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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어려움

“노동 개혁은 우리 딸과 아들의 일자리입니다!” 요즘 곳곳에서 만나는 정부 광고다. 광고에 근거하면 정부가 내놓은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이들은 죄다 비판받아 마땅하다. ‘우리 딸과 아들의 일자리’ 마련에 훼방꾼 아닌가.

예서 그치지 않는다. 정부는 감성적 광고를 곰비임비 제작해 내놓고 있다. 가령 나이든 아버지의 자동차를 타면서 딸이 독백한다. “우리 아빠는 듬직하고, 산을 좋아하시고, 웃음만큼 잔소리가 많으세요. 그렇게 30년을 일하시면서 가정을 지키고 나를 키워주셨습니다.” 곧이어 “나도 아빠랑 같이 출근하고 싶다”고 말한다. 임금피크제가 청년 일자리 13만 개를 만든다는 ‘결론’이 뒤를 잇는다. 취업을 준비하는 아들이 등장하는 광고가 앞서 소개한 ‘딸 광고’와 쌍벽을 이룬다. 아들은 저녁을 준비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독백한다. “우리 엄마는 음식솜씨가 좋고 TV를 보면서 남자주인공과 대화를 하시고 눈물만큼 웃음도 많으세요. 그렇게 30년 동안 살림하면서 가족을 지키는 우리 엄마”라고 독백한다. 이어 아들은 저녁을 먹다가 “퇴근하고 먹는 밥맛은 어떨까?” 묻는다. 능력으로 인정받고 정규직 취직이 쉬워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심지어 토목공학과를 졸업했지만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 젊은이를 내세워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해결책은 누구나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광고도 있다. 모두 국민 혈세로 만든 광고다. 전문가의 세련되고 노회한 접근이 엿보인다. 그만큼 제작단가도, 혈세도 많이 들어갔을 터다.

만일 정부 주장만 믿고 어떤 스님이 법회 안팎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거나 어떤 재가자가 ‘노동개혁안’에 적극 동조한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있는 그대로 보라는 붓다의 가르침과 이어질까. 만일 그 광고들이 진실을 호도하는 거짓이라면 어떻게 될까. 세상을 ‘이해’하는 어려움을 여기서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정부 광고들은 하나같이 외면하고 있지만,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이른바 ‘노동개혁’의 핵심은 기업이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해고’하는 ‘일반해고’의 도입이다. 지금까지는 징계해고나 기업이 어려움에 처할 때 정리해고만 가능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도 일하는 데 성과가 부족하다거나 태도가 불량한 사람도 해고할 수 있게 법적으로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광고에서 “능력으로 인정받고 정규직 취직이 쉬워진다”는 주장은 ‘능력 없는 사람’이나 ‘태도 불량자’들을 해고한 뒤 청년들을 고용한다는 의미다. 문제는 그 기준의 애매모호함이다. 기업주가 자신의 자의적 판단으로 얼마든지 해고를 할 수 있다면, 그렇지 않아도 막강한 대기업 가족들의 사내 권력은 절대화될 수밖에 없다. 그 뿐인가. 임금을 멋대로 깎을 수 있도록 하는 ‘취업규칙 변경 완화’도, 비정규직과 파견노동자 사용의 확대도 들어있다.

그럼에도 최소한 청년들의 일자리는 늘어난다고 반론을 펼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그 조차 아니다. 이른바 ‘태도불량자와 무능력자’를 해고하고 임금피크제로 줄어드는 임금을 기업이 청년고용에 쓴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게 쓰지 않고 지금처럼 ‘곳간’에 쌓아두고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한국 사회의 경험에 근거하면 그럴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그렇다면 사부대중은 이 사안에 어떻게 대처해야 옳은가. 사부대중의 사회적 실천에 ‘연기의 이해’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 있다. 종단 어디선가는 현대 사회와 관련된 담론들을 붓다의 가르침대로 진실에 기초해 사부대중에게 그때그때 제공해주고 그것이 콘텐츠로 축적되어가야 한다. 그런 수고 없이 21세기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영향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삶의 연기를 잘 이해하려면 선정의 깨우침과 과학적 판단에 근거한 인식이 두루 필요하다. 본디 ‘이해’의 사전적 의미는 ‘깨달아 앎’이다. 있는 그대로 ‘잘 이해’하기란 그래서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사부대중이 마음을 열고 지혜와 힘을 모아가야 할 이유다.

손석춘 건국대 교수 2020gil@hanmail.net


[1316호 / 2015년 10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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