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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황공망, ‘부춘산거도’

기자명 조정육

“마음 여는 순간 삼라만상 모두가 법신”

▲ 황공망, ‘부춘산거도’(부분), 원, 종이에 먹, 33×636.9cm, 대북 고궁박물원.

운문선사, 사량분별 버리고
스스로가 체득할 것을 강조
한 글자로 된 일자선으로
학인들 망상 해결해주기도

구름처럼 유랑했던 황공망
직접 보고 그려내는 대신
사색으로 마음에 산수 담아

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선사가 주장자를 세우더니 다음과 같이 물었다.

“15일 이전은 그대에게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를 한 마디로 말해 보라.”

운문선사는 기다리지 않고 대신 대답하였다.

“날마다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

운문문언은 소주(蘇州) 가흥(嘉興)출신으로 속성은 장(張)씨였다. 어려서 가흥 근처 공왕사(空王寺)에서 지징(志澄) 율사에게 출가했다. 그 영민한 기질은 타고난 것이었고, 지혜로운 논변은 하늘이 주신 것 같아 모든 경전을 외움에 번거롭게 다시 열어 보는 일이 없었으므로 지징율사는 그를 대근기라고 높이 평가했다. 지징율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율법과 경전을 공부한 후 목주도종(睦州道踪,780-877) 선사를 찾아갔다. 목주선사를 처음 뵈러 갔을 때 세 번 문을 두드리자 그제야 빗장을 열어주었다. 운문이 들어가려는 순간 목주선사는 밀어내면서 말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구.” 운문은 그 말끝에 밝게 깨달았다. 운문은 여러 해 동안 목주선사에게 묻고 참례하였다. 목주선사는 운문의 마음이 빈틈이 없고도 확 트인 것을 알고 설봉의존 선사에게 보냈다. 운문은 설봉선사의 가르침을 받은 후 수년 간 모시면서 수행을 거듭했다. 그 후 설봉선사의 곁을 떠나 17년 동안 여러 총림을 찾아다니며 철저하게 공부했다. 그는 설봉선사를 통해 선의 종지를 배웠지만 조주선사와 남악혜충선사의 선사상도 흡수했다. 그 후 운문산으로 옮겨 남한(南漢)의 유씨왕(劉氏王)의 귀의와 시주를 받고 널리 교화를 펼쳤다. 운문선사는 선종오가(禪宗五家)의 종조다. 6조 혜능대사의 문하인 남악회양과 청원행사의 두 계열에서 위앙종(위산영우), 임제종(임제의현), 조동종(동산양개), 운문종(운문문언), 법안종(법안문익)의 선종이 갈라져 나왔다. 운문종은 오대 말에서 송초까지 흥성하다 남송대에 이르러 점차 쇠퇴했다.

운문선사는 언어적인 사량분별을 버리고 반드시 스스로가 실제로 체득하라고 가르쳤다.

한 승이 물었다.

“무엇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몸(佛身)입니까?”

운문 선사가 대답했다.

“마른 똥막대기(乾屎橛)이니라.”

한 승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진진삼매(塵塵三昧)입니까?”
“밥통의 밥이요, 물통의 물이다.”

어찌 똥막대기뿐이겠는가. 마음을 여는 순간 삼라만상이 모두 법신인 것을. 그래서 운문선사는 ‘하늘과 땅 사이에 한 보배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것이 진여(眞如)이고 본체이고 법신이다. 두두물물이 부처 아닌 것이 없으니 ‘어떤 것이 진진삼매(塵塵三昧)’냐고 묻는 사람에게 ‘밥통의 밥이요, 물통의 물’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현상세계 이대로가 그대로 삼매라는 뜻이다.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들려주던 운문선사가 종소리를 듣더니 말했다.

“석가부처님이 설법하시는구나.”

운문선사가 어느 날 갑자기 주장자를 잡아 세우더니 한 승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주장자입니다.”“어느 세월에 꿈엔들 보겠느냐?”

종소리가 석가의 설법이면 주장자는 단순한 주장자가 아니다. 주장자도 석가의 법신이고 법신을 취해야 무정설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이치는 알지 못하고 수행자들이 ‘성품을 보는 일에 매진해야 할 처지에 재(齋)와 공양을 수시로 받고 가사와 발우를 쉽게 전수받는’ 풍토에 대해 개탄했다. 스승과 부모를 떠났으면 정신을 차려 ‘눈을 부릅뜨고 발우와 벼랑을 높이 올려 걸어놓고 10년 20년 철두철미하게 결판을 내라’고 가르친다. 그렇게 노력하고 전력을 쏟았는데도 금생에 깨닫지 못한다면 ‘내생에 사람 몸을 잃지는 않으리라’고 장담한다.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우리가 부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번거롭게 발우를 짊어지고 천 리 만 리를 찾아다니는 헛된 수고를 계속하고 있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를 살펴야 한다. 시절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하루아침에 죽는 날이 닥치면 ‘끓는 물에 떨어진 조개나 게처럼 허우적거려봤자 소용이 없다.’ 그러니 열심히 노력하고 살펴야 한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고 한 번 나간 호흡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운문선사는 한 글자로 된 짧은 말을 써서 학인들을 가르쳤다. 이것을 일자선(一字禪)이라 한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경우다.

“무엇이 운문의 한 길입니까?”
“친(親:친절하다)”
“삼신(三身) 가운데 어느 부처가 설법을 합니까?”
“요(要:필요한대로)”
“부모를 죽인 죄는 부처님 앞에서 참회하면 되지만, 부처님과 조사를 죽이면 어디다가 참회해야 합니까?”
“로(露:드러내라)”
“무엇이 참선입니까?”
“시(是:옳구나)”
“그러면 무엇이 도입니까?”
“득(得:되었구나)”

운문선사의 일자선은 학인들이 말에 떨어지지 않도록 망상을 해결해주는 일구(一句)로 극찬 받았다. 그런데 그 뜻을 알겠는가? 글을 쓰는 필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내가 공부가 부족해서인가? 망상을 피워서인가?

고즈넉한 수면을 따라 올망졸망하게 늘어선 수목을 구경하다보니 아담한 집 몇 채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살이가 이 정도로 평온하면 얼마나 좋을까. 오솔길을 걸어 언덕에 올라서자 저 멀리 강 위에 떠 있는 고기잡이배가 한가롭다. 눈을 거두어 흙다리를 건너려는데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느닷없이 앞을 가로막는다. 한동안은 땀 흘리며 산길을 올라가야 하리라. 황공망(黃公望,1269-1354)은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에서 변화무쌍한 자연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웅장하고 광활한 자연은 담묵(淡墨)과 농묵(濃墨)의 조화 속에 활기가 넘친다. 수목의 줄기와 잎은 구륵과 몰골을 번갈아 사용해 다양한 필선의 변화를 주었다. 산의 질감을 드러내기 위해 무수히 되풀이한 피마준(披麻皴)은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기법인데도 마치 그가 처음 시도한 것처럼 신선하다. 범관의 「계산행려도」가 웅장하고 마원의 「매석계부도」가 시적(詩的)이라면 「부춘산거도」는 이 두 가지를 다 갖췄다.

동기창(董其昌)은 「부춘산거도」를 보고 “마치 보배가 있는 곳에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얻어서 돌아오는 것과 같으니, ‘맑은 복을 받은 하루’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고, 마음과 몸이 모두 상쾌해진다”고 찬탄했다. 명대의 화가 장경(張庚)은 “진실로 예림(藝林)의 신선이 되어 속세의 바깥으로 벗어난 자가 되었다”고 극찬했고,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추지린(鄒之麟)은 “그림에서 황공망은 서예의 왕희지”라고 추켜올렸다. 현대의 미술사학자 천촨시(陳傳席)는 “중국산수화는 이 그림에 이르러 서정시와 같은 정신적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중국회화사에서 후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부춘산거도」를 들고 싶다. 황공망이 1347년에 자신이 살던 절강성(浙江省) 부춘산을 그린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로 두루마리 대작이다. 황공망이 그림에 직접 쓴 화제에는 구도를 잡고 처음 붓질을 시작한 지 3,4년이 지나서야 완성했다고 적혀 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을까? 황공망의 자는 자구(子久), 호는 대치(大痴), 대치도인(大痴道人), 일봉도인(一峰道人)이다. 본래 그의 성은 육(陸)씨였는데 7,8세 때 황(黃)씨의 양자로 들어가 성씨를 바꾸었다. 그는 남송 때 출생했지만 11세 때 송이 망하는(1279) 바람에 원(元) 왕조에서 관리가 되었다. 하급관리 생활을 하던 중 누명을 쓰고 하옥된 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벼슬길에 나아가 큰일을 하겠다는 원대한 포부가 사라지자 50세에 신도교(新道敎)에 입교했다. 그는 은둔자가 되어 점술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화명(畫名)이 알려지자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명청(明淸)대에는 문인들이 생계수단으로 그림을 파는 것이 유행했지만 원대에는 사정이 달랐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 여기(餘技)나 여흥(餘興)으로 그림을 그렸을 뿐 생계수단으로 삼는 경우는 드물었다. 황공망은 예외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유랑(流浪)생활을 하며 보냈다. 소주(蘇州)의 천지산(天池山)을 비롯하여 화산(華山), 태호(太湖), 소산(小山), 부춘산을 자주 유람(遊覽)했다. 「부춘산거도」를 3,4년이 지나도록 완성하지 못한 것도 산 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바깥세상을 구름처럼 떠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유랑하는 것은 신도교의 계율에 의한 것이었지만 유람은 산수화가들의 예술정신을 함양하고 화격(畫格)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인간세상의 일을 버린 사람에게 유랑과 유람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는 유랑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고 유람을 통해 산수의 정신을 터득했다. 그의 화법은 당말(唐末)에 활동한 동원(董源), 거연(巨然)과 형호(荊浩), 이성(李成), 관동(關同)의 작품에서 배운 바가 컸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대자연의 가르침도 지대했다. 어쩌면 마음속에 담아둔 대자연이 가장 큰 스승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많은 산수화를 남겼지만 직접 산수를 사생한 적은 없었다. 대신 유랑과 유람을 통해 관찰한 산수를 마음에 담아 둔 후 오랜 사색과 성찰을 통해 정화시켰다. 그야말로 흉중구학(胸中丘壑)이 스승이었다.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쓴 책 『사산수결(寫山水訣)』에는 배우는 자의 자세에 대해 이렇게 적어 놓았다. ‘배우는 자는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할 수 있을까. ‘그림 그릴 때의 큰 요체(大要)는 바르지 않은 것(邪), 달콤한 것(甛), 속된 것(俗), 의지하는 것(賴), 이 네 가지를 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산수화가 단순히 본 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부춘산거도」를 비롯하여 「천지석벽도(天池石壁圖)」「구봉설제도(九峰雪霽圖)」「단애옥수도(丹崖玉樹圖)」등 수많은 걸작을 남겼다.

그의 산수화는 후대 문인화가들의 스승이 되었다. 원대에 활동한 4명의 화가 즉 황공망, 오진(吳鎭,1280-1354), 예찬(倪贊,1301-1374), 왕몽(王蒙, 약1308-1385)을 원사대가(元四大家) 또는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라고 한다. 그들은 독특한 필묵과 개성적인 화풍을 성취하고 사실성과 사의성(寫意性)을 결합한 산수화를 완성해 후대의 많은 화가들이 도달하고 싶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황공망은 중국과 조선의 산수화가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원4대가의 나머지 세 사람이 모두 황공망에게 그림을 배웠다. 명청대의 심주(沈周), 문징명(文徵明), 당인(唐寅), 동기창, 진계유(陳繼儒), 4왕오운【四王吳惲:왕시민(王時敏), 왕감(王鑒), 왕휘(王翬), 왕원기(王原祁), 오력(吳歷), 운격(惲格)】과 그 유파, 금릉8가【(金陵八家:공현(龔賢), 번기(樊圻), 고잠(高岺), 추철(鄒喆) 오굉(吳宏), 엽흔(葉欣), 호조(胡造), 사손(謝蓀)】, 신안4대가【新安四大家:사사표(査士標), 손일(孫逸), 왕지서(汪之瑞), 홍인(弘仁)】와 그 유파 등이 모두 황공망의 산수화를 임모하거나 영향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심사정(沈師正)을 비롯한 많은 남종문인화가들이 황공망을 추종했다. 특히 조선후기의 정수영(鄭遂榮,18-19세기)과 말기의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은 황공망의 그림을 모방하여 「방(황)자구산수도(倣黃子久山水圖)」를 남겼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제자 허련(許鍊, 1808-1893)에게 ‘조선의 작은 대치’라는 뜻으로 ‘소치(小痴)’라는 호를 줄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부춘산거도」는 역설적으로 그 가치 때문에 불태워질 뻔 했다. 역대 소장가들은 「부춘산거도」를 진귀한 보물 다루듯 소중하게 여겼다. 심주와 동기창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은 강소성에 살았던 오홍유(吳洪裕)에게서 발생했다. 명말청초의 거부이자 소장가였던 오홍유도 「부춘산거도」를 매우 아꼈다. 그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가족들에게 「부춘산거도」를 태워 자신과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명화를 혼자 독차지하고 싶은 이기심이 빚은 사건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명화를 불태웠다. 이때 방에 있던 오홍유의 조카 오정안(吳靜安)이 무엇인가 타는 냄새를 맡고 밖으로 나왔다. 천하의 명화가 불타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오정안은 황급히 그림에 붙은 불을 껐다. 다행히 불길은 잡았으나 그림은 두 토막이 났다. 두 개의 그림은 현재 두 곳에 소장되어 있다. 시작 부분은 절강성박물관에, 주요 부분이 들어간 다른 그림은 대북고궁박물원에 있다.

위대한 그림이 후손에게 전해지기까지는 숱한 위험과 어려움이 뒤따른다. 사량분별을 단칼에 베어버리기 위한 선사들의 가르침인 공안(公案)은 더하다. 말은 말인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는 가르침은 전달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삭제되기 십상이다. 운문문언선사의 가르침은 『운문록(雲門錄)』에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읽어봐도 가슴에 와 닿지가 않는다. 와 닿지 않으니 읽고 싶지가 않다. 내용을 이해할 수 없으니 책에 적힌 내용이 말장난처럼 보이고 일반인은 안중에도 없는 전문가들끼리 ‘그들만의 천국’에서 나누는 대화 같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누군가 눈 밝은 스승이 나타나 운문선사의 가르침을 해설해주었으면 좋겠다. 나이 들어가니 인내심이 줄어든 탓일지도 모르겠다. 잘난체하는 목소리로 큰소리를 치는 사람보다 자분자분 설명해주는 친절한 사람이 더 좋다. 다른 사람도 나와 비슷하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운문록』에 대한 해설이 ‘날마다 좋은 날이다’처럼 가슴에 와 닿았으면 좋겠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몸을 ‘마른 똥막대기’라고 한 말처럼 조금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해설이라면 더욱 좋겠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299호 / 2015년 6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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