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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마원, ‘매석계부도’

기자명 조정육

“밖에서 구하지 말고 스스로를 제도하라”

▲ 마원, ‘매석계부도’, 송, 비단에 연한 색, 26.7×28.6cm, 북경고궁박물원.

민왕(閩王)이 물었다.

“짐은 지금 절을 짓고 복을 닦으며 보시를 하고 스님들을 출가케 하여 모든 악업을 짓지 않고 선행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계속해 나간다면 성불할 수 있겠습니까?”

선종 황금기에 활동한 설봉
17세에 출가해 만행을 하다
암두선사 만나 깨우침 얻어
‘시십마’ 화두로 진리 전해

달마대사를 만난 양무제가 했던 질문과 비슷한 내용이다. 설봉의존선사(雪峰義存, 822-908)가 대답했다.

“성불할 수 없습니다. 한다고 하는 생각이 있는 마음(有作之心)은 모두 윤회하는 것입니다.”
“조사와 부처님이 나온 뒤로는 어떤 인과를 닦아야 성불 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만 성불합니다.”
“무엇을 성품을 보는 것이라 합니까?”
“자기 본성을 보는 것입니다.”
“모양이 있습니까?”
“자기 본성을 보는 것은 어떤 물건으로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믿기 어려운 법이며 수많은 부처가 똑같이 얻은 법입니다.”“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만약 이 일을 드러내려 한다면 온 누리를 다 들어(盡大地) 설명한다 해도 다 설할 수 없습니다.”

설봉선사는 청원(靑原)의 문하로 선종의 황금기인 당말(唐末) 오대(五代)에 활동했다. 앞에서 몇 차례 언급했다시피 6조 혜능의 가르침은 남악회양과 청원행사의 양대 산맥을 통해 전해졌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마조, 백장, 황벽, 임제 등이 모두 남악계였다. 청원계는 설봉이 처음이다. 청원계에 인물이 없어서가 아니다. 제한된 지면에 소개를 하다 보니 억울하게 청원계가 소외되었다. 청원계의 흐름을 살펴보면 이쪽 문중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원계에서는 석두희천(石頭希遷,700-791)-약산유엄(藥山惟儼,745-828)-운암담성(雲巖曇晟,782-891)-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조산본적(曹山本寂,840-901) 등이 배출되었다. 석두계에서는 다시 천황도오(天皇道悟,748-807)-용담숭신(龍潭崇信,?-?)-덕산선감(德山宣鑑,782-865)-설봉의존-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이 선풍을 일으켰고, 설봉계는 현사사비(玄沙師備, 837-908)-나한계침(羅漢桂琛,867-928)-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으로 계승되었다. 드러나지 않는다하여 도력이 낮은 것이 아니듯 연재에 포함되지 않았다 하여 결코 그 중요성이 약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설봉과 다음에 살펴볼 운문문언을 통해 청원계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설봉선사의 속성은 증씨(曾氏)로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17세에 사미계를 받고 수행하다 회창파불(會昌破佛)때는 변복을 하고 여러 고을을 만행했다. 동산(洞山) 선사의 회상에 있다가 다시 덕산(德山)의 문하에 들어갔다. 덕산선사를 만나 가르침을 청하자 “우리 종문에는 말 이전 것이 없으며 다른 사람에게 줄 그 어떤 법도 없다”는 말을 듣고 ‘물통 밑바닥이 쑥 내려가는 느낌’을 얻었다. 그러나 설봉선사를 진심으로 깨우치게 한 사람은 도반인 암두전활(巖頭全奯,828-887)이었다. 암두선사는 설봉이 공부하면서 부딪치는 경계를 하나하나 점검해주면서 그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함께 공부하는 도반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려주는 대목이다.

설봉선사는 “하늘땅이 모조리 해탈문인데 그 안에 들어가려고는 하지 않고 오직 뒷구석에 남아 어지럽게 날뛸 줄만 아는” 수행자들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렇게 날뛰다 누구라도 만나면 ‘어느 것이 나요?’라고 물으니 이는 부끄러운 일이고 스스로가 굴욕을 자초하는 일이다. 그런 까닭에 ‘큰 강물 옆에서 목말라 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고 밥통 옆에서 배고파하는 사람이 항하사 모래알처럼 많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로 깨달아 들어가는 길에 곧장 들어가야 한다. 헛되게 세월만 보내서는 안된다. 또한 옆집의 사기꾼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여러 곳 총림의 노스님들에게서 얻으려 하지도 말아야 한다. 모름지기 자기 스스로 살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깨치지 못하면 만리 천생을 지나도 역시 깨치지 못한다. 깨우치는 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목마를 때 옆에 있는 강물을 마시면 되고 배고플 때 눈앞에 있는 밥통의 밥을 먹으면 된다. 물과 밥을 찾아 멀리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이 바로 해탈문에 들어가는 것이다.

조주선사가 ‘무(無)’자 화두를 던졌다면 설봉선사는 ‘시십마(是什麽)’를 들었다. 흔히 ‘이 뭐꼬?’로 알려진 공안이다. 어느 날 두 명의 스님이 설봉선사를 찾아왔다. 설봉선사는 그들이 오는 것을 보자 두 손으로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나가 ‘이것이 무엇이냐(是什麽)?’고 물었다. 그들도 또한 ‘이것이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설봉선사는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되돌아가 버렸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설봉선사는 두 스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뜻을 알지 못한 두 스님이 설봉선사에게 되물은 것이다. 설봉선사는 대답 대신 머리를 숙이고 암자로 갔다. 몸소 실천으로 가르쳐주었다. 진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한 두 스님은 다시 암두스님을 찾아가 같은 질문을 되풀이한다. 꼭 우리들의 모습 같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설봉선사가 민왕에게 설명한 진리는 다음과 같다.

“이제 대왕을 위하여 진여(眞如)의 이름을 죽 말씀드리겠습니다. 진여란 첫째로 부처성품(佛性)이라고도 하고, 두 번째로는 진여라고 하며, 세 번째로는 현묘한 종지(玄旨), 네 번째로는 청정한 법신세계(淸淨法身界), 다섯 번째는 신령한 대(靈臺), 여섯 번째는 진실한 영혼(眞魂), 일곱 번째는 갓난아기(赤子), 여덟 번째는 크고 둥근 거울같은 지혜(大圓鏡智), 아홉 번째는 공의 종지(空宗), 열 번째는 으뜸가는 뜻(第一義), 열 한번째는 희고 깨끗한 식(白淨識)이라고도 합니다.”

여기까지 설법한 설봉선사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름이 다 마음 하나의 명목입니다. 3세의 모든 부처님과 12부 경전이 모두 대왕의 본성에 스스로 갖추어져 있으니 이것을 바깥에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제하는 것이지 아무도 서로 상대를 구제해 주는 사람은 없으며, 이 산승도 대왕을 구제하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합니다. 산승은 중생을 마치 갓난아기처럼 아끼고 염려하기에 인연을 만나면 방편 따라 그들을 제도하지만 만약에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스스로 제도해야 합니다.”

표현만 다를 뿐이지 남악계의 조사들이나 청원계의 조사들이 누누이 강조한 말이 아닌가.

오리가 매화꽃이 핀 바위 계곡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다. 마원(馬遠,약1140-1225년)의 「매석계부도(梅石溪鳧圖」는 자연의 한 부분을 확대해서 그린 산수화조화다. 부(鳧)는 오리를 뜻한다. 거대한 바위는 일부만 그렸다. 화면에 바위의 끝부분만 그린 것으로 봐서 화면 밖으로 바위가 계속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바위 크기는 보는 사람의 상상력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바위의 표면은 부벽준(斧劈皴)으로 그렸다. 도끼로 나무를 찍어낸 자국을 보듯 질감을 표현했다. 붓을 옆으로 뉘어 아래로 끌면서 그어 내린 기법이다. 바위를 일부분만 그린 것처럼 매화도 전체를 다 그리지 않았다. 심하게 꺾인 매화 가지가 바위틈에서 뻗어 나왔다. 이런 나무를 절지(折枝)라 한다. 절지는 꺾인 나뭇가지나 잘린 꽃가지를 뜻한다. 특히 마원이 절지를 잘 그려 ‘마원절지’라 불렀다. 절지를 그릴 때는 화훼(花卉) 한 그루를 다 그리지 않고 줄기에서 아래로 꺾어져 내려온 가지의 일부만 그린다. 절지에 길상적인 의미를 지닌 옛 청동기나 도자기를 배합해서 그린 그림을 기명절지(器皿折枝)라 부른다. 기명절지는 청(淸)대부터 독립된 화목으로 그렸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장승업(張承業)이 처음으로 시도한 이후 유행했다.

「매석계부도」의 소재는 매우 단순하다. 바위와 나무와 계곡의 오리가 전부다. 그나마 모든 경물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무게 중심이 심하게 기운다. 나머지 화면은 여백(餘白)이 차지하고 있다. 그림 오른쪽 위에서 왼쪽 밑으로 대각선을 그으면 왼쪽이 무거운 반면 오른쪽이 가볍다. 이런 것을 변각(邊角)구도 또는 일각(一角)구도라 한다. 이런 구도는 마원 뿐만 아니라 하규(夏珪,1195-1224)도 즐겨 다루었다. 그래서 이들이 이룬 화풍을 마하파(馬夏派)화풍이라 한다. 마원과 하규의 이름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단어다.

마원은 남송 때 활동한 화원화가다. 그는 대대로 그림으로 이름을 떨친 화가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의 화명(畫名)은 증조부보다 윗대부터 시작됐다. 증조부의 증조부는 ‘불상마가(佛像馬家)’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불상을 잘 그렸다. 증조부와 조부도 산수, 화조, 불화를 잘 그렸다. 백부와 부친도 그림을 잘 그려 화원에게 주는 대조(待詔) 벼슬을 역임했다. 마원의 형도 가법을 계승했고 마원은 황가(皇家)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마원의 그림은 황실에 소장되거나 대신들에게 상으로 하사되었다. 마원은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다. 산수와 화조가 결합된 형식, 화조와 산수 인물을 결합한 형식 그리고 산수와 인물을 결합한 형식을 즐겨 그렸다. 「매석계부도」는 산수화와 화조가 결합된 형식이다. 이밖에도 물의 다양한 모습을 12장면으로 그린 「수도(水圖)」는 그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마원 산수화는 간결하고 날카롭다. 그는 이당(李唐, 약1066-약1150)의 화법을 배웠으나 그의 그림은 이당의 그림보다 더 강건하고 예리했다. 자연의 경치 일부를 취하여 그린 사람은 마원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당이 먼저였다. 이당은 북송화원과 남송화원 모두에서 활동한 과도기적인 인물이었다. 송나라는 만주족의 침략을 받아 수도 변경(汴京:개봉)을 버리고 장강(長江)을 건너 임안(臨安:항주)으로 이주했다. 수도를 옮기기 전 개봉 시기를 북송, 옮긴 후 항주 시기를 남송이라 한다.

그런데 두 지역을 대상으로 그린 산수화는 그 성격이 전혀 달랐다. 화북지방의 산천을 그린 북송의 산수화는 대산대수도(大山大水圖)였다. 웅장하고 험난한 대자연에 인물은 작게 그려 넣는 형식이다. 대표 작가는 오대의 형호(荊浩), 관동(關同), 북송의 동원(董源), 거연(巨然), 이성(李成), 허도녕(許道寧), 곽희(郭熙) 그리고 이당(李唐) 등을 들 수 있다. 임제선사 편에서 살펴보았던 범관(范寬)도 이에 속한다. 대산대수도를 그린 화가들은 거비파(巨碑派:Monumental School)화가라고도 부른다. 거비파화가의 산수는 이 분야의 대표적인 화가 이성과 곽희의 이름을 따서 이곽파(李郭派)화풍이라 부른다. 이곽파화풍은 조선 전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의 작가 안견(安堅)의 화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남송의 산수화는 그 반대였다. 호수와 강이 많은 장강 이남의 항주는 기후가 따뜻하고 안개가 자주 출몰했다. 이런 자연 환경은 화가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아무리 큰 산이라도 볼 수가 없다. 남송의 산수화에 큰 산 대신 가까이 있는 산이나 수목이 자주 등장한 이유다. 안개가 바람 따라 피어오를 때는 물가에 서 있는 나무라도 전체가 보이는 대신 일부만 보일 수 있다. 절지와 일각구도가 등장한 배경이다. 마하파화풍의 산수화는 거비파화가의 산수에서 느낄 수 있는 웅장함이 없다. 대신 여백과 암시를 통해 시(詩)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대산대수에서는 개미처럼 작아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던 인물 비중이 마하파화풍에서는 산수와 거의 비슷해진 것도 달라진 점이다. 마하파화풍은 조선 전기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의 작가 이상좌(李上佐)의 화풍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설봉선사는 회창폐불 이후 유생(儒生)의 복장으로 변복하며 수행했다. 불교 탄압이 사라지고 부흥기가 도래하자 남쪽에서 교화를 펼쳤다. 당시에 북쪽에서는 조주선사가 교화를 펼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두 사람의 활동을 ‘남설봉(南雪峰) 북조주(北趙州)’라 불렀다. 남설봉과 북조주의 가르침은 어느 쪽이 더 우세했을까. 이런 질문이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것은 마치 이곽파산수와 마하파산수 중 어느 쪽이 더 예술적으로 뛰어나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화파나 문중이 아니다. 예술성과 가르침의 내용이다. 곽희는 곽희대로 마원은 마원대로 각자의 예술 성취를 이루었다. 범관은 범관대로 하규는 하규대로 그들만의 독특한 작품을 완성했다. 조주선사와 설봉선사도 마찬가지다.

『조당집』에는 설봉선사가 ‘마음이 호탕하면서도 엄격했고, 표정은 평온하나 위엄이 서려 있었다’고 전한다. 길을 나서면 사람들은 멀고 가까움을 불문하고 뒤따랐고, 앉으면 빽빽이 옹위하여 둘러쌌다. 선사는 평생 동안 두터운 마음으로 중생을 제접하고 앉으나 걸으나 언제나 법을 보였다. 908년 5월 2일 밤 3경 초에 천화하니 춘추는 87세요, 법랍은 59세였으며, 39년 동안 출세하였다. 시호는 진각(眞覺)대사라 하였고, 탑호(塔號)는 난제(難提)라 하였다. 설봉선사의 행장과 법문은 『설봉록』에 자세히 적혀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쉽다. 『조당집』이나 『설봉록』이나 모두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데 행간에 불교 전공자가 아니면 행간의 숨은 뜻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 이에 대한 해설집은 내주었으면 참 좋겠다. 만약 『설봉록』도 종광 스님이 강설한 『임제록』 같은 해설서가 나온다면 그 책을 읽고 신심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출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98호 / 2015년 6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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