로 화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사는 유나(維那)에게 종을 쳐서 점심 후 대중 운력으로 죽은 스님을 장사지내겠다고 알리게 했다. 선사는 대중을 거느리고 산 뒤 바위 아래로 가서 죽은 여우 한 마리를 지팡이로 휘저어 꺼내더니 법도대로 화장했다.

‘백장록(百丈錄)’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야호선이다. 야호(野狐)는 ‘여우’ 또는 ‘들 여우’를 뜻한다. 선을 수행한 사람이 아직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스스로 이미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한 것을 야호선이라 한다. 노인이 500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은 까닭은 불매인과(不昧因果)라고 해야 할 것을 불락인과(不落因果)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불매인과와 불락인과는 낙(落)자와 매(昧)자만 다를 뿐 나머지는 똑같다. 그런데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모든 것은 한 끗 차이다. 불락인과는 대오한 수행인은 인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부처님이 가르친 인과응보설을 부정한 것이다. 콩 심는 데 콩 나고 팥 심는 데 팥 나는 진리를 무시한 발언이다. 아무리 위대한 수행자라도 자기가 지은 선악의 과보는 피할 수 없다. 부처님도 피해갈 수 없다. 누구나 다 착한 행위를 하면 복을 받고 악한 행위를 하면 화를 받는다. 그러니 불락인과는 불법의 진리에 어긋난다. 반면 불매인과는 인과응보의 진리를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뜻이 된다. 백장선사의 한마디에 노인이 여우의 몸을 벗게 된 것도 정견(正見)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매인과는 정견이지만 불락인과는 사견(邪見)이다. 정견을 얻지 못한 사람이 마치 정견을 얻은 듯 선지식 행세를 했으니 그는 남을 속인 거나 다름없다. 이때부터 야호선은 아직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속이는 가짜 선을 지칭하게 되었다. 진짜와 가짜는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진짜가 가짜 같고 가짜가 진짜 같다. 예나 지금이나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백장선사가 굳이 야호선을 얘기한 이유는 진짜 같은 가짜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의 기본인 인과응보도 무시한 채 거드름 피우는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떤 진전이 있겠는가.

백장선사는 선원의 조직과 교단의 규정을 집대성한 ‘선원청규(禪苑淸規)’를 지었다. ‘선원청규’에 의하면 누구든지 선원의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 주지승이든 사미승이든 직급에 상관없이 모든 대중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 백장선사 자신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백장선사가 선원청규를 제정하기 전까지 수행자들은 전혀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다. 오로지 시주와 걸식에만 의존해 생계를 유지했다. 본래 인도에서는 수행자들이 농사짓는 것을 금했다. 땅을 갈고 곡괭이질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벌레를 죽이는 살생의 업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인도에서의 걸식 전통도 그대로 유입됐다. 그 전통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사람이 백장선사였다. 백장선사는 모든 승려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밭을 갈아 스스로의 힘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그것이 백장청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승려들이 거둬들인 수확량에 대해서는 세속인들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야말로 혁명적인 조치였다. 그 때문에 선종 승려들은 다른 보수적인 종파의 승려들에게 따가운 눈초리와 거듭되는 공격을 받아야 했다.

물소리. 바람소리. 투망 던지는 소리. 노 젓는 소리. 강가에 앉아 새참을 먹는 사람들 뒤로 고기잡이배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뒤섞인다. 그 소리는 무성하게 자란 수초를 뒤흔드는가 싶더니 정박해놓은 낡은 어선에 부딪친다. 장마가 끝난 뒤 물이 불었다. 불어난 물은 고기를 품는다. 어부들이 들어간 강물은 물 반 고기 반이다. 한동안 강에 들어가지 못해 속만 태웠던 어부들은 느긋한 심정으로 풍어를 즐긴다. 날마다 오늘 같으면 처자식 건사하기는 땅 짚고 헤엄치는 것만큼 쉬울 것 같다. 강이 베푼 풍요로운 선물에 모처럼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배를 탄 인물을 그린 그림은 어부도(漁父圖) 또는 주유도(舟遊圖)라 부른다. 어부도는 흔히 홀로 배를 탄 선비가 미늘 없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때를 기다리거나 시음(詩吟)에 취한 경우가 많다. 주유도는 기생을 대동한 선비들이 달빛을 감상하며 술잔을 부딪치는 예가 대표적이다. 모두 선비의 고상한 취미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상류층 문화의 반영이다. 말이 좋아 풍류지 가진 자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을 과시한 혐의가 짙다. 그런데 대진(戴進, 1388~1462)이 그린 ‘어락도(漁樂圖)’는 이런 고상한 문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강호한정(江湖閑情)이나 유유자적 대신 생계를 위한 절박함이 담겨 있다. 어부들은 찰랑거리는 물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대신 맨발로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 살생의 업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내 몸을 움직여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인 만큼 누가 뭐라 해도 꿀릴 것 없이 당당하고 떳떳하다. 힘든 만큼 뿌듯하다. ‘어락도’에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생계형 어부의 삶이 들어 있다. 몸을 움직여 먹거리를 구하고 움직인 만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정직한 노동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 수초와 나무를 그린 짧고 거친 필치는 생계형 어부들의 일상만큼이나 투박하다. 꾸밈이 없고 활달하다. 그래서 더욱 현장감이 생생하다.

대진의 자는 문진(文進), 호는 정암(靜庵)이다. 절강성(浙江省) 출신으로 궁정에 들어가 화원이 되었다. 그는 남송 원체화풍(院體畫風:남송 때의 화원인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에 의해 형성된 화풍으로 마하파(馬夏派)화풍이라고도 함)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어 절파(浙派)화풍의 시조가 되었다. 절파란 대진의 고향인 절강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부도는 중국의 강남 지방에서 많이 그린 전통적인 화제(畫題)였다. 대진을 비롯한 절파 화가들도 어부도를 즐겨 그렸다. 물이 많은 강남의 특수성 때문에 어부들의 삶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많이 본 만큼 생동감 넘치는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 대진은 ‘어락도’에, 양반이 데리고 온 기생의 비파소리 대신 투망을 던지는 남정네의 우렁찬 목소리를 담았다. 하루 종일 몸을 부려 밥벌이를 하는 사람은 안다. ‘몸에 한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을.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의 소중함을 안다. 남의 수고를 가로채거나 불로소득에 길들여진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숭고한 세계다.

백장선사가 자신이 정한 수행 규칙에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전해진다. 백장선사가 노년 때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백장선사는 제자들과 똑같이 일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제자들은 연로한 스승이 힘든 노동을 계속하는 것을 보고 건강이 상할까 염려되어 그만 둘 것을 권했다. 그러나 스승은 막무가내였다. 제자들은 하는 수 없이 호미와 곡괭이를 감추어버렸다. 연장이 없으면 노동을 안 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백장선사는 연장을 찾아 사방을 뒤지다 끝내 찾지 못하자 곡기를 끊었다. 제자들이 물었다.

“왜 식사를 안하십니까?”

백장 선사가 대답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이때부터 ‘일일부작 일일불식’은 선승의 수행 생활을 상징하는 글귀가 되었다. 노동을 생활화하면서 선종사찰은 시주자의 희사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종단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백장선사의 이런 혁신이 얼마나 앞서간 조치였는지는 무종(武宗)에 의한 폐불(廢佛, 845년) 때 여실히 증명되었다. 3무1종(三武一宗)폐불 중 세 번째에 해당되는 무종의 폐불은 네 차례의 법난 가운데 가장 심각하고 그 강도가 심했다. 무종의 연호가 회창(會昌)이어서 흔히 회창법난으로 불린다. 회창법난은 불교에 대한 도교의 배격이 직접적인 동기였지만 불교 자체 내에서도 그 원인이 잠재되어 있었다. 사원 경제가 비대해짐에 따라 국가 재정이 고갈되었고, 승려의 부패와 타락이 극에 달해 가짜 승려가 속출했다. 무종은 폐불을 단행하여 26만 명의 승려를 환속시켰고 4600개소의 사찰을 폐지시켰다.

회창법난을 기점으로 하여 그 전에 번성했던 많은 불교의 종파들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선종만은 회창법난 이후에도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즉 다른 종파의 승려들이 무위도식하며 민초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이라는 비난을 받는 데 반해 선종의 승려들은 달랐다. 신도들의 보시에 의존하는 대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참선하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실천으로 법난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든 당당할 수 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떳떳하다. 호미질을 하든 낚시질을 하든 자존감이 넘친다.

다시 야호선으로 돌아가 보자. 만참(晩參)법문 때 백장선사가 앞의 인연을 거론했더니, 황벽 스님이 대뜸 물었다.

“옛사람을 깨닫게 해주는 한마디를 잘못 대꾸하였기 때문에 여우 몸에 떨어졌습니다. 오늘 한 마디 한 마디 어긋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가까이 오게. 그대에게 말해주겠네.”황벽 스님이 앞으로 다가가자 백장선사가 황벽 스님의 따귀를 때리려 했다. 그런데 황벽 스님이 한 박자 빨랐다. 황벽 스님이 느닷없이 스승의 뺨을 쳤다. 그러자 백장선사가 박수를 치고 웃으며 말했다.

“오랑캐의 수염이 붉다 하려 했더니 여기도 붉은 수염 난 오랑캐가 있었구나.”

백장회해의 가르침은 황벽희운과, 위산영우(潙山靈祐)에게 전해졌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93호 / 2015년 5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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