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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초파일과 아이, 어른, 가족

기자명 함돈균

초등학생이 쓴 ‘학원가기 싫은 날’이라는 시가 ‘잔혹동시’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검색어 상위에 계속 오르내리고 있다. ‘학원가기 싫은 날’의 아이 심리가 ‘엄마를 죽이고 싶다’는 말로 표현된 것이 세상에 큰 충격을 준 모양이다. 시는 아이가 썼으나, 시를 둘러싼 논란은 ‘어른들’에 의해 촉발되고 파문을 확산시키는 이들도 어른들이다. 이 반응은 대체로 아이의 ‘정신 상태’, ‘언어폭력’ 수준에 대한 어른들의 격렬한 우려로 모아진다.

그런데 세간의 반응에만 집중한다면 내게는 놀라운 점이 없지 않다. 건강한 사회였다면 이런 우려에 앞서 아이에게 이런 시를 쓰게 만든 사회의 병적 상태에 대한 반성이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집은 ‘저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폐기되었고, 이 논란이 사회 반성을 위한 진지한 모색의 계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예민한 언어감각을 지닌 ‘아이 시인’은 어른들에 의해 ‘왕따’ 되는 것으로 사태가 정리되었다. 병든 사회가 병들었다고 병든 언어로 그것을 표현한 아이가 병들었나, 아니면 병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그 비명을 방조하며 오히려 아이의 ‘정신상태’를 제멋대로 감별하는 어른들의 사회가 병들었나.
요즘 한국사회에서 내가 혀를 차는 풍경에는, 아이들과 젊은 세대를 아껴주어야 할 ‘어른 세대’에서, 아래 세대를 향한 사랑과 아량, 선배 시민으로서의 현명함이 실종되었다는 사실도 있다. 자기 세대보다 월등한 스펙과 능력을 갖추었지만 이미 직업적 안정성을 갖춘 선배 세대는 정작 후배 세대를 임시직과 알바로만 채용한다. 정식적인 ‘을’의 지위조차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세대 착취’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노년 세대는 국민연금의 자기 수혜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젊은 세대의 연금고갈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며, 공공적인 차원에서 표출되는 젊은 세대의 정치적 선택은 기를 쓰고 좌절시키는 옹졸한 세대로 비치고 있다. 자기 세대의 지하철 무임승차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밥 먹는 문제에는 역정을 내는 이기적인 세대처럼 비치고 있다. 현실정치가 ‘부패한 노인들’에 의해 장악되고 분탕질 되는 상황이 지속되자, 광화문광장에는 애 잃어 슬픔에 빠진 젊은 엄마·아빠들을 ‘어버이’라는 이름으로 윽박지르는 몰상식한 노인들이 쏟아져 나와 성난 표정으로 기세가 등등하다.

세월호 1주기 주간에 대통령은 서울 중심가를 계엄령이 내린 군사통치 시절 같은 풍경으로 만들어 놓고는 해외출장을 떠났다. 돌아와서 청와대가 내놓은 공식적 논평은 ‘위로’나 ‘사과’가 아니라 대통령이 ‘과로에 의한 만성피로’에 걸렸다는 뜬금없는 발표였다. 서열을 중시했던 옛날 유교사회는 ‘어른 공경’과 ‘충효’를 최우선의 사회적 가치로 규정했다. 그 사회가 국운이 다해갈 무렵 동학을 창시했던 수운 최제우는, 전통사회에서 무시당하던 힘없는 아이와 여자들을 최우선의 보호대상으로 선포했다. 그에게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남자)어른·노인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유마경(維摩經)’에서 문병 간 문수보살이 유마에게 병에 대해 묻자, 유마는 “본래 병이 없지만 세상 사람들이 앓고 있으니 자기도 병들어 아플 수밖에 없다”고 대답한다. 문수가 유마의 가족들의 소재를 묻자 유마는 “지혜가 아버지이고, 방편이 어머니”라고 대답한다.

사월초파일은 ‘가정의 달’ ‘감사의 달’이라고 하는 5월 즈음인 동시에, 이제는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시기와도 겹치게 되었다. 그러나 부처님도 예수님도 동학도 비슷한 걸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출가(出家)’의 눈, ‘하늘님’ 같은 우주적 어버이 눈으로 보면, 세상의 고통과 슬픔은 좁은 울타리의 혈연을 넘어서 인간이라는 동류의 ‘가족’이 공유하는 ‘내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husaing@naver.com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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