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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김홍도, ‘남해관음’

기자명 조정육

원효, 한국불교의 첫새벽이자 영원한 빛

▲ 김홍도, ‘남해관음’, 비단에 연한 색, 34×20.6cm, 간송미술관.

‘아, 몹시 목이 마르구나.’

황폐한 무덤 속에서 잠을 자던 원효(元曉,617~686)대사는 심한 갈증으로 잠이 깼다. 곁에서 의상(義湘,625~702)대사의 고른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 위해 항구로 향하던 두 사람은 직산(?山:천안)에서 밤을 맞아 무덤 속에서 눈을 붙였다. 이번 유학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10여 년 전에도 그들은 유학을 시도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당나라의 국경인 요동에서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첩자로 오인 받아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수십일 만에 간신히 빠져 나와 목숨은 건졌지만 당나라 유학은 좌절되었다. 그런 후 10년 세월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원효대사의 나이도 어느덧 45세였다.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해골물 마시고 홀연 깨쳐
환속 후 대중교화 길 걸어

‘남해관음’ 불화인 동시에
종교화의 격식 벗은 예술

컴컴한 어둠 속에서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낀 원효대사는 물을 찾아 더듬거렸다. 그때 마침 물이 담긴 둥근 바가지가 손에 잡혔다. 원효대사는 바가지를 들어 시원하게 물을 마셨다. 물맛이 아주 좋았다. 생명수를 마신 듯 갈증이 해소된 원효대사는 편안하게 다시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원효대사 눈에 어젯밤에 물을 마셨던 바가지가 들어왔다. 해골바가지였다. 갑자기 속이 뒤틀린 원효대사는 심한 구토를 느꼈다. 알고 보니 자신이 생명수라고 생각하며 마신 물은 시체가 썩은 물이었다. 웩웩거리며 토하는데 그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내려쳤다. 똑같은 물인데 어젯밤에는 맛있던 물이 오늘 아침에는 역겨웠다. 이것은 물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더럽다고 느낀 것이 아닌가. 원효대사는 마음에 대해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탄식하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듣건대, 부처님께서는 삼계유심(三界唯心)이요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 하셨다. 그러니 아름다움과 나쁜 것이 나에게 있고, 진실로 물에 있지 않음을 알겠구나.”

이 진리를 깨쳤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 당나라로 갈 필요가 없었다. 원효대사는 의상 스님을 뒤로 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문무왕 원년(661)의 일이었다. 초등학생조차 알고 있을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 이야기는 영명연수(永明延壽)선사의 ‘종경록(宗鏡錄)’에 적혀있다.

원효대사는 성이 설씨(薛氏)로 동해 상주(湘州) 사람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으로 15세쯤에 출가했다. 그는 낭지(郞智), 보덕(普德), 혜공(惠空) 스님에게 배웠다. 자신보다 8세 어린 의상 스님과는 평생 불법을 함께 한 도반으로 지냈다. 원효대사가 젊은 시절에 어떻게 수행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원효대사가 쓴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을 보면 그가 참된 수행자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좋은 음식으로 길러도 이 몸은 무너질 것이고, 부드러운 옷으로 보호해도 목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백 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종하랴. (…)사대는 흩어지니, 내일 살기 기약 없고, 오늘은 이미 저녁,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리라.”

당나라 유학길에서 되돌아온 원효대사는 요석(瑤石)공주를 만나 설총(薛聰)을 낳은 후 환속한다. 승복을 벗은 후부터는 자신을 소성거사(小性居士) 혹은 복성거사(卜性居士)라 부르며 대중교화를 펼친다. 파계한 스님인 만큼 걸림이 없었다. 그는 술집이든 기생집이든 여염집이든 마음대로 다녔고 광대, 백정, 술장사 등 누구라도 만났다. 그들 모두 불성에 있어서는 귀족과 한 치의 차이도 없는 똑같은 부처였다. 원효대사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교화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시골마을을 노래하고 춤추고 돌아다니면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사람들까지도 부처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했다. 우연히 광대들이 춤출 때 쓰는 큰 박을 얻어 무애(無碍)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원효대사가 승복을 벗고 무애를 두드리며 민중을 교화한 데는 깊은 이유가 있었다. 당시 불교는 왕실과 귀족들을 위해 존재했다. 일반 백성들이나 천민들에게는 감히 넘나볼 수 없는 귀족불교였다. 자장율사나 원광법사가 귀족불교를 지향했다면 원효대사는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았다. 불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전부 교화대상이었다. 원효대사에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줄 수 있는 곳이라면 세간과 출세간이 따로 없었다. 이런 원효대사를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 스님은 ‘불기(不羈)의 자유인’이라고 표현했다. 굴레가 없다는 뜻이니 매인 곳이 없다는 말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벗어버리면서까지 대중교화에 나선 원효대사야말로 진정한 보살정신의 실천자였다. 그는 ‘불기의 자유인’의 모습을 이론적으로 규명하여 ‘이장장(二障章)’을 남길 정도로 이론과 실천이 합일된 수행자였다.

원효대사는 환속한 후 단지 대중교화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전법 못지않게 학문 연구에도 매진했다. 그는 환속한 몸으로 절에서 머물며 강의를 하고 저술에 집중했다. 55세에 행명사(行名寺)에서 ‘판비량론(判比量論)’을 저술했고, 분황사에서는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지었다. 황룡사에서는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강의했고, 혈사(穴寺)에서 입적했다. 그는 일생에 걸쳐 80부 150여 권에 이르는 저술을 남겼다. 그 내용이 모두 도리에 정통하고 입신의 경지에 도달함이 ‘문장의 전장을 영웅처럼 누비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이 심원하고 깊이 있는 내용의 저서를 100권 이상 남긴 사람으로는 신라의 원효대사, ‘지도론’을 쓴 인도의 용수보살, ‘종경록’을 쓴 중국의 영명연수대사 정도를 들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원효대사의 저술은 대부분 산실되고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온전히 전하는 것은 ‘대승기신론소’ ‘화엄경소’ ‘금강삼매경론’ ‘이장의’ ‘십문화쟁론’ 등 13부 17권에 불과하고 12부 안팎이 부분적으로 전해질 뿐이다. 모두 다 소성거사 신분인 원효대사가 집필한 책들이다.

원효대사의 학문적 관심사는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았다. 매우 다양했다. 그러나 소승계통의 저술이 없는 것을 보면 주된 관심사가 대승경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화엄학과 유식학에 대한 관심이 컸다.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원효대사를 ‘화쟁국사(和諍國師)’로 추증했다. 중국을 다녀온 유학승들이 종파적 성격이 강한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아 분열되고 대립하던 것과는 달리 원효대사는 화회(和會)와 회통(會通)을 강조했다. 갈등과 대립을 넘어선 원효대사의 화쟁주의는 중국불교와 다른 한국불교의 전통이라 할 수 있다. 12세기에 원효대사를 교조로 한 해동종(海東宗)이 창시된 것도 화쟁이야말로 한국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자각이 있어서였다.

원효대사의 가르침과 실천은 신라사회를 넘어 중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십문화쟁론’은 중국을 넘어 인도에까지 번역되어 전해졌다. ‘금강삼매경론’은 당나라에서 소(疏)가 논(論)으로 격상되었고 ‘대승기신론소’는 해동소(海東疏)로 불리었다. ‘화엄경소’는 중국 화엄학의 집대성자 법장(法藏)의 저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는 8세기 중반 나라(奈良)시대에 원효대사가 쓴 책이 많이 유통되었다.

바다에서 솟았을까.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심하게 요동치는 푸른 파도 위에 서 있다. 불구불한 천의(天衣)가 밑으로 향할수록 옆으로 퍼져 파도와 조화를 이루면서 관음보살이 마치 바다 속에서 방금 솟구친 듯 생생하다. 먹의 농담(濃淡)에 의한 필선(筆線) 변화가 자연스럽게 표현된 작품이다. 머리에는 화관(花冠)을 쓰고 머리카락은 양 어깨 위로 내려뜨렸다. 머리에는 보름달 같은 두광(頭光)이 눈부시다. 두광의 가운데는 색을 칠하지 않고 주변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였다. 홍운탁월(烘雲拓月)법이다. 달과 어둠의 경계선은 어디일까. 두광을 그린 선은 예배용 불화(佛?)에서처럼 자로 잰 듯 정확하게 그리는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린 관세음보살은 만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괴로움에 빠진 중생이 아무리 많다 해도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모두 거둬 줄 것 같은 미소다.

관세음보살 뒤에 숨어 고개를 반쯤 내민 선재동자는 엄마 뒤에 숨은 아이 같다. 53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하는 비장한 수행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마음이 선재동자의 긴장된 마음을 무장해제 시켰으리라. 선재동자는 버들가지를 꽂은 정병(淨甁)을 들고 있다. 정병은 중생의 갈증을 없애주는 감로수를 담고 있다. 버들가지는 중생의 병을 치료해주고 고통을 소멸시켜 준다. 관세음보살은 정병과 버들가지로만 중생의 갈증을 없애주고 고통을 치료해준다.

그림 오른쪽에는 ‘단원(檀園)’이라고 적혀 있다. ‘단원’은 김홍도가 1784년(40세) 이후부터 즐겨 쓰던 호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가 그린 ‘남해관음(南海觀音)’은 예배용이 아니라 감상용으로 그린 작품이다. 제목을 특별히 ‘남해’ 관음으로 한 이유는 관세음보살이 인도 남쪽 바닷가의 보타락가산에 있기 때문이다. ‘남해관음’은 경전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한 불화이면서 종교화라는 격식을 벗어버린 예술작품이다. 그래서 특별히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불교를 말하지 않으면서 불교를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 ‘남해관음’이다. 마치 원효대사가 환속한 후 소성거사와 복성거사로 살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것과 같다. 이것이 우리가 김홍도를 화성(?聖)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소성거사를 원효거사가 아니라 원효대사라고 부르는 이유다. 우리나라에는 수승한 스님과 기량이 뛰어난 화가가 무척 많다. 그 중에서도 원효대사와 김홍도는 감히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분들이다. 원효대사가 저술과 중생교화로 ‘첫새벽’이 되었듯 김홍도는 ‘남해관음’을 완성했다. ‘첫새벽’을 의미하는 원효는 ‘부처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다. 원효대사는 우리 불교사에서 첫새벽이자 영원한 새벽이다. 김홍도가 우리 회화사에서 그러하듯.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1303호 / 2015년 7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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