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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신명연, ‘금낭화’

기자명 조정육

“사람들이 편안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나를 희생하리”

▲ 신명연, ‘금낭화’, 1864년, 비단에 연한 색, 34×21cm, 국립중앙박물관.

“너희 나라 왕은 인도(天竺) 석가족(刹利種族)의 왕인데 이미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으므로 따로 인연이 있음이요 동이공공(東夷共工)의 종족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산천이 험준한 까닭에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잘못된 견해를 많이 믿어 때로는 천신이 재앙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법문을 많이 들어 아는 승려가 나라 안에 있기 때문에 군신이 편안하고 만민이 화평할 것이다.”

자장율사, 당나라 유학 도중
선덕여왕 요청에 신라 귀국
대국통 되어 황룡사탑 건립
왕실권위 회복하는 데 일조

‘금낭화’는 조화로움 돋보여
괴석을 배치해 안정감 배가

말을 끝낸 문수보살은 범어로 된 4구게를 들려준 후 사라졌다. 감응을 받은 자장율사(慈藏律師,590-658)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636년 중국 청량산(중국 산서성 오대산)에서였다. 그러나 군신이 편안하고 만민이 화평하려면 자신이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다. 답답했다. 자장율사는 해답을 찾지 못한 채 7년을 보냈다. 해답은 귀국을 앞두고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장안에서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타나 자장에게 물었다.

“그대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는가?”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과 이어졌고 남으로는 왜인과 접해 있으며, 또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는 등 이웃의 적들이 어지러우니 이것이 백성들의 걱정입니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으니 덕은 있으니 위엄이 없다. 그 까닭에 이웃 나라가 침략을 도모하고자 하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국에 돌아가면 장차 무엇을 해야 이익이 되겠습니까?”
“황룡사(皇龍寺) 호법룡(護法龍)은 나의 맏아들이다. 범왕(梵王)의 명을 받고 이 절에 와서 호위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들이 항복하고 9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길이 편안해질 것이다.”

643년에 자장은 당나라 황제가 준 불경과 불상 등을 모시고 신라로 돌아왔다. 자장은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에게 아뢰어 탑을 세울 것을 건의했다. 나라에서는 보물과 비단을 보내 백제의 공장(工匠) 아비지(阿非知)를 청했다. 아비지의 지휘로 소장(小匠) 2백 명이 힘을 합쳐 탑을 완성했다. 이 탑이 바로 황룡사구층탑이다. 일연선사(一然禪師,1206-1289)는 『삼국유사』에서 황룡사구층탑 건립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탑을 세운 후 천지가 태평해지고 삼한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때였다. 중국 전진(前秦)왕 부견(符堅)이 보낸 순도(順道)화상에 의해 불상과 경문이 전해졌다.  그 후 법심(法深)과 의연(義淵)과 담엄(曇嚴)이 불교를 전해주었고, 2년 뒤(374)에는 아도(阿道)화상이 중국 동진(東晋)에서 건너왔다. 소수림왕은 초문사(肖門寺 혹은 省門寺)를 지어 순도화상을 머무르게 했다. 이불란사(伊佛蘭寺)에서는 아도화상을 머물렀다. 초문사와 이불란사는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절이다. 공식적인 불교의 수용은 372년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불교가 전래됐다.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중국 동진(東晋)에서 바다를 건너 백제의 서울인 광주(廣州) 남한산(南漢山)으로 들어왔다. 왕은 교외에까지 나가 친히 스님을 맞아들였고 궁중에 모셔 극진히 받들어 공양했다. 가야는 인도(또는 남방)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다. 가야국의 시조인 수로왕(재위:42-199)의 부인 허황옥이 서역의 아유타국에서 올 때 배에 바사석탑을 싣고 왔다. 그 뒤 제8대 진지왕 2년(452)에 왕이 허황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황후가 결혼한 곳에다 왕후사를 세웠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가장 늦게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다 받아들인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미추왕 2년(263)에 고구려승 아도(我道)가 왔다는 설과 눌지왕(417-458)때 고구려승 묵호자(墨胡子)가 왔다는 설 그리고 소지왕(479-500) 때 고구려승 아도(阿道)가 와서 불교를 전해왔다는 기록이 혼재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가 왕실과 귀족의 적극적인 지원에 의해 수용된 것에 반해 신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천신(天神)신앙과 고목(古木)신앙 등의 토착신앙과 귀족세력의 반대로 불교가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불교가 국교로 공포된 것은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지 200여년이 흐른 뒤였다. 527년,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14년에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가 되어 마침내 불교가 공인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지만 가장 크게 융성했다. 특히 법흥왕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대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534년에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가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 영흥사(永興寺), 황룡사, 기원사(祇園寺) 등의 불사가 이어졌다.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가 열렸고(551년), 팔관연회(八關筵會)를 개최했다(572년). 수많은 출가자가 배출되었고, 중국으로 가는 유학승도 생겨났다. 법흥왕과 진흥왕은만년에 머리를 깎고 출가했으며 왕후도 마찬가지였다.

자장율사는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진골(眞骨)출신으로 부모가 부처님 전에 치성을 드려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었다. 자장율사는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수행했다. 고골관은 백골관(白骨觀)이라고도 하는데 시체가 썩어 없어지는 과정을 상상하며 자신의 몸과 일체만물이 무상함을 깨닫는 수행법이다.

그때 조정에서 그를 재상자리에 기용하려 했다. 출가를 결심한 그가 번번이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자 화가 난 왕이 그의 목을 베어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자장은 “내 차라리 하루라도 계를 지키며 죽을지언정 백 년을 파계하고 살기를 원치 않는다.”며 임금의 명을 거절했다. 국왕은 그의 출가를 공식적으로 허락했다. 출가한 그는 산 속에 들어가 마음껏 수행에 정진했다. 새가 과일을 물어다주는 공양을 받으며 천인(天人)이 5계를 주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공부가 부족하다고 느낀 자장율사는 636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청량산에서 7일 동안 기도한 후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았다. 그 후 장안(長安)으로 들어가 당태종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그의 도력으로 신이한 일이 발생하자 날마다 그에게 계를 구하는 사람이 천 여 명에 이르렀다. 번거로움을 느낀 자장율사는 종남산(終南山)으로 자리를 옮겼다. 종남산은 남산종(南山宗)의 개산조인 도선(道宣)율사가 법을 펼친 곳이다. 종남산에서 3년을 보낸 자장율사가 다시 장안으로 갔다. 이번에도 태종은 비단과 선물을 보냈다. 그 때 마침 선덕여왕이 사신을 보내 자장율사의 귀국을 요청했다. 자장율사가 태화지에서 신령스러운 사람을 만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선덕여왕은 귀국한 자장율사를 분황사(芬皇寺)에 머무르게 했다. 자장율사는 분황사에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강의했고 황룡사에서는 보살계본(菩薩戒本)을 설했다. 그가 설법할 때는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강당을 덮었다. 선덕여왕은 그를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 출가자의 일체 법규를 위임했다. 대국통이 된 자장율사는 신라의 교단을 쇄신했다. 각종 불사를 담당하고 계율을 정비해 호법(護法)보살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승려에게는 보름에 한 번씩 계를 설법했고 겨울과 봄에는 모두 시험을 치러 지계(持戒)와 범계(犯戒)를 알게 했다. 순사(巡使)를 보내 지방 사찰을 돌며 승려들을 감독하게 했고 경전과 불상을 관리하도록 했다. 이때에 이르러 나라 안 사람들이 계를 받고 부처를 받드는 일이 열 집에 여덟아홉이었고, 출가하기를 청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늘었다.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여 당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탑 속에 봉안한 후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하였다. 태백산의 석남원(石南院:지금의 정암사), 강릉의 수다사(水多寺), 울산의 태화사(太和寺) 등 수많은 절을 지었다. 자신이 태어난 집을 고쳐 원녕사(元?寺)라 바꾼 뒤 화엄경을 강의했다. 강원도 오대산을 문수도량으로 가꾼 사람도 자장율사였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장율사가 한 일 중에 가장 큰 역할은 역시 황룡사구층탑의 건립이었다.

‘하트’ 모양의 분홍꽃이 휘어진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아름다움은 꼭꼭 싸 두어도 쏟아져 내리는가. 진분홍빛 꽃송이가 끝나는가 싶더니 꽃잎 끝이 살짝 열리며 흰 속살이 드러난다. 제 마음을 조금만 보여드릴 테니 부디 저를 잊지 마셔요. 얼굴 붉히며 고개 숙인 모습이 마치 꽃등을 걸어 놓은 듯 아름답다. 화려하지도 않고 수수하지도 않으나 한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없는 꽃, 금낭화다. 금낭화(錦囊花)는 금주머니꽃이라는 뜻이다. 꽃 속에 금빛 꽃가루가 들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줄기가 등처럼 휘어지고, 꽃이 모란처럼 아름다워 ‘등모란’ 또는 ‘덩굴모란’으로도 부른다. 금낭화는 양귀비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꽃의 생김새가 어린아이들이 세뱃돈을 넣어 두던 비단 복주머니를 닮았다. 또 옛 여인들이 지갑 대신 치마 속에 넣고 다니던 주머니와 비슷해 ‘며느리주머니’라 부른다. 금낭화의 어린 순은 ‘며늘치’라 한다.

금낭화를 소재로 그린 그림은 많지 않다. 특히 신명연(申命衍:1809-1886)이 그린 「금낭화」처럼 꽃의 고운 자태가 은은하게 살아 있는 작품은 찾기 힘들다. 사대부 화가 애춘(?春) 신명연은 대나무를 잘 그린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의 아들이다. 형 소하(小霞) 신명준(申命準)과 함께 삼부자가 모두 시서화에 뛰어났다. 그는 산수, 사군자, 화조 등 여러 분야에 능했는데 특히 채색화조화를 잘 그렸다. 세련된 색상과 참신한 발상은 동시대 작가인 남계우(南啓宇), 김수철(金秀哲), 전기(田琦), 홍세섭(洪世燮) 등의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운수평(?壽平), 나빙(羅聘) 등 청(淸)대에 활동한 작가들의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여 신선하면서도 장식적인 화면으로 화단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이들에 의해 19세기 화단에 등장한 화풍을 ‘신감각파’ 혹은 ‘이색화풍’이라 부른다.

「금낭화」는 양귀비, 옥잠화, 원추리, 수국, 난초, 백합, 연꽃 등과 함께 『산수화훼도첩(山水花卉圖帖)』에 들어있는 작품이다. 이 화첩은 19점의 꽃그림과 21점의 산수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나이 56세 때인 1864년 10월 하순에 제작했다. 「금낭화」는 『산수화훼도첩』에 들어있는 19점의 꽃 그림 중에서 그다지 눈에 띄는 작품은 아니다. 평면적인 선과 장식적인 색으로 꽃의 자태가 가장 아름답게 돋보인 작품은 백합, 연꽃, 옥잠화 등이다. 그에 비하면 「금낭화」는 있는 듯 마는 듯하다. 소박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낭화」에 눈길이 자꾸 가는 것은 자연스러움과 조화로움 때문이다. 이런 느낌은 소재를 풀어내는 기법에서 우러난다. 금낭화의 잎과 줄기, 배경이 되는 바위는 몰골법(沒骨法)으로 처리했다. 윤곽선 없이 채색을 바로 사용함으로써 연약한 꽃나무의 생리를 실감나게 표현했다. 여기에 꽃과 바위는 구륵법(鉤勒法)으로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몰골법만으로 구성된 그림이 ‘매가리가 없는’ 단점을 구륵법이 보완했다.

「금낭화」의 조화로움은 기법에 국한되지 않는다. 소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괴석(怪石)의 사용이다. 괴석은 기이하게 생긴 바위를 뜻한다. 바위는 변하지 않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한다. 거대한 산의 축소판으로 여겨 문인들이 화조와 더불어 즐겨 그렸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은 태호석(太湖石)이라 하여 중국에서는 송대부터 그림에 많이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괴석과 사군자를 곁들여 그리는 것이 유행했다. 특히 조선 말기의 정학교(丁學敎, 1832-1914)가 괴석을 잘 그렸다. 신명연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작가다. 「금낭화」에서도 당시 유행하던 꽃과 바위를 결합한 그림 취향을 반영했다. 금낭화의 뒷배경에 우뚝 솟은 괴석을 그려넣자 갑자기 ‘매가리가 없는’ 꽃그림에 무게감이 실린다. 백합이나 옥잠화를 그린 절지화(折枝畵)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안정감이다. 괴석으로 인해 화면에는 부드러움과 강함, 가벼움과 무거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다. 그 자체로는 별 볼일 없던 괴석이 금낭화의 뒷자리에서 존재감이 드러난다. 꽃의 부드러움은 지키되 결코 주인의 자리를 넘보지 않는 호위 신장 같은 존재감이다.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소재가 이루어낸 조화로움. 그것이 바로 「금낭화」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이유다.

자장율사가 선덕여왕에게 황룡사9층탑과 첨성대 건립을 건의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금낭화처럼 여리고 부드러워 보이는 선덕여왕의 뒤에 바위 같은 튼튼한 호위신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나약한 여자가 왕이기 때문에 나라에 힘이 없다는 얘기를 수시로 들어야 했다. 백제의 침공으로 대야성 등 40여 성의 성이 함락되자 여왕을 향한 공세는 더 심해졌다. 그녀가 자장율사의 귀국을 요청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에 자장율사는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주변 9개 나라로부터 신라를 지키기 위해 황룡사구층탑을 세웠다.

황룡사구층탑은 황룡사장륙존상(皇龍寺丈六尊像)과 천사옥대(天賜玉帶)와 함께 ‘신라 3보’로 일컬어진다. 황룡사구층탑은 1238년 몽고 침입 때 모두 불타버리고 현재는 초석만이 남아 있다. 진흥왕 때 조성된 장륙존상은 거대한 불상이다. 현재는 사라지고 없지만 대좌는 남아 있다. 장륙존상의 크기가 궁금한 사람은 황룡사에 직접 가서 대좌를 확인해보기 바란다. 바닥에 놓인 대좌를 보는 것만으로도 왜 장륙존상이라 했는지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옥대는 하늘이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에게 내려줬다는 옥으로 만든 허리띠다. 왕은 천제를 지내거나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항상 천사옥대를 착용했다. 천사옥대 설화는 왕의 권위를 하늘에서조차 인정해주었다는 뜻을 의미한다. 그러나 왕권이 강했더라면 굳이 천사옥대 같은 설화가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늘의 힘을 빌려서라도 왕권을 강조해야 할 만큼 왕의 자리가 위태로웠음을 반증하는 얘기일 것이다.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기까지 이차돈의 순교가 필요했듯, 진흥왕과 진평왕도 왕권을 지키기 위해 장륙존상과 천사옥대가 필요했다. 선덕여왕도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것이 자장율사가 황룡사구층탑을 건립한 이유다.그는 또한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에게 관리들의 의복을 당나라식으로 바꾸자고 건의했다.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를 폐하고 당나라의 연호로 바꾸자고 건의한 사람도 자장율사였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장율사의 선택은 오로지 한가지만을 위해서였다.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9한(九韓)이 와서 조공하고 왕업이 길이 편안해지기를’ 바라는 심정에서였다. 자장율사의 역할은 금낭화 뒤의 괴석처럼 여왕의 부족함을 채워줌으로써 신라가 안정감을 되찾는 것이었다. 단순히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 때문이 아니었다. 자장율사의 노력 덕분인지 신라는 숱한 어려움을 타개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3보’ 때문에 고구려가 신라를 침범하려는 계획을 중지했다고 전해진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여자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이후 처음이다. 여자 대통령을 금낭화처럼 돋보이게 해 줄 수 있는 괴석 같은 정치인이 나타날 수 있을까. 대통령은 욕을 먹거나 말거나 안중에도 없고 자기 혼자 잘났다고 떠드는 사람 말고 대통령을 대신해 기꺼이 오물을 뒤집어 쓸 줄 아는 사람. 국민들이 편안해질 수 있는 길이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호국(護國) 정치인. 그런 사람이 그립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02호 / 2015년 7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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