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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남매 남기고 먼저 떠난 남편…돌아보니 내 잘못이었다

기자명 법보신문

중앙신도회장상-안순심

▲ 일러스트=강병호 화백

언제부터인지 경전을 펼치면 그윽한 더덕 향기가 내 몸을 감싼다. 몰라보게 건강이 좋아진 것이다. 올해 나이 87세. 어느 때 부처님께서 부르실지 몰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한다.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
교회 다니던 중 불연 만나기도

남편 사별 후 생계·육아 막막
불교 서적 탐독하며 공부·수행
“가장의 무게 얼마나 힘들었나”
모든 고통 내 잘못임을 깨달아

수계 때마다 ‘천진화’ 법명 받아
진실된 수행으로 꽃피우길 발원
매일 염불·사경으로 행복 만나

“씨를 뿌리기는 쉬우나 열매를 맺기 어렵고 고민을 할 수는 있으나 해답을 얻기가 쉽지 않고 뜻을 세웠으나 이루기가 힘들도다.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아나 이렇게 뼈아프게 부대낌은 태어난 자의 도리가 아닐지….”

누가 쓴 글귀인지도 모를 이 구절을 책갈피에 적어 두고 매일 아침 가장 먼저 펼쳐본다. 뜻을 세웠으니 이룰 때까지 정진하리라. 이 길이 나의 가장 행복한 길이기에….

책을 좋아하는 나는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과 ‘서장(書狀)’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등을 2~3번 읽어봐도 아직 그 깊은 오묘함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한때는 서점에서 만난 ‘무소유’라는 작은 책의 제목에 끌려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다시 그 서점에 들러 법정이란 작가의 책은 모조리 사다 읽었고 작가가 스님이란 사실도 처음 알았다. 그 후 스님의 신간이 나오면 어김없이 사다 읽었다. 부처님 말씀이 담긴 책을 탐독하기 시작하면서 불교 공부에 눈을 떴다. 송광사든 동국대학교든 학술세미나가 열린다는 소식만 있으면 가서 들었다. 배움의 기쁨은 마치 찬란한 햇살이 축복이라도 한 듯 싶었다.

부모님은 어느 산골에 교회를 세울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나도 한때 교회를 다녔으나 종종 불교와의 인연이 닿았다. 어느 날에는 꿈을 꿨다. 폭풍이 부는 가운데 꿈속의 나는 가시덤불에 얼굴을 할퀴고 옷이 찢기는 고통을 참으며 태백산 정상에 올라 무릎 꿇고 부처님께 “제자로 받아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때는 교회를 다닐 때여서 이상하다 하며 넘겼으나, 지금 생각하면 그런 아픔을 다 겪은 후에 부처님께 오라는 계시가 아니었을까 싶다.

30여년 전엔 갑자기 얼굴 반쪽이 송곳으로 쑤시는 듯 아파서 정밀검사를 받았지만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병명을 모르니 약도 없었다. 불현듯 기도를 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오로지 지장보살만 염하면서 살려달라고 했다. 일주일 기도를 회향하는 밤 꿈에 누군가 내 손바닥에 진주알 같은 하얀 약 1알을 주면서 “이 약을 먹으면 낫는다”고 했다. “당신은 누구요”하니 “나는 지장보살이다”하면서 약이 있는 내 손을 내입에 갖다 대니 약이 목에 걸려서 꿀꺽 삼키다 꿈을 깼다. 그 후 감쪽같이 통증은 사라지고 지금까지도 아무 이상이 없다. 나는 굳게 믿는다. 지장보살님의 가피라고. 그때가 1988년이나 1989년이었다.

언젠가는 문득 도솔암에 가야겠다는 일념으로 집을 나섰다. 하늘은 흐렸다. 막차를 타 밤늦게 도착했다. 돌계단을 단숨에 올라 법당에 엎드리자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보잘 것 없는 나를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보니 남편에게도 이웃에게도 못할 짓만 하는 하찮은 존재였다. 하염없이 절을 하고 참회하는데 눈물과 콧물에 방석은 흠뻑 젖었다. 갑자기 법당 안이 환해졌다. 오직 촛불만 켜져 있을 뿐인데 빛이 넘치고 그 빛으로 인해 다른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지장보살님과 나만이 허공에 둥 떠있었다.

“지장보살 지장보살” 하는 정근소리만 들리고 새벽이 밝아오는지도 모르고 절만 하고 있었다. 그때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두 손을 모으고 서 계셨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정갈했고 근엄하면서도 자애로웠다. 자혜 스님과의 첫 인연이었다. 지금 충남 청양에서 ‘대한불교조계종 포란사’ 현판 아래 여법하게 수행정진하고 계신다. 나는 자혜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지금까지 20여년간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지금은 세연을 접은 내 남편은 새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은 대 자유인이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가장이라는 굴레를 씌우고 가정을 책임지라고 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는 몇 차례 가출 끝에 한번은 논도 팔고 집도 팔아 나간 뒤 1년 넘게 소식이 끊어졌다. 그때는 내가 얼마나 잘못 살았는지 모르고 남편만 원망했다. 끝내 그는 17년간의 병고 끝에 육남매와 빚만 내게 남겨주고 결혼 27년만에 먼저 세상을 떠나갔다. 고향선산에 안장했으나 6년 전 음력 윤오월에 한문 ‘법화경’ 사경으로 수의를 입혀드리고 화장해 광명진언을 염송하며 묘 주변에 뿌려 보내드렸다.

남편을 보내고 육남매와 함께 남은 나는 참으로 막막했었다. “이제 빈손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때 ‘무소유’ 책 제목이 내 눈앞에 떠올랐다. 바로 이것이다.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잘난 척했던 마음도 내려놓고 내가 죄인이요 하고 참회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먼저 간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탓이었다. 부처님 모든 잘못을 참회하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절집을 열심히 드나들기 시작했다. 조계사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법명이 천진화(天眞華)였다. 순천 송광사에서도 보살계를 받았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어내니 똑같은 천진화다. 신기해서 그 다음은 태안사의 보살계를 받았다. 역시 글자하나 다르지 않다. 이번에는 수덕사로 갔다. 거기서는 천진행(天眞行). 끝 자만 달랐다. 내 이름은 천진화다. 법명대로 참되고 진실하게 수행하여 꽃피우리라.

나는 매일 새벽 세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향을 사른다. 이어 ‘신묘장구대다라니’ 21독과 ‘광명진언’을 108독하고 이어 두 시간은 한문 ‘법화경’ 사경을 한다. 쓰기 좋게 한지를 6등분하고 한 장을 시작할 때마다 삼배를 올리고 있다. 첫 번째 일배는 나를 사랑하고 지켜주시는 모든 불보살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두 번째 일배는 돌아가신 부모형제와 조상의 영가, 그리고 온 법계의 일체영가들이 부처님의 가호로 다 함께 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기원하는 마음이다. 마지막 일배는 내 스스로가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삶이 되도록 다짐하고 있다.

새벽수행이 끝나면 아침 준비를 마치고 여덟시 전에 집을 나선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거리의 버스와 지하철 속은 나만의 법당이 된다. 경전을 읽거나 암송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도량이 없다. 한때는 절이나 염불 수행을 하며 나도 모르게 숫자놀음에 빠지기도 했다. 절 1만배를, 다라니 10만독을 해 냈다는 상을 내며 숫자의 노예로 전락해버린 모습은 참으로 슬프기 그지없었다. 이런 자책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제는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하리라, 올곧게 수행하리라”는 맹세와 함께 사경공부도 시작했다.

서툴기는 해도 바른 마음, 바른 자세로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리라. 이 같은 발원으로 법화정사 도림 스님께 사경법을 배워 수행한지 20여 년이 지났다. 도림 스님 은혜를 갚을 길은 사경도반을 찾아 권선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100명의 도반을 만나리라 원을 세우고 한글 ‘법화경’ 책 한권과 노트 세권, 붓펜 세 자루씩을 가지고 찾아가 사경공부를 권했다. 그렇게 한발한발 부처님께 다가가며 85명의 도반을 만났을 무렵, 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또 한번의 고난에 맞닥뜨렸다.

2006년 2월12일(음력 정월보름날, 동안거 해제일) 밤 9시경으로 기억한다. 새벽에 절에 간다고 두꺼운 옷과 모자를 쓴 덕에 머리와 허리는 안전한데, 고관절이 깨지고 다리가 세토막이 되어서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것으로 모두들 생각했다. 지금은 비록 지팡이에 의지하여 절룩거리기는 해도 도량을 거닐 수도 있고, 방에 앉아서 다리는 뻗고 있어도 사경할 수 있는 팔이 멀쩡하고 머리가 멀쩡해서 일자일배하며 최선을 다해 사경하고 있다. 내일을 약속할 수 없는 몸이고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기에 더 정성을 들인다.

나는 지금 113명의 도반과 함께 사경을 하고 있다. 그 도반들이 한사람씩만 권선해도 이 땅은 불국토가 될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숫자를 세는 버릇도 없어졌고 지금은 발을 뻗고 쓸 수밖에 없지만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더 청정하다. 지난해에는 언제 부처님께서 부르실지 몰라 오신채를 금하고 일자일배(一字一拜)로 한문 ‘법화경’ 한질을 완성했다.

언젠가 8월, 사경한 노트를 봉안하기 위해 제주도에 갔다. 신도들이 만명 넘게 모였으니 더운 날씨에 물이 부족해 목욕은 물론이고 화장실도 모자라 고생을 했다. 나는 불만을 토하며 도반들과 함께 약천사로 갔다. 주지 스님(당시 혜인 스님)의 허락 아래 목욕도 하고 잠도 자고 아침 공양까지 했다. 절집 인심이 이렇게 넉넉하고 포근했다. 정말 좋았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 제주공항에서 갑자기 토사곽란이 일어나 오물까지 넘어오니 죽을 지경이 됐다. 도반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김포에 도착했다.

병원으로 가자는 권유를 마다하고 나는 곧바로 집으로 와서 밤새 도림 스님께 참회기도를 했다. 이튿날 서교동의 법화정사로 스님을 찾아뵙고 “용서해주십시오. 스님의 고충은 헤아리지 않고 불평만 했으니 벌을 받았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하고 삼배를 올렸다. 얘기를 다 듣고 스님께서는 “벌 받은 것이 아니라 업장소멸했구먼”하신다. 씻은 듯이 고통은 사라지고 마음마저 가벼웠다.

함께 기도하러 다니는 박보살은 악성빈혈로 여러 병원을 전전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나는 사경책 일체를 준비하여 그 댁을 찾아 사경할 것을 권하면서 나도 함께 사경하면서 기도하자고 약속했다.

어느날 꿈에 박보살집에 갔는데 아무도 없어서 돌아서려는 순간 마당에 손바닥만한 껌딱지가 새까맣게 붙어있었다. 삽을 찾아 떼어서 멀리 던지고 그 자리는 물로 씻으니 깨끗했다. 그래서 “좋다” 소리치다 꿈을 깼다. 박보살에게 꿈 얘기를 하며 감사기도를 입재하고 밤에는 ‘법화경’ 사경을 하도록 권했다. 얼마 뒤 박보살이 병 증세가 없어졌다며 고맙다고 보약 한 재를 지어왔다. 의사도 기적이라 했단다. 나는 기적이 아니라 분명 부처님이 감응하셨다고 했다. 그 후 박보살은 건강이 더 좋아졌고 어려운 곳을 찾아다니며 봉사하고 있다.

15년 전부터 나는 도수 있는 안경을 벗고 맨눈으로 사경하고 책을 읽는다. 약품설명서의 깨알 같은 글씨도 읽을 수 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아직 나에게는 큰 숙제가 남았다. 내게 사경을 위한 한지 천장을 6등분해 보내주신 대의행 보살님이 준 숙제다. 정성을 다 해 회향할 때까지는 나는 결코 죽을 수도 없다. 이 숙제를 회항하면 웃으면서 갈 수 있겠지.

나라고 어찌 산이 무너지는 듯한 회한이 왜 없었겠는가. 이 고통 이 슬픔 선연이든 악연이든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생에서 해탈하게 해달라고 용서를 빌며 자비도량참법을 사경하고 있다. 지금 나는 건강하게 사경 잘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참 복이 많다.

[1295호 / 2015년 5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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