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일본 일요가 조선의 아버지에게
31. 일본 일요가 조선의 아버지에게
  • 이재형 기자
  • 승인 2015.11.02 13:5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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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돌아갈 때까지 부디 천수 누리며 기다려주십시오”

13살 때 왜군 피해 절에 숨어
왜군에 붙잡혀 적장에 끌려가
칼날 앞에서 한시 써내려가자
가토 기요마사 “범상치 않다”

사명대사와 가까웠던 니쓰신이
제자 삼아 출가시킨 후 지원
일본에 피랍된 지 27년째에
고국 아버지로부터 편지 받아

부디 노력해 귀국할 것 권유
일요도 꼭 돌아가겠다고 다짐
권력자, 불허 방침 후 감시 강화
끝내 귀국 못하고 일본서 입적

“천만 뜻밖의 친서를 받았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두 분 모두 무사하시고, 금슬도 좋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봉서를 뜯고 읽으려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처음 붙잡힌 날부터 지금까지 매일 향을 피우고 부처님께 절을 올렸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28년간 드린 기도의 응답이 아닐까 합니다. 저도 이 편지를 전하는 사람을 따라가서 아버님 어머님에게 절을 드리고 싶은 심정 간절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안고 살았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다면 그날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두 분에게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이 되며, 제게 있어서는 잃어버린 부모님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보내주신 편지를 아침저녁으로 보고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 분께서도 이 편지를 저라고 생각하시고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13살 나이로 일본에 끌려가 승려의 삶을 살았던 일요. 부친의 편지를 받은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끝내 그곳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일본 혼묘지 소장. <출처: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
1620년 10월3일. 일본 구마모토 혼묘지(本妙寺) 주지 일요(日遙, 니쓰요, 1580~1659)는 아직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며칠 전 봉투에 ‘조선국 하동에 사는 아버지 여천갑(余天甲)이 아들 여대남(余大男)에게 보냄’이라고 쓰인 편지를 받으면서부터다.

일요는 지난 27년간 단 하루도 아버지 어머니를 잊고 지낸 날이 없었다. 매일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향을 사르고 부처님에게 절을 올렸다. 때로는 자신이 무슨 죄가 있어서 오랜 세월 낯선 나라에서 지내야 하는지 한탄했다. 하지만 아무리 울거나 원망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눈을 뜨면 여전히 이역만리 일본이었다. 그럴수록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져갔다.

지난 며칠 간 일요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글 위에 가만히 손을 대면 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일요는 그때까지 자신의 부모가 살아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왜군의 칼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직접 보았고, 자신의 고향도 그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음을 잘 알았다. 일요가 어느 날 혼묘지 법회에서 “나는 원래 고려(조선)사람이고 임진왜란으로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라고 얘기했던 것도 살육의 현장에서 부모님이 살아있으리란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직접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네 어미와 나는 통곡하며 마주앉아 울며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잘도 도망 오는데 내 아들 대남이가 돌아오지 않는 것은 필시 부모의 생존을 몰라 그런 것이리라. 그래서 어떻게든 네게 편지를 전하려 했으나 전달할 방도가 없었단다.”

부친 여천갑은 편지에는 아들의 생사를 몰라 밤낮으로 통곡하며 지냈던 일, 정미년(1607년)에 하동 출신 사행원이 일본에서 여대남을 만났다는 소식을 전해준 일, 지난 가을 조선으로 귀환한 하종남으로부터 여대남이 출가해 지금은 구마모토 혼묘지에 있음을 안 일, 자신들은 눈물로 아들을 기다리는 데도 아들은 어찌 그리 무심할 수 있는지, 꼭 돌아와 가업을 이어야한다는 등 얘기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나와 네 어미는 이미 늙었다. 서둘러 너의 주인에게 알리고 너의 스승에게도 알리어라. 그리고 귀국 의사를 간절히 아뢰어라. 배를 타고 바다에 올라 무사히 돌아와서 아버지와 아들이 한 곳에서 만나 남은 생을 같이한다면 그 기쁨은 얼마나 좋겠느냐.”

일요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조선의 산천, 그곳 하동에서 자신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부모가 있음을 깨달았다. 일요는 반드시 부모의 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일요의 조선 이름은 여대남. 조선 하동의 유복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그가 일본에 끌려온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가 16만 대군을 앞세워 한반도를 침략하면서 7년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전투에 능한 왜의 장수와 병사들은 파죽지세로 조선 전역을 장악했다.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함경도까지 진격해 올라갔다. 하지만 명나라의 원군, 의병과 의승들의 봉기, 이순신의 활약 등이 이어지면서 전세는 점점 뒤바뀌기 시작했다.

1593년 6월, 수세에 몰린 왜군은 경상우도와 전라도의 관문인 진주성 전투에 승부수를 던졌다. 5만의 선봉대를 비롯해 총 9만의 왜군들이 진주성 전투에 투입됐다. 귀갑차(龜甲車) 등 온갖 신무기도 동원됐다. 3300여명의 조선군은 그들과 맞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조선군이 27배가 넘는 왜군을 감당하기란 애초 불가능했다. 진주성은 11일 만에 무너졌고, 왜군은 곧바로 학살에 들어갔다. 성 안에 있는 6만여 군민들이 무참히 살육됐다. 왜군들은 다시 하동현, 삼가현, 단성현 등으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멀쩡한 사람은 끌고 가고 허약하면 그 자리에서 죽였다.

당시 13살이었던 여대남은 화를 피해 친척이 주지로 있는 인근 보현암에 숨었다. 그렇지만 가혹한 운명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그해 7월, 여대남은 왜군에게 붙잡힌 뒤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에게 끌려갔다. 어떤 말과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생과 사가 오고가는 자리였다. 설령 살더라도 평생 종노릇을 하거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노예로 팔려나가기 십상이었다. 그 순간 여대남은 붓을 들어 천천히 글을 써내려갔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803~852)이 지은 ‘산행(山行)’의 한 구절이었다.

‘홀로 깊은 산에 올라 돌길을 걸어가니(獨上寒山石逕斜)
흰 구름이 피어오르는 곳에 인가가 있네(白雲生處有人家)’

적장 가토는 깜짝 놀랐다. 일본에서는 글을 아는 이들이 극히 적었다. 왜장들이 승려들을 종군시킨 것도 그들이 글을 아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승전을 기원하고 병사들을 독려하는 역할뿐 아니라 온갖 문서수발과 필담으로 상대측과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시골 소년이 시퍼런 칼날이 번득이는 상황에서 한시를 써내려가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가토는 “이 아이는 범상하지 않다”며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주었다. 인재로 키워 자신의 영지에 필요한 인물로 써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여대남에게 놀란 것은 가토를 따라 종군한 일련종의 고승 니쓰신(日眞)도 마찬가지였다. 니쓰신은 가토의 신임을 깊이 받는 승려로 글과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니쓰신은 여대남을 본 순간 훌륭한 승려로 키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 장차 사명대사 유정(1544∼1610)과 같은 인물이 될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다.

니쓰신은 유정을 깊이 흠모했다. 그는 가토와 유정이 회담할 때 필담으로 통역을 담당했다. 그러면서 유정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담대함과 지략을 지녔음을 알았다. 가토가 글씨를 받으려고 부채를 보냈을 채 유정은 ‘진실로 내 것이 아니라면 비록 티끌 하나도 취하지 말라’고 써주었다. 왜군의 침략을 질책하는 유정의 글에서 니쓰신은 묘한 쾌감과 뿌듯함을 느꼈다. 비록 나라와 종파는 달라도 부처님의 제자라는 점에서는 자신과 유정은 다르지 않았다. 둘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서로 글을 주고받았으며,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만나 같은 길을 걷는 출가자로서 즐거움을 나누자고 약속했다. 니쓰신은 가토에게 “조선인에게 자신의 머리가 베어질지라도 송운과 산천을 유람하고 싶다”는 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선승이었던 유정이 훗날 선조의 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일련종 사찰에 머물었던 것도 니쓰신과의 친분에서 비롯됐다.

니쓰신은 어린 여대남에게서 유정의 지혜로움을 보았다. 니쓰신은 가토를 설득해 여대남이 출가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일요(日遙, 니치요)라는 법명을 주고 일본 최고의 불교대학인 교토 육조강원(六條講院)에 유학시켰다. 하동 출신 사행원이 일요를 만난 것은 그가 육조강원에서 공부할 무렵이었다. 일요는 강원을 졸업한 뒤에도 계속 학문과 수행에 매진했고, 그의 이름이 널리 알져지기 시작했다. 1609년에는 혼묘지 초대주지였던 니쓰신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제3대 혼묘지 주지를 계승했다. 혼묘지는 가토가 세운 원찰로 큐슈 지역 최대의 사찰이었다.

일요는 혼묘지 주지를 맡은 뒤 10여년간 전법에 힘을 쏟았다. 종종 고국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동시에 폐허가 된 고향에 굳이 갈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일요는 부모님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일본으로 붙잡혀간 조선인은 10~40만으로 추정된다. 대다수는 비참한 노예의 삶을 살아야 했고, 포르투갈 노예선에 실려 해외로도 팔려나갔다. 조선 정부는 이들을 송환하기 위해 5번에 걸쳐 쇄환사와 통신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귀국한 조선인은 겨우 1만여명에 불과했다. 일본의 세력가들은 조선의 포로를 은닉해 돌려보내지 않으려 했다. 학문을 익혔거나 특정한 기술이 있는 이들 중에는 스스로 귀국을 거부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지녔어도 천민 출신이라면 귀국하더라도 다시 천민의 삶을 살아야 했다. 양반이라 하더라도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오면 절의를 잃은 사람으로 치부해 관직에 나가기 어려웠다. 귀국해서 냉대와 멸시를 받느니 차라리 왜국에서 살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일요는 부친의 편지를 받은 뒤 더 이상 갈등하지 않았다. 아무리 은사 니쓰신의 은혜가 깊더라도 자신은 조선인이었고, 고국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부모가 있었다. 편지를 받은 며칠 뒤 일요는 아버지 여천갑에게 편지를 써내려갔다.

▲ 일요가 부친 여천갑에게 쓴 편지. 일본 혼묘지 소장.<출처: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
“아버님, 어머님 이제 몇 년 만 마음을 편안히 하시어 기다려주십시오. 저는 보내주신 편지를 가지고 이 나라의 장군과 지역 영주에게 아뢸 생각입니다. 정성을 다해 2~3년간 청해보려고 합니다. 그들 모두 사람인지라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생각은 끝이 없고 드릴 말씀은 한이 없어서 여기에서 소상히 다 적을 수가 없습니다.”

일요는 자신이 어떻게 왜군에게 잡힌 뒤 승려의 삶을 살아가게 됐는지, 지금까지 단 하루도 부모님을 잊지 않고 살아왔음도 적었다. 어떻게든 조선으로 건너가기 위해 노력할 터이니 부디 기다려달라고 당부했다. 일본에 끌려온 후 늘 궁금했던 조부와 보현암 주지 등축의 생사여부도 물었다. 추신으로 일본인들이 매를 아끼니 좋은 매 두 마리를 사서 보내주면 대마도주와 이곳 태수에게 선물해 자신이 귀국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도 남겼다.

부친으로부터 답장이 온 것은 2년 뒤인 1622년이었다. 편지를 받아든 일요의 가슴은 미어졌다. 자신이 수십 년간 마음을 닦아온 출가자가 맞나 싶었다.

“너와 헤어진 지 30여년 만에 편지를 받았다. 봉투를 뜯고 거듭 되풀이해서 읽었다. 마치 너의 음성을 듣고, 너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기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이제 60살, 네 어미는 65살, 이제 목숨이 얼마나 남았겠느냐. 매일 밤이 되면 반드시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한단다. 살아생전 너의 모습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기 때문이다.”

편지에는 고향의 부모님이 얼마나 자신을 그리워하는지 절절이 묻어났다. 일요는 계속 읽어나갔다.

“너의 편지를 보니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을 (윗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구나. 국왕에게 간절히 요청하여라. 연로한 부모에게는 다른 자식이 없고, 단지 너 하나밖에 없는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거라고.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간절히 요청하여라. 마음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한다는데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느냐. 내가 너를 만날 수 있다면 30년간 쌓인 한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이다. 부디 아들아, 간절히 힘을 다하려무나.”

부친은 조부가 왜군에게 부상을 당한 뒤 그것이 화근이 돼 돌아가셨고, 보현암 주지도 몇 해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들이 요청했던 매는 사사로이 외국인에게 선물할 수 없도록 국법으로 정해 놓고 있지만 어떻게든 구해보겠다는 얘기도 남겼다.

일요는 첫 편지를 보내고 2년간 고국으로 돌아가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국의 연로한 부모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며, 자신이 아니면 누가 부모를 섬기겠느냐고 눈물로 호소했다.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조선과 일본이라고 어찌 다르겠냐고 절규도 했다. 그러나 가토 기요마사의 뒤를 이은 가토 다다히로(加藤忠廣, 1601~1653)는 일요의 요청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능하고 백성의 신망을 얻는 고승이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정치적 계산에서였다.

다다히로는 귀국을 허락하기는커녕 일요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외부에서 보낸 편지까지 일일이 검열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고 일요의 절망은 깊어져갔다. 그는 부친에게 다시 편지를 써내려갔다. 이 편지가 고향에 전해질 수 있을 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일요는 자신이 새장 속에 갇힌 새와 같은 신세라고 털어놓았다. 이 편지도 자신의 측근을 통해 몰래 보내며, 그런 탓에 작은 선물 하나조차 보낼 수 없음도 적었다.

“30년간 향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한 마음이 통했는지 편지를 받자옵고 매일 수차례씩 읽고 있자니 아버님의 얼굴을 뵙는 것 같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하늘은 어찌하여 제게 이러한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요. 왜 우리 부자의 가슴을 이토록 아프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부디 천수를 누리시면서 기다려주십시오. 정은 끝이 없는 것인데, 형세가 좋지 못하다는 것만을 전해 드리며 저의 마음을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일요의 편지는 끝내 조선의 부친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1632년 호소가와 다다토시(細川忠利)가 가토 다다히로를 내쫓고 권력을 잡자 일요는 다시 그에게 귀국을 간절히 청했다. 하지만 새로운 권력자 또한 냉정히 거절했다. 일요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귀국을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그는 가슴에 맺힌 한을 불심으로 쓸어내리며 아픈 시간들을 보냈다. 일요는 세월이 흘러 고국의 부모가 돌아갔을 무렵에는 부모의 위패를 모시고 매일 극락왕생을 기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히젠(肥前) 시마바라(島原) 지역에 사찰을 창건해 법을 펼쳤던 일요는 ‘쇼닌(上人)’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며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다 1665년 2월, 일요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79살의 나이로 타국에서 눈을 감았다.

전쟁의 참혹함이 깊이 새겨져있는 아들 일요와 아버지 여천갑이 주고받았던 편지 3통과 끝내 부치지 못한 일요의 편지 1통은 현재 일본 혼묘지에 보관돼 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국립진주박물관, 2010년), ‘일본 구마모토의 임란포로 여대남에 관한 연구’(노성환, 일본어문학 제46집), ‘사명당평전’(조영록, 한길사), ‘임란판 어느 이산가족의 사연, 상·하’(경향신문, 1984.1.17, 1984.1.24)

[1315호 / 2015년 10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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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ffhdhffpㅗ디ㅣㅐㅐㅣㅣ도 2015-12-14 00: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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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ffhdhffpㅗ디ㅣㅐㅐㅣㅣ도 2015-12-14 00: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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