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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침내 어머니까지 갇히다

어머니 죽이려던 것 참회한다며 깊은 궁궐 속에 가둬버린 아사세

지금 우리는 ‘관경’ 속에 나타난 한 가족의 비극적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경전의 이야기보다 더하면 더하지 결코 못하지는 않으리라는 데 우리의 슬픔이 있습니다. 그러한 현실을 생각할 때, ‘관경’을 읽는 우리의 마음은 더욱더 무거워집니다.

살해 막으려는 충신 앞에서
불편한 마음 해소코자 양해
진정한 의미의 참회가 아닌
책임 피하려는 역주행 불과

두 신하의 충언을 듣고서, “그때 아사세는 놀라고도 두려워하면서 기파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지 않는가?’” ‘충성’이라는 말은 번역을 하면서 제가 집어넣었습니다. 평소 자기를 위한다고 생각한 신하가 자기 뜻에 반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서, 아사세도 다소 흔들립니다. 그 역시 약한 존재입니다.

다소 누그러진 아사세의 말을 듣고서 “기파는 아뢰기를, ‘대왕이시여, 삼가 어머니를 해치지 않도록 하소서.’ 이러한 말을 듣고서 왕은 참회를 하고서 자신을 구제해 주기를 원하면서, 곧 칼을 버리고서 어머니를 해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말이 나옵니다. 아사세 자신이 이제는 참회를 하고서 스스로의 구제를 구하였다고 하는 말입니다. ‘참회’라는 말은 ‘관경’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참회는 뉘우친다고 하는 말 아닙니까. 다시는 악행을 짓지 않겠다는 다짐 아닙니까? 과연 아사세는 그렇게 쉽게 스스로의 행위를 뉘우칠 수 있었을까요? 정말로 그가 뉘우쳤다고 한다면, 그로서 당장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아버지를 풀어주고서,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과정을 통해 그가 새롭게 태어난다고 한다면 그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쉽게 바뀌는 존재는 아닌 듯합니다. 악업의 힘이 그렇게 끈질깁니다. “내관(內官)에게 명령하기를, ‘깊은 궁궐 속에 연금하여 다시 나올 수 없게 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역주행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깊은 궁궐’은 어디일까요? 조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준다면, 아버지는 감옥에 가두었을 것이고 어머니는 그보다는 좀 나은 곳에 연금했을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정도의 차이일 뿐 질적으로는 아버지나 어머니나 다 가둔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비록 ‘관경’에서 아사세가 ‘참회’를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참회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왕이 기파를 비롯한 두 명의 신하로부터 반대의견을 들은 사실에 대해서 다소 불편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고, 그러한 불편한 마음을 해소받는 차원에서 두 신하의 양해를 구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정도의 일을 가지고서 경전은 ‘참회’라거나 ‘구원을 구했다’라고 좋게 말했던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입니다. 이러한 저의 해석은 바로 아사세가 아버지를 석방하지 않고서 오히려 어머니마저 가둔 역주행을 계속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둡니다.

위제희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남편은 아들에 의해 갇혀 있습니다. 남편의 안위와 건강이 못내 걱정스러운 처지이고, 그러한 짓을 아들이 범하고 있음을 목도하면서도 달리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는 그 아들이 자기마저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갇혔을 뿐 생명은 건졌지만, 어쩌면 어머니로서는 차라리 죽었더라면 더 좋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위제희 부인은 유폐되어서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초췌해져 갔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남편이 그랬듯이 부처님께 의지하는 일밖에 없습니다. “멀리 기사굴산을 향해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고서는, ‘여래이시여, 세존께서는 옛날에는 항상 아난을 보내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근심 걱정에 휩싸여 있습니다. 세존께서는 너무나 존엄하신 분이라 뵈올 길이 없사옵니다만, 원하옵건대 목련존자와 아난존자를 보내주셔서 제가 뵈올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러한 말씀을 하고서는, 비가 내리듯이 눈물을 흘리면서 멀리 부처님을 향해서 예배를 드리는데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엎드려 울고 있습니다.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30호 / 2016년 2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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