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조선 정관이 사명당에게
29. 조선 정관이 사명당에게
  • 이재형 기자
  • 승인 2015.09.08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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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왜적이 물러갔으니 다시 납의 걸치고 지혜 밝히소서”

왜적 침입으로 나라 위기 처하자
서산대사, 승병으로 나설 것 호소

유정도 금강산서 150명 모아 참전
평양성 탈환 등에 혁혁한 공 세워

전쟁 뒤에도 일본 건너가 담판
붙들려갔던 조선인 3000명 송환

산중 머물던 정관은 승병에 부정적
환속자 늘고 지계 풍토 해이 탄식

유정에게 이제는 돌아올 것 요청
일본 떠날 때는 무사귀환 기도

“아아, 불법이 쇠하고 세상도 극히 어지러우니,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승려들도 편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더욱 슬픈 일은 승려가 속인의 옷을 입고 군사로 몰려 나가 동서로 쫓아다니면서 적의 손에 죽거나 속가로 도망치기도 하니 속세의 습관이 승려들 사이에 다시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출가한 뜻을 잊어버리고 계행(戒行)을 아주 폐하여 헛된 명성을 구해 불처럼 달려가 돌아오지 않으니 선풍(禪風)이 장차 그치게 될 것이외다.
듣건대 지금 왜적은 물러갔고 큰 공은 이미 이루었으므로 대궐에 나아가 사퇴를 청하기보다는 그냥 떠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원컨대 군복 대신 (출가사문이 입는) 납의(衲衣)를 다시 걸치고 깊은 산에 들어가 종적을 감추소서. 그리하여 시냇물을 움켜 마시고 비름나물을 삶아 먹으면서 선정의 물을 맑히고 지혜로운 달을 다시 밝혀서 반야의 자비로운 배에 올라 곧장 보리를 얻으시길 간곡히 축원합니다.”

임진년(1592년) 4월 시작된 왜란은 전 국토를 피로 물들였다. 수십만 명이 전란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시신들은 거리에 나뒹굴었다. 자식 잃은 부모, 부모 잃은 자식의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용케 살아남은 이들도 굶주림과 질병으로 다음 날을 기약하기 어려웠다. 지상에 펼쳐진 참혹한 풍경은 차라리 지옥도에 가까웠다.

왜란은 불교계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몸을 피한 선조가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휴정은 자신이 직접 통솔해 싸움터에 나가겠노라 다짐했다. 감격한 선조는 그 자리에서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휴정은 전국의 제자들에게 격문을 보내 승려들이 누란의 위기를 맞은 나라를 지키는 데 적극 나설 것을 호소했다. 이에 각지에서 승병이 조직됐고, 그들은 목탁과 죽비 대신 칼과 창을 움켜쥐었다. 금강산 건봉사에 머물던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도 늙은 스승의 뜻에 기꺼이 동참했다. 비록 불교가 ‘불살생’을 첫째 계율로 내세우지만 무고한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상황에서 홀로 산사에 편안히 머무를 수는 없었다.

유정은 승려들에게 말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은 원래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왜적들이 흉한 무기를 쓰지 못하게 하는 일이 곧 자비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 사명 유정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전장에 뛰어들었으며, 외교협상에 임해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림은 1773년 제작된 밀양 표충사 사명대사 진영.
유정은 왜적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행패를 부릴 때 왜장과 만나 필담으로 불교의 자비를 설해 철병토록 했으며, 그 덕에 영동의 9개 군도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런 유정이 승군 참여를 호소하자 곧바로 150여명의 승병이 모여들었다. 유정은 이들과 함께 왜군이 주둔하고 있는 평양성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승군으로 참여하겠다는 이들도 많았다. 휴정 휘하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으로 임명된 유정은 2000여명의 승군을 이끌고 게릴라전을 펼쳤다. 평양과 중화를 오고가는 적을 공격해 보급로를 차단했다. 파죽지세의 왜군 앞에 전의를 상실했던 관군과 의병들도 승군의 활약에 사기가 크게 진작됐다. 몇 달 뒤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에도 유정은 산을 잘 타는 승병들과 함께 큰 공을 세웠다. 평양성을 탈환하자 유정은 다시 권율과 함께 영남에 내려가 다시 전공을 세웠으며, 장기전에 대비해 병량과 병기 준비에 온힘을 기울였다.

학식과 인품, 거기에 담대함까지 갖춘 유정은 이순신, 곽재우 등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유정은 7년 전쟁 동안 전투와 평화협상이라는 두 축을 오고가며 때로는 장수로서 때로는 외교가로서 활약했다. 특히 유정은 조선 침략의 실질적인 책임자 중 한 명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의 진영에 직접 찾아가 담판함으로써 외교적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가토 기요마사와 오고 갔던 유명한 일화도 이 무렵 있었던 일이다. 가토가 “조선에 보배가 있는가?”를 묻자 유정이 “없다. 보배는 일본에 있다”고 말했다. 가토가 이유를 묻자 유정은 “우리나라에서는 당신의 머리를 보배로 여기고 있다. 그러니 보배가 일본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답해 가토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유정은 1594년부터 여러 차례 적과 회담했고, 뛰어난 판단력과 지략으로 왜군의 허실과 국제 정세의 흐름을 파악했다. 그리고는 그 내용과 방책을 선조에게 보고하는 등 유리한 국면 전환을 위해 노력했다. 유정은 여러 지역의 산성 수축에도 적극적이었다. 잠시 전쟁이 멈췄을 때를 이용해 승군들과 팔공산성을 완성했으며 선산 금오산에도 성을 쌓았다. 또 냉천전투, 울산 도산성전투, 예교전투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그간 산사에 비축했던 많은 쌀과 물품을 나라에 내놓았다. 선조는 이런 유정에게 “환속한다면 100리를 다스릴 책임을 맡길 것이요, 3군을 통솔할 장수가 되게 해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유정은 선조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은 승려였고, 다만 전쟁이 자신을 싸움터에 머물도록 했을 뿐이었다.

1598년 전쟁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사망하고 그해 11월 왜적이 모두 물러갔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전쟁이 7년 만에 막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전쟁이 남긴 상처는 엄청났다. 국토는 황폐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 통에 죽거나 일본에 끌려갔다. 깊은 절망과 상실감…. 그렇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견뎌내야 했다.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괭이와 호미를 움켜쥐도록 했다.

왜란은 불교계에도 심각한 후유증을 불러왔다. 싸움터로 나간 승군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둘 환속하는 일들이 속출했다. 갓 출가한 사미부터 수십 년간 절밥을 먹은 승려들까지 법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지계의식은 희박해졌고, 이를 바로 잡을 유능한 지도자도 찾기 어려웠다.

▲ 인조 19년(1641) 안심사에서 제작된 목판으로 정관일선 스님의 시문을 새긴 정관집판(靜觀集版).
휴정의 상수제자인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다. 15살에 출가해 선과 교학을 함께 닦던 정관은 나중에 휴정으로부터 깨달음을 인가받은 선승이었다. 임진왜란은 그가 60살 되던 해에 일어났다. 스승 휴정이 승군으로 참여할 것을 호소할 때 정관은 직접 종군하지 않고 산중수행과 기도에 전념했다.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가는 전쟁의 참화가 더 없이 비통했지만 정관은 직접 칼을 들고 적과 마주해 싸우는 것이 승려의 본분이라 여기지 않았다. 수도와 기도를 통해 백성을 위로하고 선풍(禪風)을 유지하는 것도 불살생계를 지켜야하는 불교수행자의 길이라 믿었다. 그러나 승려들이 전장에 적극 뛰어들면서 묵묵히 진리의 길을 걷는 일을 가벼이 여기는 풍토가 확산됐다.

정관은 사제인 유정이 여느 승려들과 다름을 익히 알았다. 그가 돌아오면 잘못된 불교계의 흐름도 크게 바뀔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동시에 정관은 유정이 차돌 같은 마음과 송죽 같은 절개를 지녔더라도 오래 머물다보면 명리에 물들 지 않을까 우려했다. 혹여 유정이 바른 소리를 하다가 누명이나 오해를 받아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뒤 정관은 유정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당시 유정은 조정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남방 해역에 성을 쌓고 승병을 동원할 수 있는 실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유정은 편지에서 자신의 안부를 간곡히 묻고 있었다. 또 대궐에 나아가 사퇴를 청한 뒤 승려의 본분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얘기도 적었다.

정관은 기뻤다. 유정이 자신을 잊지 않고 있음과 다시 산중으로 돌아오려 한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다음 날 정관은 긴 답장을 썼다. 승려들이 전쟁터에 나간 후 환속하는 일이 잦아졌고, 출가의 본뜻을 잊고 계행을 폐하는 일까지 생겨나고 있음도 알렸다. 또 이왕 군복을 벗고 납의를 입기로 결심했으면 조정에 아뢰지 않고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도 전했다. 그러고는 가난을 벗 삼아 선정의 물을 맑히고 지혜의 달을 밝히기를 간곡히 축원했다.

임진왜란의 시작부터 전장을 누벼야 했던 유정. 정관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는 산사를 잊은 적이 없었다. 때로 유정은 시로써 자신의 심정을 드러냈다. ‘형산에 토란 굽기 실로 내 소원인데/ 벼슬에 살찐 말이 어찌 본분이랴./ 장해에 10년 동안 부질없이 수자리 살았나니/ 향성 어느 날 돌아갈 기약 정할는지.’

유정은 왜군의 총칼에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과감히 칼을 들었다. 하지만 그 살생의 업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남의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였으니/ 남도 또한 내 형을 죽였으리라./ 어찌하여 너에게 돌아오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남의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였나.’

출가자로서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 어찌 마음 편할까. 자신의 칼에 죽어가는 왜군도 억지로 전쟁터에 끌려나온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자 하늘 같은 지아비이지 않겠는가. 그 귀한 목숨을 끊어내는 일이다. 하지만 유정은 살생의 과보로 아비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지금 당장 무참히 죽어가는 백성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1604년 2월, 유정이 스승 휴정의 입적 소식을 듣고 급히 묘향산으로 향할 때였다. 유정은 곧바로 입궐하라는 조정의 연락을 받았다. 스승의 마지막조차 지킬 수 없음을 한탄하면서도 나라를 위하는 일이 스승의 뜻임을 알았기에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선조는 그런 유정에게 비공식 정탐 사절단을 맡아 일본에 다녀올 것을 요청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에 그 많은 사대부들이 꺼려했지만 유정은 주저치 않고 선조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해 8월, 유정은 환갑을 넘긴 노구를 이끌고 부산 다대포를 떠나 일본 대마도로 향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정관은 안타까웠다. 유정은 이번에도 산중에 머물겠다는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없었다. 정관이 어찌 유정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할까. 그는 유정에게 편지를 썼다. “멀리 큰 물결을 헤치고 곧장 호랑이 입속에 들어가는 지라 그 생각만 해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곧장 강가로 가 전송하고 싶지만 늙어 가지 못하니 괴로울 뿐입니다.”

이후 정관은 ‘관음기도문’을 작성해 유정을 위해 매일 기도했다.
“송운(유정) 스님에게 불가사의한 힘을 주시어 적의 소굴 벗어나게 하시고, 두려움이 없는 위엄에 의지해 조속히 오랑캐 땅에서 돌아오게 하소서. 빨리 배를 타고 순풍에 돛을 달아 고래 같은 파도를 헤치며, 가벼운 노를 빨리 저어 눈 깜짝할 새에 이쪽 언덕에 이르게 하옵소서.”

유정은 대마도, 시모노세키, 오사카를 거쳐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를 만났다. 일본을 통일한 최고 권력자 도쿠가와는 유정을 만나자 곧바로 글을 써서 내밀었다. ‘돌 위에는 풀이 나기 어렵고 방 안에는 구름이 일기 어렵다. 그대는 어느 산의 새이기에 봉황이 노는 데 왔는가?(石上難生草 房中難起雲, 汝爾何山鳥 來參鳳凰群)” 봉황이 있는 곳에 하잘 것 없는 산새가 끼어들었다는 야유였다. 이에 유정은 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갔다.

“나는 본래 청산학이어서 항상 오색구름 위에 노닐었는데, 하루아침에 운무가 사라져서 야계(꿩)들이 노는 데 잘못 떨어졌다!(我本靑山鶴 常有五色雲, 一朝雲霧盡 誤落野鷄群)” 당신들은 봉황이 아니라 꿩의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답변이었다. 유정의 담대함과 번뜩이는 선기(禪氣)에 도쿠가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회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유정은 도쿠가와와 300년간 지속될 평화조약을 이끌어냈다. 특히 도쿠가와와 담판을 지어 임진왜란 때 붙잡혀간 조선인 3000여명과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유정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유정을 대마도로 파견했던 조정도 그가 도쿠가와와 직접 만나거나 피로인(被擄人) 쇄환을 이루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감격한 선조는 유정에게 어마(御馬)와 모시옷 한 벌을 하사했다.

그러나 조정보다 더 기뻐한 건 백성들이었다. 세간의 이야기꾼들은 유정을 일본의 왜왕까지 항복시킨 도승으로 추켜세웠다. 유정이 일본에서 불에 빨갛게 달군 철마를 탔는데 멀쩡했다거나 불을 지핀 무쇠방에서 하룻밤을 지낸 유정의 수염에 고드름이 맺혔다는 신통력 얘기들도 했다. 현실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원수의 나라 일본을 상대로 통쾌하게 복수한 민족의 영웅으로 떠오른 것이다.

▲ 사명 유정이 입었던 장삼.
1605년 5월, 귀국한 유정은 백성의 환호성을 뒤로 하고 얼마 뒤 오대산을 거쳐 묘향산 보현사로 향했다. 서산대사영탑전에 다다른 유정은 정성껏 절을 한 뒤 자신이 지은 글을 읽어나갔다.

“법은(法恩)을 받은 것이 하늘과 같고 은덕을 입은 것이 땅과 같으니 (스승을 잃은) 비통함이 골수에 사무칩니다.… (스승님이) 가르쳐 주시는 자리에 다시 참여할 겨를도 없이 벌써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셨으므로 목소리와 모습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지팡이와 신발을 어루만지며 가슴아파합니다.”

휴정의 상을 치는 유정은 문도들과 논의해 금강산 유점사에 사리탑을 세웠다. 치악산에 머물던 유정은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한양에 올라와 배곡하고 멀리 해인사로 향했다. 그러나 전란은 유정의 몸 구석구석에 깊은 병을 심어놓았다. 광해군이 직접 보낸 약도 소용없었다. 1609년 2월 유정은 해인사 홍제암에서 “네 가지 요소로 된 이 몸은 이제 장차 참(眞)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남기고 적멸에 들었다. 허균은 중생을 위해 어떤 고난의 길도 마다하지 않았던 유정을 위해 ‘널리 중생을 제도했다’는 의미를 담아 ‘홍제존자(弘濟尊者)’라 추존했다.

바리때 하나로 청정수행과 출세간의 도를 지향했던 정관. 전쟁에서 죽어간 이들을 위해 천도재와 수륙재를 베풀고 후학 양성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그는 유정보다 한 해 앞서 정토로 향했다.

평생 호법(護法)의 삶의 살았던 정관이 호국(護國)의 길을 걸었던 유정에게 보낸 편지는 ‘정관집’에 수록돼 있다.

mitra@beopbo.com

참고자료 : ‘사명당대사집’(사명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동국대학교출판부), ‘송운대사분충서난록’(신유한 엮음, 이상현 옮김, 동국대학교출판부), ‘정관집’(일선 지음, 배규범 옮김, 지만지 고전선집), ‘사명당평전’(조영록 지음, 한길사), ‘정관일선의 생애와 정토사상 연구’(한태식(보광), 정토학연구 제21집), ‘삼국, 통일신라, 고려의 승병사를 통해본 사명대사 의거의 의의와 인간적·종교적 비극성’(블라디미르 티호노프(박노자), 불교연구 17집), ‘사명당 유정의 승병활동과 공공행복’(김방룡, 동서철학연구 제66호)
 

[1307호 / 2015년 8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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