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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침묵의 인격

명나라의 선비 원요범(袁了凡)의 저술 요범사훈(了凡四訓)에 나오는 이야기다. 명나라의 재상 여문의(呂文懿)가 늙자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많은 고향으로 은퇴하였다. 어느 날 술 취한 마을사람 하나가 그의 집에 가서 큰 소리로 그에게 터무니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하인이 그를 관가에 고발하려 하자 여문의가 “이 사람이 취했으므로 다투지 말라”고 조용히 말하고, 문을 닫고 퍼붓는 모욕을 무시하였다.

1년 후 그 취객이 중죄를 짓고 사형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을 듣고 여 문의가 크게 후회하며 말했다. “만약 내가 그 날 그가 관가에서 처벌받도록 조치했다면 작은 형벌이 이 중죄를 예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나는 존경받는 인격자로서 관용을 베풀었지만 어리석게도 그를 더 방자한 사람이 되도록 방치하여 지금 죽게 만들었다.”

국내에서 매우 존경받는 한 목사가 은퇴하였다. 그가 은퇴하면서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훌륭한 인격자로 존경한다고 말했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시비를 따지지 않고 관용과 침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옳은 길이었던가? 그릇된 행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그 시비를 가려 올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 내가 과연 참된 목회자였던가? 부끄럽게도 고매한 인격자로 존경받기 위해 나는 목회자로서 내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로서 ‘어른이 없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여러 가지 갈등이 표출 격화되어 혼란스러운데 그것을 조정하려는 원로 또는 어른이 없다는 것이다. 즉 갈등을 조정할만한 지혜와 식견을 가진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침묵의 배후에는 분쟁의 조정에 나서면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비난을 받기 십상이니 차라리 조용히 있는 것이 인격자로서 대접받는 현명한 처세라는 생각이 있다.

석가모니가 도를 깨달은 후 자신이 발견한 진리는 너무 심오하여 이를 이해할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오해하여 조롱하고 비난하리라 생각하고 침묵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이를 간파한 대범천(大梵天)을 비롯한 많은 신들이 석가모니가 침묵하면 길을 잃고 헤매는 이 세상은 완전히 파멸되리라 생각하고 그가 깨달은 진리를 세상에 가르쳐주도록 간청하였다. 이리하여 석가모니는 어리석은 중생으로부터 많은 부당한 비난을 받을 것을 각오하고 이 간청을 받아들여 침묵을 깨고 이 세상에 나서기로 결심하였다. 이로서 불교가 시작되었고 인류 역사상 가장 고귀한 인격자의 한 분인 부처님이 탄생하게 되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임으로 그가 속한 세상과 일정한 교섭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하다. 모든 사회적 이슈에 대한 침묵은 어쩌면 사회적 교섭의 절단을 의미할 수 있다. 만일 모든 세상일이 방치해도 소위 ‘보이지 않는 신의 손’에 의해 좋은 방향으로 전개된다면 침묵은 진정 귀중하다. 그렇지 않다면 침묵은 올바른 삶도 아니고 고귀한 인격의 구현도 아니다. 석가모니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여 침묵을 깬 것이다.

불교는 우리 삶에 두 가지 본질적인 측면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첫째는 다른 존재들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한 생에 끝나지 않고 끝없이 유전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의 식견 있는 원로들이 중대한 사회적 갈등에 대해 침묵을 버리고 그 시비를 가려 조정하려고 노력한다면 더불어 사는 현세가 더 밝아지고 그들의 내세는 더 아름다워지리라.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이 될 것이다. 비록 부당한 비난을 받는다 해도 이러한 인생이 진정으로 고귀한 삶이고 참 인격의 구현이 아닐까?

이기화 서울대 명예교수 kleepl@naver.com

[1317호 / 2015년 1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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