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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쌍련선원의 두 연꽃, 성철과 청담

기자명 김택근

▲ 성철과 청담. 한국불교의 거목인 두 선지식은 물도 새지 않을 정도로 절친한 평생의 도반이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과 청담은 대승사에서 총림 구상을 했고, 모든 개혁의 지향점은 ‘부처님 당시처럼’으로 정했다. 훗날 봉암사에서의 수행 전설은 대승사에서 비롯됐음이었다. 성철과 청담은 총림을 해인사에 세우겠다고 못 박고 있다. 해인사를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법향(法鄕)으로 여겼던 것이다."

청담이 성철에게 편지를 보냈다. 발신지가 상주가 아닌 문경이었다. 상주포교당에 묶여있던 거주 제한이 풀려 대승사로 옮겼으니 함께 정진하자는 내용이었다. 1944년 가을, 성철은 도리사를 떠나 문경 대승사로 옮겨갔다. 대승사 선원에는 청담 외에도 자운, 홍경, 종수, 정영, 우봉, 도우 등이 모여 있었다. 결기가 시퍼런 젊은 수좌들이 동안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운과는 근 5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역시 사람이었다. 지난 가을 그토록 썰렁했던, 방부조차 들일 수 없었던 대승사 쌍련선원은 확연히 달랐다. 절 살림이 크게 나아질 리가 없었지만 눈빛 형형한 선객들이 몰려들자 경내가 꽉 찬 듯했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불산 대승사에는 ‘천강사불 지용쌍련(天降四佛 地聳雙蓮)’이란 창건설화가 전해진다. 하늘에서 네 부처님이 내려오고, 땅에서는 연꽃이 짝을 지어 솟았다는 것이다. 즉 587년(진평왕 9) 네 면에 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산 정상에 내려앉았다. 이에 사불산이란 이름이 붙었고, 이 소문을 듣고 왕이 와서 보고 예배드린 후 대승사를 창건했다. 왕은 다시 ‘묘법연화경’을 외는 비구를 청하여 주지로 삼았다. 주지는 사면불을 받들어 살피며 향불이 끊이지 않도록 했다. 주지가 입적하자 무덤에서 쌍련(雙蓮)이 피어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쌍련선원은 창건설화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그해 동안거에는 쌍련이란 선원의 이름처럼 두 개의 연꽃이 특별했으니 바로 성철과 청담이었다. 둘은 미래의 한국불교를 생각했다. 함께 종단개혁의 청사진을 마련했다. 해인사에 강원, 선원, 율원을 갖춘 총림을 세우고자 했다. 마침 갓 출가한 청담의 딸 묘엄(속명 이인순)은 이를 생생하게 지켜봤다.

“두 분이 해인사에 가서 총림을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영산도를 그리는 것을 보았어요. 지금 이 말법 시대에 부처님 당시처럼 짚신 신고 무명옷 입고 최대한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속에서 풍기는 것을 남한테 보여줄 수 있는, 말 없는 가운데 풍길 수 있는 이런 중노릇을 하자는 등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쌍련선원에 앉아서 하셨어요.”

이로써 성철과 청담은 대승사에서 이미 총림 구상을 했고, 모든 개혁의 지향점은 ‘부처님 당시처럼’으로 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훗날 봉암사에서의 수행 전설은 대승사에서 비롯됐음이었다. 또 성철과 청담은 총림을 해인사에 세우겠다고 못 박고 있다. 수많은 절 중에 해인사를 꼽은 것도 특기할 만하다. 해인사가 팔만대장경을 품은 법보사찰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인연도 작용했을 것이다. 성철은 해인사를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법향(法鄕)으로 여겼던 것이다. 묘엄의 구술을 모은 ‘회색 고무신’을 보면 구체적인 역할분담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실에는 효봉 스님을 모시고, 선방은 성철 스님이 맡고, 운허 스님과 춘원 이광수 선생에게는 경(經)을 맡기고, 율원은 자운 스님이 맡고….’

청담이 빠져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 총림이 세워지면 전체적인 살림을 도맡아하는 ‘전천후’ 역할이 주어졌음직하다. 강원의 경을 이광수(1892~1950?)에게 맡기겠다는 것도 이채롭다. 하지만 춘원의 행적을 살피면 일견 이해가 된다. 우선 대강백 운허 스님(1892~1980)이 춘원의 육촌 동생이었다. 운허와는 어릴 적부터 함께 공부하며 우애가 돈독했다. 춘원이 잇단 친일 행각을 벌이고 그로 인한 업보에 시달릴 때 그를 ‘법화경’의 세계로 인도했다. 춘원은 ‘원효대사’ ‘이차돈의 사’ 같은 불교소설을 썼다. 춘원은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참선을 하고 불경을 읽었다고 한다. 성철과 청담이 총림을 구상하던 1944년에는 가족을 서울에 남겨두고 홀로 남양주군 사릉(思陵)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당시 근처 봉선사에는 운허가 주지로 있었다. 그런저런 인연으로 총림의 강원을 맡길 후보에 오른 것 같다는 추정을 해 본다.

성철은 부처님처럼 살기 위해 우선 왜색 승복부터 벗어버리자고 했다. 당시 승려들은 검은색 승복에 붉은 비단 가사를 수했다. 일본식이었다. 성철은 청색, 검은색, 붉은색을 섞어서 만든 괴색 가사를 입자는 의견을 냈다. 생명을 죽여서 만든 비단 옷을 추방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가사를 비구 스스로 만들어 입자고 독려했다. 묘엄의 귀한 증언이다.

“누런 광목 40통을 사서 양잿물에 적셨다가 뙤약볕이 내리쬐는 법당 앞에 널어서 말려가지고 물을 들였습니다. 그런데 성철 스님께서 비구니가 비구 옷을 해주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율장을 딱 펴놓고 ‘봐라, 여기 부처님이 비구니가 비구를 시봉하는 거는 육친관계가 있는 사람 아니면 해주지 마라 했지 않느냐. 그러니까 비구 옷에 손대지 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비구들이 직접 만들었다. 원주와 몇몇 비구가 밤새 작업을 했다. 처음에는 노란색, 다음에는 빨간색, 끝으로 파란색 물을 들였다. 몇 번씩 물을 들이고 손으로 주물러서 가마솥에 식초랑 소금을 넣고 삶았다. 그러나 가사 만드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구니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하다하다 안 되니까 한 스님이 새벽 두시쯤 일꾼을 시켜 지게를 지고 윤필암으로 오셨어요. 그러고는 ‘성철 스님이 알면 난리가 나니까 몰래 살짝 해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손질을 해서 그 이튿날 밤에 몰래 갖다드렸지요. 그랬는데! 그게 들통이 나고 말았지요.”

‘그랬는데’에 ‘!’를 붙였다. 큰 일이 난 것이다. 성철은 영산회상을 하자 해 놓고 이 무슨 허물이냐, 가사가 좀 깔끔하지 않아도 그게 무슨 대수냐, 비구끼리 한번 해보자고 했으면 해야 하지 않느냐며 나무랐다. 그리고는 아예 짐을 싸서 산문을 나가 버렸다. 절집이 술렁이고 도반 청담은 어서 성철의 뒤를 밟으라 했다. 며칠 후에서야 가사불사의 책임을 맡았던 청안이 성철을 모시고 돌아왔다. 이런 곡절 끝에 괴색 가사가 탄생했다. 원색을 부쉈으니 치장하여 뽐내겠다는 욕망을 짓이긴 것이었다. 한 점 사치도 몸에 붙이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있었다. 바로 부처의 옷이었다. 대승사에서 가사불사 회향 법회가 열렸다. 자운이 법문을 했다. 성철과 청담은 묵언기도 중이었다.

“금빛 날개를 펄럭이며 용을 잡아먹는 금시조(金翅鳥)란 새가 있다. 용들은 다 잡아먹혀 씨가 마를 정도에 이르자 부처님께 살려 달라 애원했다. 부처님이 이를 가엾게 여겨 가사의 실오라기 하나를 뽑아서 지니게 하니 금시조가 감히 용을 잡아먹지 못했다. 그리할진대 가사를 통째로 입고 있는 승려들은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그러니 보아라. 가사를 지어 올리는 공덕은 얼마나 큰 것인가.”

출가 후 묘엄이 들은 첫 법문이었다. 대중 앞의 자운은 그날 많이 떨었다고 한다.

성철은 대승사에서부터 왜색을 물리치고 부처님대로 살아보자는 구상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비구들에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살아가는 청빈한 수행자의 삶을 살자고 했다. 마침내 성철이 불교개혁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성철은 겨울임에도 서늘한 곳을 좋아했다. 아니 서늘한 곳에 있어야 했다. 장좌불와 수행을 계속했기 때문이었다. 잘 때도 좌선을 풀지 않았다. 따뜻한 곳에 있으면 눕고 싶어졌기 때문에 이를 경계했다. 문틈으로 한기가 스며들면 앉은 채로 맞아야 했다. 그래서 한 겨울에는 이불을 있는 대로 쌓아서 찬바람을 막았다. 성철은 겨울 내내 감기를 달고 살았다.

일제는 전황이 불리하자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했다. 조선인을 자신들의 전장에 세운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조선인 학생들까지 학도병으로 전선에 보냈다. 1944년 2월에는 전면 징용제를 강행했고, 8월에는 여성정신대 근무령을 공포했다.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을 전선으로 보냈다. 전장의 조선 청년은 총알받이나 대포밥이 되었고, 징용으로 끌려간 이들은 전쟁의 도구가 되었으며, 정신대원로 끌려간 부녀자들은 일본군위안부가 돼야 했다. 이듬해 동안거가 끝난 직후 외딴 산사 대승사에도 징집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징집 대상은 바로 도우였다. 그렇다고 일본이 벌인 전장으로 끌려갈 수는 없었다. 다시 떠나야 했다. 성철은 대승사 사적비가 있는 곳까지 나와 떠나는 도우를 지켜봤다.

“같이 살 수 있을 것이야. 몸조심 하시게.”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절을 올리는 도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도우는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잘 모면하여 해방이 되거든 같이 살자고 하시는데, 앞일을 모르니 눈물이 핑 돌더군요. 지금도 스님과 작별하면서 눈물 흘리며 걸망지고 나오던 일이 생생합니다.”

해방, 그러고 보니 총림을 구성하고 ‘부처님 당시처럼’ 산다는 것은 해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성철과 청담은 해방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00호 / 2015년 7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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