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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범관, ‘계산행려도’

기자명 조정육

한 뿌리서 났다고 어찌 향기까지 같을 수 있으랴

▲ 범관, ‘계산행려도’, 북송, 비단에 먹, 206.3×103.3cm, 대북고궁박물원.

드디어 임제다. 그동안 불교 공부를 하면서 의문 나고 미심쩍었던 부분을 일시에 제거해 준 나의 위패스승이다. 아니다. 임제선사가 아니다. 종광 스님이다. 임제선사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해 시무룩한 나를 위해 종광 스님은 친절하게 해설해줬다. 유치원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쉽고 정확한 해설이었다. 종광스님이 강설한 『임제록(臨濟錄)』이란 책을 통해 나는 임제선사의 의발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임제록』은 임제의 법문과 말씀을 정리한 어록이다. 전달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꼈다. 임제는 자비로운 짚신선사 수월스님과 함께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이다.

황벽 밑에서 공부하던 임제
몽둥이에도 깨닫지 못했지만
대우선사 만나 비로소 대오

북방산수화 대표 화가 범관
형호 등 대가 그림서 배웠어도
자신만의 작품세계 열어나가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선사는 조주(曹州) 남화(南華) 출신으로 속성은 형씨(邢氏)다. 조주 선사의 속성이 조씨가 아니라 학씨인 것처럼 임제선사도 임씨가 아니라 형씨다. 하북성(河北省) 진주(鎭州)에 임제원(臨濟院)이라는 선원에 머물렀기 때문에 임제선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임제선사는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출가 후 교종의 경론과 율장을 연구했으나 ‘이것은 세간을 구제하는 의사의 처방이요 교외별전의 종지는 아니다’라고 생각해 황벽선사를 만나 수행정진하게 되었다. 황벽선사의 인가를 받고 임제원에서 임제종을 열어 선풍(禪風)을 진작시켰다.

『임제록』에는 임제선사가 황벽선사를 만나 인가를 받는 과정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임제는 황벽선사의 회상에서 3년을 공부했으나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머리가 나쁘거나 건성으로 공부해서가 아니었다. 때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공부하는 모습은 ‘행업(行業)이 순일(純一)’했다고 적혀 있다. 순일은 다른 것과 섞임이 없이 순수하다는 뜻이다. 수행정진하는 임제의 모습이 눈에 잡히듯 선하다.

하루는 임제가 황벽선사의 처소에 가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확실한 뜻입니까?” 황벽선사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몽둥이로 후려쳤다. 이와 같이 세 번을 찾아가서 세 번을 물었는데 그때마다 때리기만 할 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불법은 말로 가르쳐 주거나 글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악 회양 선사가 육조 혜능에게 대답했듯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런 형체가 없으나 홀로 밝은 이것. 이것은 스스로가 느끼고 깨우쳐야 한다. 황벽선사의 몽둥이는 그런 가르침이었다.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임제는 스승의 지도를 받기에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떠나기 위해 하직인사를 하러 갔다. 황벽선사가 말했다. “너는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고안(高安) 여울목에 있는 대우(大愚)스님을 찾아가도록 하라. 반드시 너를 위해 말씀을 해주실 것이다.”

임제가 대우선사를 찾아갔다. 대우선사가 물었다. “어디에서 왔느냐?” “황벽스님의 처소에서 왔습니다.” “황벽스님은 어떤 말을 하시던가?” “제가 세 번이나 불법의 대의를 물었다가 세 번을 얻어맞았습니다. 저에게 어떤 허물이 있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황벽이 너를 위해 노파심으로 정성을 다해 가르쳐 주었건만, 너는 나에게까지 와서 허물이 있는 지 없는 지 묻는가?” 임제가 이 한 마디에 크게 깨달았다. 익을 대로 익은 감이 대우선사의 한 마디에 꼭지에서 떨어졌다. 깨달은 임제가 고백했다. “아, 원래 황벽스님의 불법이 이런 것이었군요.” 그러자 대우선사가 임제의 멱살을 움켜쥐며 말했다. “이 오줌싸개같은 놈아. 조금 전에는 허물이 있느니 없느니 따지더니 이제는 도리어 황벽스님의 불법이 이런 것이라니. 너는 도대체 무슨 도리를 보았느냐?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해.” 대우선사가 다그치듯이 임제를 몰아부쳤다. 분별심을 내기 전 무심의 경지를 묻고 있었다. 임제의 공부를 확인하기 위한 노파심이었다. 그러자 임제선사가 대우선사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세 번 쥐어박았다. 대우선사가 움켜쥐었던 손을 놓고 밀치면서 말했다. “너의 스승은 황벽스님이지 내가 간섭할 바가 아니다.”

뒷날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선사가 제자인 앙산혜적(仰山慧寂, 803-887)에게 물었다. “임제는 그때 대우 선사의 힘을 얻었는가, 황벽 스님의 힘을 얻었는가.”“호랑이의 머리에 올라탔을 뿐 아니라, 호랑이의 꼬리도 붙잡았습니다.” 임제선사가 두 스승의 법을 모두 이었으며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체득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멋지게 표현할 수 있는 위산영우와 앙산혜적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위앙종(潙仰宗)을 세운 고승들이다.

대우선사의 가르침으로 호랑이의 머리에 올라 탄 임제선사는 오랫동안 황벽 선사의 회상에서 깨우친 바를 보임(保任)했다. 보임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 ‘찾은 본성을 잘 보호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임제선사가 법을 펼치기 위해 떠날 때가 되었다. 황벽선사가 시자를 불러 백장 선사가 물려준 선판과 책상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자 임제선사가 말했다. “시자여, 불 좀 가져 오시게.” 태워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이미 깨달음을 얻어 우뚝 섰으니 이런 증표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의미였다. 깨달은 자의 기개가 대단하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황벽 선사가 말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그냥 가져가거라. 나중에 앉은 자리에서 천하 모든 사람들의 입을 막게 될 것이다.” 스승은 제자를 인정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속인들이 증표를 요구할 수도 있음을 염려한 배려다. 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함을 알 수 있다.

임제선사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으로 요약할 수 있다. 어느 곳에 서든지 주인공이 된다면 서 있는 곳에서 진리의 세계가 된다는 뜻이다. 주인이란 무엇인가. 내가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명확히 아는 것이다. 이것이 참되고 올바른 견해(眞正見解)다. 다른 것은 없다. 사람들은 자신이 부처인데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구하려 한다. 이것은 자기 머리를 두고 또 다시 머리를 찾는 것과 같다. 머리는 밖에서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 된다. “참된 부처(眞佛)는 형상(形)이 없고 참된 도(眞道)는 실체(體)가 없으며 참된 법(眞法)은 모양(相)이 없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 밖에서 찾지 말라, 고 하면 이번에는 좌선하고 앉아 안에서 찾으려고 한다. 분별과 집착을 끊어내기가 이렇게 힘들다. 이렇게 망망(忙忙)한 업식의 바다에서 헤매는 사람을 우리는 중생이라고 한다.

임제선사가 달마탑에 가서 절하지 않자 주지가 한소리 했다. “부처님과 조사와 무슨 원수라도 됩니까?” 부처와 조사는 참배의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이뤄야할 경지다. 이뤄내는 대신 부처를 구하면 부처를 잃는다. 도를 구하면 도를 읽고 조사를 구하면 조사를 잃는다. 그는 절대적인 관념이나 대상의 권위에 사로잡힌 수행자들에게 자신이 무위진인(無位眞人)임을 알라고 말한다. 무위진인은 분별을 뛰어넘은 본래의 모습이고 참사람이다. 우리가 바로 부처이고 무위진인임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은 꿈과 허깨비 같은 이 몸뚱이를 잘못 알지 말라. 머지 않아 무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대들은 이 세계 속에서 무엇을 찾아 해탈하려고 하는가. 그저 한 술 밥을 찾아먹고 옷을 기워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지식을 찾아 배우는 일이다. 꾸물거리며 쾌락이나 좋아 지내지 마라. 시간을 아껴야 한다. 생각은 덧없이 흘러가서 거칠게는 지수화풍으로 흩어지고 미세하게는 생주이멸 사상에 쫓기고 있다. 수행자들이여!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모양이나 형상이 없는 네 가지 경계를 깨달아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임제의 할(喝)은 덕산의 방(棒)과 함께 조사선의 주요한 가르침으로 유명하다. 할과 방은 편견에 사로잡힌 제자를 가르치기 위한 방편이다. 깨달은 이가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교육방법이다. 그 깊은 의미도 모르고 흉내 내는 사람의 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 하는 사람에 대해 임제선사는 “똥덩어리를 집어 입속에 넣었다가 다시 뱉어서 다른 사람에게 먹여주는 것과 같다.”고 독설을 퍼붓는다. 가르치는 사람이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가르침이다.

산수화는 이런 것이다. 범관(范寬, 약967-약1027)의 「계산행려도(溪山行旅圖)」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거대한 산은 화면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산꼭대기에만 수목이 덮인 바위산은 아랫부분이 안개 속에 잠겼다. 전경과 후경을 분리시키고 거리감을 표시하기 위한 장치다. 산이 맞닿는 부분에서는 하얀 폭포수가 깊게 떨어진다. 그 모습이 마치 가느다란 실을 늘어뜨린 것 같다. 산의 높이를 가늠할 수 있다. 장관이다. 산이 높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치는 또 있다. 개미처럼 작게 표현된 인물이다. 전경의 바위 사이로 세찬 계곡물이 흐르고 계곡 오른편에서 움직이는 물체가 등장한다. 등에 짐을 실은 네 마리 나귀를 앞뒤에서 재촉하는 인물들이다. 굳세고 웅장한 산에 비해 사람과 짐승이 어찌나 작던지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인물 때문에 이 그림의 제목이 ‘계산행려(溪山行旅)’가 되었다. 아무리 멋있는 계곡과 산(溪山)이 있다한들 그 곳에 사람(行旅)이 없다면 의미가 없다. 내가 없으면 세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작지만 사람을 그린 이유다. 이 모든 것이 북방산수화의 특징이다.

「계산행려도」는 북방산수화를 대변하는 작품이다. 울창한 나무와 우뚝 솟은 바위. 짙은 묵색에 의한 강한 흑백대비. 촘촘한 붓질로 점을 찍은 듯 날카로운 질감을 표현한 우점준(雨點皴)의 바위 등에 의해 산은 깊고 요원하다. 곽약허(郭若虛,11세기 후반 활동)의 『도화견문지(圖畫見聞志)』에는 범관의 그림에 대해 ‘마치 눈앞에 실제 풍경이 나열되어 있는 듯한데, 뾰족한 봉우리가 크고 넉넉하며 기운이 웅장하고 빼어나며 필력이 노련하고 굳세다’고 적혀 있다. 또한 ‘산봉우리가 크고 넉넉하며, 기세와 형상이 우람하고 굳세다.’고 평가했다. 미불(米芾, 1051-1107)은 『화사(畵史)』에서 ‘범관의 산수화는 높고 험준한 모습이 항산(恒山)과 대산(岱山) 같으며, 멀리 있는 산은 정면을 향한 것이 많고 꺾이고 떨어짐이 기세가 있다’고 극찬했다. 「계산행려도」를 보면 그 평가가 이해된다.

동양화는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사군자화, 영모화, 계화 등의 화목(畵目)으로 분류할 수 있다. 중국에서 산수화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265-581) 시대에 출현했다. 한대(漢代, 기원전 206-기원후 219)까지는 감계적(鑑戒的)인 성격의 인물화가 많이 그려졌는데 그 경향은 당대(唐代, 618-907)까지도 지속되었다. 인물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던 산수화는 오대(五代, 907-960)와 북송(北宋,960-1127)을 거치면서 다른 화목을 제치고 회화의 대표적인 장르가 되었다. 이후 청대(淸代) 중기에 화조화에 자리를 내주기까지 900년 동안은 산수화의 시대였다. 당이 망하고 송이 들어서기 전까지의 기간을 오대라 부르는데 60여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이었으나 대부분 무인(武人)이 통치했고 정권 교체가 잦았다. 사람목숨도 부지하기 힘든 상황에서 인물화나 화조화가 그려질 리 만무했다. 그런데 유독 산수화만이 발달했다. 산수화의 등장은 선비(士人)의 은둔과 관련이 깊다. 국가가 위험에 처하거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많은 문인 학자들이 산림에 은둔했다. 그들은 관직을 버리고 깊은 산림에 은거하면서 마음을 다스렸고 그 마음을 산수의 아름다움에 빗대어 화폭에 담았다. 산수는 도(道)를 얻을 수 있는 장소로 여겨지면서 산수화가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말송초(唐末宋初)에 독특한 화풍의 산수화가 발전하게 된 계기도 전쟁과 살육이 난무하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북방산수화를 대표하는 형호(荊浩), 이성(李成), 관동(關同), 범관 등이 모두 오대말 송초에 살았던 은사였다. 특히 이성과 범관의 화풍은 송대에 가장 많이 유행했다.

범관은 형호와 이성 등 대가의 그림에서 많이 배웠다. 그러나 “사람을 배우는 것은 자연을 배우는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가들의 작품 대신 대자연을 배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마음을 스승으로 삼았다. 그는 지금까지 배운 전통의 기초 위에 ‘밖으로 자연을 스승으로 삼고, 안으로는 마음의 근원에서 터득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열어나갔다. 그의 작품이 형호와 이성을 넘어 범관만의 작품이 된 이유다.

육조 혜능부터 임제 의현까지 선종을 대표하는 선사들을 살펴보면 가끔씩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마조 도일, 백장 회해, 황벽 희운, 조주 종심, 임제 의현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시대도 다르고 이들이 교화를 펼친 방법론과 개성도 제각각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치 한 사람의 배우가 매번 다른 옷을 입고 나온 것 같은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다르되 가르침의 핵심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자를 가르치는 교육방식은 다르지만 그 근저에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선종의 핵심 사상이 흐르고 있다.

형호와 이성, 관동과 범관은 모두 북방산수화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다. 그들의 산수화에는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양식이 있다. 웅장하고 험준한 산세, 장송(長松)과 거목(巨木), 높은 산(高山)과 폭포 등이다. 남방산수화와는 다른 북방산수화만의 특징이다. 한 눈에 봐도 북방산수화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징표다. 이런 특징은 형호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고 범관의 작품에서도 똑같이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형호의 작품과 범관의 작품이 같은가? 전혀 다르다. 이성의 작품도 범관의 작품과 같지 않다. 마조 도일이 백장 회해와 다르고 조주 종심이 임제 의현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한 뿌리에서 났으되 전혀 다른 꽃을 피운 꽃과 같다. 스승과 같아지는 것을 추구하는 대신 스승을 뛰어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우를 범하지 않고 달을 볼 줄 알았다. 그림에서도 선종에서도 기라성 같은 거장들의 출현이다. 기라성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이라는 뜻이다.

정상좌가 임제선사를 찾아와 인사를 하고 물었다.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동안 여러 선사들의 행적을 들여다보면서 이 문구를 여러 차례 들었다. 새삼스럽거나 특별하지 않다는 얘기다. 오히려 식상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질문을 하는 개개인에게는 일생을 걸만큼 중요하고 절실하다. 정상좌도 마찬가지였다. 정상좌의 간절한 눈빛을 본 임제선사가 법상에서 내려왔다. 그러더니 대뜸 정상좌의 멱살을 움켜쥐고 한 대 후려갈겼다. ‘데자뷰’를 느끼지 않는가. 임제선사가 황벽선사한테 당한 그대로다. 정상좌가 멍하여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옆에 있던 스님이 말했다. “정상좌여! 어째서 절을 올리지 않습니까?” 정상좌가 절을 하다가 문득 크게 깨달았다. 깨닫지 못했을 때는 당한 것인데 깨닫고 나면 배운 것이다. 임제선사가 스승한테 당한 대로 분풀이를 한 것이 아니다. 최고의 교육방법으로 가르친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선지식을 만나면 정상좌처럼 물어야 한다. “불법의 대의가 무엇입니까?” 혹여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몽둥이가 날아온다면 우리 또한 정상좌처럼 절을 올릴 것이다. 혹시 아는가. 우리도 정상좌처럼 몰록 깨닫게 될지. 오랫동안 의문을 갖고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기왓장 부딪치는 소리에깨닫게 되고 대나무가 흔들리는 소리에 깨닫게 되고 빗자루질하는 소리에 깨닫게 된다. 그래도 모르면? 스승이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한 번 맞아도 모르면 두 번 세 번 맞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가르쳐줬는데 모른다니. 맞아도 싸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98호 / 2015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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