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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예찬, ‘용슬재도’

기자명 조정육

선과 염불 양 날개 삼아 해탈 향해 날아가리

▲ 예찬, ‘용슬재도(容膝齋圖)’, 원, 1372년, 종이에 먹, 74.7×35.5cm, 대북고궁박물원.

적막한 세계는 어떤 풍경일까. 예찬(倪瓚,1306~1374)이 그린 「용슬재도(容膝齋圖)」는 그에 대한 대답이다. 바스라질 것 같은 낮은 언덕. 메마른 나무 다섯 그루.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은 빈 정자. 오직 그것만이 전부다. 움직임이라고는 바람 한 점, 구름 한 조각 감지되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볕조차 땅에 발을 뻗으려면 결심이 필요하다. 고요가 깨지는 쨍그렁 소리에 스스로가 놀라지 않으려면 말이다. 근경(近景)뿐 만이 아니다. 중경(中景)의 아득한 강과 원경(遠景)에 누워 있는 무심한 산도 마찬가지다. 침묵의 소리만이 요란할 뿐 살아있는 생명체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적막 그 자체다.

법안종 3대 조사 연수선사
선정쌍수·삼교일치 등 강조
‘종경록’ 통해 사상 체계화

예찬, 두 개의 풍경 조합해
‘용슬재도’라는 걸작 남겨

예찬은 황공망과 함께 원말4대가를 대표하는 작가다. 「용슬재도」는 예찬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걸작이다. 용슬재는 무릎을 겨우 펼 수 있을 만큼 작은 정자라는 뜻이다. 그림 속 정자를 보니 그 제목이 이해된다. 「용슬재도」는 근경, 중경, 원경이 뚜렷한 삼단식(三段式) 구도다. 삼단식 구도는 예찬 그림의 특징이다. 물기 적은 갈필(渴筆)에 연한 먹을 묻혀 간결하게 그린 것도 그만의 특징이다. 그는 근경과 원경을 똑같은 농담(濃淡)으로 그렸다. 가까운 곳은 진하게, 먼 곳은 연하게 그리는 근농원담(近濃遠淡)의 구분도 거의 하지 않았다. 예찬은 언덕이나 바위를 그릴 때 절대준(折帶?)을 썼다. 절대준은 붓을 옆으로 뉘어 수평으로 긋다 갑자기 방향을 꺾어 수직으로 획을 그어 내리는 필법이다. 수평지층에 수직 단층이 보이는 바위산의 모습을 묘사할 때 예찬이 즐겨 쓴 필법이다. 절대준으로 그린 암석은 태호(太湖) 지역의 침적된 지층의 단면과 흡사하다. 언덕을 보고 바스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그 때문이다. 

「용슬재도」는 평온하고 담담한 그림이다. 조용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예찬의 그림은 씹을수록 단맛이 우러나오는 칡뿌리 같다. 보면 볼수록 참맛이 느껴진다. 예찬의 그림은 크게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도 사물의 차이점을 정확하게 표현했다. 오랫동안 관찰한 후에 붓을 들었음을 알 수 있다. 나무를 모르는 사람 눈에는 모든 나무가 비슷하다. 그 나무가 그 나무 같다. 나무를 아는 사람 눈에는 수종(樹種)의 차이점은 물론이고 수령과 발육 상태까지 보인다. 전경의 언덕에 서 있는 나무에는 예찬의 예리함이 감지된다. 얼핏 보면 모두 같은 필법으로 그린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세 종류의 나무가 뒤섞여 있다. 두 그루는 점엽법(點葉法)으로 농묵을 찍어 잎을 그렸다. 두 그루는 수직으로 쳐지듯 잎을 그렸고 마지막 한 그루는 고사(枯死)된 듯 잎이 다 떨어지고 없다. 같은 듯 다른 나무다. 점엽법으로 나무에 찍은 농묵은 바위 곳곳에도 찍었다. 다른 듯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함이다.

예찬은 강소성(江蘇省)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정(珽)이고 자는 원진(元鎭), 현영(玄瑛)이다. 호는 운림(雲林), 운림생(雲林生), 운림자(雲林子)인데 운림을 가장 즐겨 썼다. 별호는 풍월주인(風月主人), 소한선경(蕭閑仙卿), 주양관주(朱陽館主), 무주암주(無住庵主), 유마힐(維摩詰), 정명거사(淨名居士) 등 아주 많다. 호와 별호는 그의 집에 있던 운림당(雲林堂), 소한선정(逍閑仙亭), 주양빈관(朱陽賓館), 청비각(淸?閣)등의 전각에서 비롯되었다. 전각의 이름과 호를 보면 그가 추구한 세계가 불교와 도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부호의 아들(서자)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풍족하게 보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기가 원(元,1279~1368) 명(明, 1368~1644) 교체기였던 만큼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야 했다. 그는 35살 때 세금 독촉을 피해 전답을 팔아 가족과 함께 유랑을 떠났다. 처음에는 관아의 독촉을 피해 시작된 유랑이 나중에는 반란군 때문으로 대상이 바뀌었다.

유랑하는 동안 그의 관심은 오로지 서화뿐이었다. 예찬이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바는 일기(逸氣)였다. 그는 대나무를 그린 제시에서 “나의 대나무는 단지 가슴속의 일기를 그릴 뿐이니 어찌 다시 그 닮음과 닮지 않음, 잎의 무성함과 성김, 가지의 기움과 곧음을 비교하겠는가?”라고 했다. 형상을 닮게 그리는 것보다 세상을 벗어난 기운을 그리고 싶어 했다는 뜻이다. 그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한 일기는 무엇일까. 속된 것에 구애받지 않은 정신적인 풍모다. 소쇄(瀟灑)한 기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소쇄한 기운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은 사람은 담양에 있는 소쇄원(潚灑園)에 가 보시기 바란다. 소쇄원 제월당(霽月堂)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대나무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들으면 된다. 돌돌돌 흐르는 물소리를 들어도 좋다. 소쇄한 기운은 물소리 바람소리 같은 것이다. 그의 그림은 「용슬재도」처럼 평담하고 탈속한 경지를 담고 있다. 세속의 굴레를 벗어난 고일(高逸)한 경지를 드러냈다. 속세와 섞여 있으나 마음이 한가롭고 자유로운 선비가 빚어낸 경지였다.

그는 방랑생활을 계속하던 중 58세 때 아내를 잃었다. 상처한 지 5년 후, 주원장(朱元璋)에 의해 명 왕조가 세워지고 천하는 평정을 되찾았다. 홀로 남겨진 예찬은 늙고 외로워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고독하고 쓸쓸하게 지내다 69세 때 세상을 떠났다. 「용슬재도」 상단에는 ‘임자년(1372) 7월 7일 운림생이 그렸다’라고 적혀 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소장자의 요청에 의해 다시 제발을 썼다. 소장자가 의사였던 인중(仁仲)이란 사람에게 이 그림을 주고자 글을 부탁했기 때문이다. 예찬은 1374년에 다시 제발을 써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였다.

그는 그림으로 알려진 화가이기 전에 후배 선비들이 닮고 싶은 선배의 표상이었다. 그는 인품이 고결하고 청고하여 많은 문인들과 교류했다. 그의 인물됨을 흠모하여 생존시에 초상화를 그린 작자미상의 「예찬상(倪瓚像)」이 전한다. 청(淸)대의 나빙(羅聘)도 「정명거사상」을 그렸다. 두 작품 모두 초탈하면서도 고아함을 추구했던 예찬의 의취가 느껴지는 초상화다. 그는 결벽증이 심한 것으로 유명했다. ‘세수 한 번 하는데 물을 수십 번 바꾸었고, 갓과 옷을 수십 번 털었다’고 전한다. 생활공간은 물론 오동나무까지 닦게 했다는 그의 기행(奇行)은 「운림세동도(雲林洗桐圖)」라는 제목으로 많은 화가들의 화제(?題)가 되었다. 특히 명대의 최자충(崔子忠)과 조선의 장승업(張承業)이 그린 작품이 유명하다.

「용슬재도」는 강을 중심으로 근경의 언덕과 강 건너 대안(對岸)으로 나눠지는 일하양안(一河兩岸)의 구도다. 근경에서 뻗은 나무줄기의 끝부분을 기준선으로 가로로 잘라내면 두 개의 그림으로 독립된다. 근경과 원경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마치 두 개의 풍경을 조합해놓은 듯 독립적이고 개별적이다. 그렇다면 「용슬재도」를 두 개로 분리해서 독립시키면 현재와 같은 걸작이 될 수 있을까. 독립될 수는 있으나 현재와 같은 의취는 사라진다. 여백에 의해 연결되는 넓은 중경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경은 원경 때문에 돋보이고 원경은 근경 때문에 존재감이 드러난다. 근경과 원경은 한 몸이다.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선사는 법안종(法眼宗)의 3세 종조다. 법안종은 법안문익(法眼文益,885~958)이 당말(唐末)에 세운 종파로 천태덕소(天台德韶)를 거쳐 영명연수에게 가르침이 전해졌다. 선종5가 중 가장 늦게 형성되었으나 송초(宋初)까지 운문종과 함께 중국 전역에 큰 위세를 떨쳤다. 영명연수선사는 법안문익과 천태덕소의 종풍을 이어받았다. 여기에 청량징관(淸凉澄觀,738~839), 규봉종밀(圭峯宗密, 780~841)을 비롯하여 천태지자, 담연, 제관, 승조 등 여러 사람의 사상을 흡수하여 선교일치(禪敎一致), 선정쌍수(禪淨雙修), 삼교일치(三敎一致)를 강조했다.

그는 『종경록(宗鏡錄)』 100권과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 3권을 지어 선교일치론을 체계화했다. 그는 『종경록』 서문에서 ‘한마음(一心)을 들어 으뜸(宗)으로 삼고, 만법(萬法)을 비춤이 거울(鏡)과 같다’고 전재한 뒤 ‘옛 문헌의 깊을 뜻을 모아 보배로운 원교(圓敎)의 이치를 모두 모아 이를 함께 현양하는 것이 록(錄)’이라 했다. 여기에 인용된 전적은 화엄 전적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천태교 전적이다. 즉 화엄, 유식, 천태의 삼종을 소의로 하여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 일심위종(一心爲宗)의 입장에서 유심의 뜻을 밝히고자 엮은 것이 『종경록』 이다. 그는 ‘불법은 바다와 같은 것이어서 일체의 모든 것을 포용하며, 궁극의 진리는 허공과 같아서 어느 문으로도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연수선사는 왜 일심(一心)이라 했을까? ‘참됨과 망령됨(眞妄), 물듦과 깨끗함(染淨), 일체의 만법이 둘이 없는 성품이기 때문에 하나라고 이름 한다’라고 했다. 즉 일심은 바로 일체의 유정이 모두 갖추고 있는 자성청정여래장(自性淸淨如來藏)의 각성(覺性)이다. 그래서 연수선사는 ‘일승법(一乘法)이 일심’이라고 단언하고 ‘일심을 지키는 것이 바로 진여문’이라 했다. ‘일체법은 모자라거나 적지 않다. 일체의 법행이 자기 마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오직 마음이 저절로 알고 다시 별다른 마음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곧바로 진심을 요달하면 자연히 진실해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마음을 일컬어 진원(眞源), 각해(覺海), 진심(眞心), 진여(眞如), 법성(法性), 여래청정심(如來淸淨心), 공성(空性), 심지(心地) 등이라고 한다.

『종경록』 서문에는 송나라 상서였던 양걸(楊傑)이 지은 명문이 적혀 있다.

“모든 부처님의 참 말씀(諸佛眞語)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고(以心爲宗), 중생이 믿는 도(衆生信道)는 근본을 거울로 삼는다(以宗爲鑑). 만약 사람이 부처로써 거울을 삼는다면 계율, 선정, 지혜(戒定慧)가 모든 선(善)의 근본(宗)이 되어 사람과 하늘, 성문 연각 보살 여래가 이로 말미암아 나오는 줄 알 것이므로 온갖 착한 무리들은 믿어 받지 않을 이 없고, 만약 중생으로써 거울을 삼는다면 탐냄 성냄 어리석음이 모든 악(惡)의 근본(宗)이 되어 수라 축생 지옥 아귀가 이로부터 나오는 줄 알 것이므로 온갖 나쁜 무리들은 두려워 꺼리지 않음이 없으리라. 그러나 선악이 비록 다르다하더라도 그 근본(宗)은 동일하다.”

이러한 연유로 『종경록』은 종감록(宗鑑錄) 또는 심감록(心鑑錄), 심경록(心鏡錄)등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워낙 감동적인 문장이라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마음은 마치 밝은 거울과 같아서 만상(萬象)이 또렷하여 부처와 중생은 그 영상(影像)이며, 열반(涅槃)과 생사(生死)는 모두가 억지로 붙인 이름이다. 거울의 바탕은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비추고 거울의 빛은 비추면서도 항상 고요하며,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 돌이켜 그 마음을 비춰보건대 신령하고 밝고 깊고 고요하고 넓고 크고 막힘없이 통하며, 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고 닦음이 없고 증득함이 없으며, 더럽힐 수 있는 먼지가 없고 닦을 만한 때(垢)가 없어서 온갖 모든 법의 종(宗)임을 알겠다.”

이윽고 『종경록』을 요약할 만한 문장이 이어진다.

“중생계(衆生界)가 곧 모든 부처님의 세계(佛界)로되 미혹함 때문에 중생이 되었고,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 중생의 마음이나 깨침으로 인하여 부처님이 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 이후 선종의 조사들이나 염불선의 조사들이 한결같이 강조한 얘기가 바로 이것이다. 부처와 우리가 한 치의 차이도 없다는 것.

『만선동귀집』에서는 선과 염불을 함께 권장하여 선정일치를 강조했다. 평소에 그는 좌선 뿐만 아니라 염불과 송경(誦經)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방편이라 굳게 믿었다. 출가하기 전이었던 20세에도 그는 늘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신심을 키웠다. 출가 후에는 선과 염불을 겸하였다. 즉 낮에는 선의 종지를 밝히고 밤에는 ‘아미타불’을 염하였다. 그는 ‘자성미타(自性彌陀) 유심정토(唯心淨土)’를 주장하여 선과 정토의 일치점을 강조했다. 그야말로 선정쌍수의 수행법이었다.

선의 황금기였던 당대가 지나고 송대가 되자 불교계는 여러 가지 변화의 바람을 맞았다. 선의 대중화와 함께 아미타불을 연불하는 염불선이 대중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영명연수선사가 있었다. 선도 중요하지만 돌아가신 분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염불도 중요하다는 것. 내 마음의 자성을 밝히는 염불이야 말로 진짜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수행이라는 것. 영명연수선사는 그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새가 높은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양쪽 날개가 필요하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힘들다. 선과 염불은 수행의 양쪽 날개다. 근경과 원경이 각각 독립되어 있는 것 같아도 서로 의존하고 예찬의 「용슬재도」처럼 선과 염불도 마찬가지다. 선이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가 부처님의 말씀이라면 선과 염불은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을 내 것이 되게 하는 수행법이다. 내가 부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실천법이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것이 염불이라면 법장비구의 원력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는 선이다. 선과 염불은 둘이 아니다. 하나다. 여산혜원(慧遠, 334~416) 선사로부터 시작된 염불의 전통은 영명연수선사에 의해 송대에 크게 부흥했다. 그래서 영명연수선사는 송대 정토교의 원조로 추앙받는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00호 / 2015년 7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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