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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저자 백운화상 공백기 행적 찾았다

  • 교학
  • 입력 2015.09.15 20:17
  • 수정 2015.09.22 08:23
  • 댓글 0

최연식 동국대 사학과 교수
장곡사 발원문 분석해 발표

발원문 쓰고 권선한 ‘백운’은
여말삼사 고승인 백운과 동일
50세 이전엔 교화 활동 주력
명성 힘입어 국가 기우제 주관

태고보우 영향으로 선에 관심
약사여래 신앙관도 새롭게 구명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불조직지심체요절’을 편찬한 고려 백운경한(1299~1374) 스님이 선사로 활동하기 전에는 간화선과는 무관하게 기도와 교화에 주력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연식 동국대 사학과 교수는 미술사연구회(회장 정은우)가 9월12일 국립중앙박물관 교육관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청양 장곡사 발원문 분석을 통해 50살 이전의 백운화상 행적에 대해 처음 밝혔다. 또 약사여래가 생전과 사후의 어려움을 의지하는 고려인들의 친근한 신앙대상이었음도 새롭게 구명해 큰 관심을 모았다.

장곡사 발원문은 1950년대 하대웅전에 봉안돼 있는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 복장(腹藏) 조사에서 발견된 것으로 길이 1058cm, 너비 48cm 크기의 붉은 대형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앞부분 115cm 정도에는 발원문이 적혀 있고, 나머지 부분에는 약사여래좌상 조성에 참여한 1078여명의 이름이 빼곡히 기록돼 있다. 특히 1346년인 고려 충목왕 2년, 많은 사람들의 발원에 의해 불상이 제작·봉안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고려시대 약사불 조성 및 발원에 관한 유일한 자료이기도 하다.

▲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백운 스님 발원문. 사진은 백운 스님이 자신의 이름을 쓰고 수결한 발원문 부분으로 개성 있는 글씨체와 수결이 인상적이다.  정은우 미술사연구회장 제공
최 교수가 이 발원문에서 주목한 것은 발원문 마지막에 등장하는 ‘백운(白雲)’이라는 이름이다. 그동안 발원문에는 ‘친전사(親傳師) 백운’이라는 이름과 함께 수결이 있어 백운이라는 승려가 제자들에게 금동약사여래상의 조성을 권유하기 위해 작성했음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백운 스님이 누구인지는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있었다.

최 교수는 백운 스님이 ‘고려사’에 같은 해(1346년) 5월 왕명으로 기우(祈雨)의식을 주관하는 승려로 기록되고 있는 ‘백운(白雲)’과 동일한 인물로 보았다.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의 조성과 기우의식 시기가 비슷할 뿐 아니라 1340년대 활동한 승려의 법명 중에 ‘백운’은 백운경한 스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고위 관료들을 비롯해 수많은 재가자들이 따르는 발원문 속 ‘친전사 백운’의 모습은 국왕의 명으로 국가차원의 기우의식을 거행하는 승려로 선발되기에 충분한 명성을 지닌 점도 꼽았다. 더욱이 장곡사 발원문 내용 중에 ‘가뭄이 들 때에는 단비를 내려주시고’라는 표현도 백운 스님의 기우의식과 상통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백운 스님은 태고보우·나옹혜근 스님과 더불어 고려말 3명의 고승[麗末三師]으로 일컬어진다. 54살 되던 해인 1351년 중국으로 건너가 태고 스님의 스승인 석옥 선사와 나옹 스님의 스승인 지공 법사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했다. 이후 백운 스님은 공민왕의 지원을 받으며 불교계를 이끌어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50대 초반까지의 활동에 대해서는 어떤 내용도 알려져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런 가운데 장곡사의 이번 발원문은 ‘직지’의 저자인 백운 스님이 중국에 유학가기 전의 행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평가다.

최 교수에 따르면 백운 스님은 40대 후반 무렵 고위 관료를 포함한 다수 신도들의 추앙을 받는 동시에 기우의식을 거행할 정도로 신성한 능력을 갖춘 고승으로 인정받았다. 또 발원문에 기록된 제자들 대부분이 재가신자라는 점도 백운 스님이 대중포교에 노력을 기울였던 저명한 인물이었으며, 국가적 기우의식의 집행자로 선발될 수 있었던 배경에 이런 대중적인 명성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발원문에 간화선적인 요소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당시 백운 스님은 기도와 교화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간화선과는 아직 관련을 맺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백운 스님이 간화선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1348년 중국에서 귀국한 태고 스님의 영향일 것으로 보았다. 태고 스님은 원나라 황실의 귀의를 받아 설법을 하는 등 명성을 크게 떨쳤으며, 귀국 후에는 간화선 열풍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백운 스님도 자연스레 간화선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태고 스님 문하에서 수행하다가 나중에는 석옥 선사를 찾아 중국까지 다녀왔을 것으로 파악했다. 최 교수는 백운 스님이 자신보다 2살이나 적은 태고 스님을 스승으로 높이며 그 가르침을 따르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점도 근거로 제시했다.

최 교수는 장곡사 발원문이 고려시대 약사신앙의 모습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임도 밝혔다. 기존 자료에는 약사여래에 대한 기원 내용이 질병이나 외적의 침입, 사회적 혼란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 발원문에는 장수나 정토왕생 등 고려시대 약사신앙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이 나타나고 있음을 ‘약사경’과 ‘삼국유사’ 등 문헌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발원문. 이 발원문은 1950년대 장곡사 하대웅전에 봉안돼 있는 금동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 복장(腹藏) 조사에서 발견된 것으로 길이 1058cm, 너비 48cm 크기의 붉은 대형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정은우 미술사연구회장 제공
한편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과 복장유물’을 주제로 열린 이날 학술대회에서 정은우(동아대 교수) 미술사연구회장은 우리나라 복장유물 개봉의 첫 공식사례인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유물의 내력에 대해 고찰했으며, 심연옥 한국전통문화대 교수는 금동약사여래좌상 복장에서 나온 직물에 대한 분석과 제작 의미를 밝혔다. 또 신은제 동아대 교수는 백운 스님의 발원문에 등장하는 1078명을 계층별로 분류하고 백운 스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명했다. 특히 신 교수는 발원문에 상층계급 여성들과 하위 관직의 무관, 노비 등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으며, 당시 볼모로 원의 연경에 머물러 있던 공민왕의 몽골식 이름인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가 등장하고 있음도 밝혔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311호 / 2015년 9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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