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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예토를 싫어하고 정토를 구하다

예토에 대한 절망 깊으면 깊을수록
정토 흔구하는 마음 역시 간절해져

“그때 세존께서는 기사굴산에 계셨는데, 위제희가 마음속으로 품은 생각을 아시고서는 목건련과 아난에게 허공을 날아가서 (위제희를 위로하러) 가도록 하셨다. 부처님께서도 기사굴산에서 사라지신 뒤 왕궁에 출현하셨다. 그때 위제희는 예배를 드리고 머리를 들어서 보았다. 세존 석가모니께서 자금색(紫金色)의 몸으로 백가지 보배로 찬란한 연꽃 위에 앉아 계시고, 왼쪽에는 목련이 오른쪽에는 아난이 시립(侍立)하고 있었으며, 제석천과 범천을 비롯하여 이 세상을 보호하는 여러 신중(天)들이 허공에서 두루 하늘꽃을 내리면서 공양하고 있음을.”

부처님 직접 왕궁에 나타나자
참회·정토왕생 발원 위제희
정토신앙은 절망에서 출발해
예토 좋다면 정토 흔구 않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애당초 위제희 부인의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부처님께서 저를 찾아주십시오’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처님 제자인 목건련과 아난을 좀 보내주십시오’ 라고 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당신께서 직접 왕궁에 출현하셨습니다. 원하는 것보다 더 크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이렇게 찾아주신 부처님 앞에서, 이제 위제희 부인이 드리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남편이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어머니 위제희 부인 역시 겨우 죽음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감옥에 갇혔습니다. 살고 싶을까요? ‘정말 살고 싶지 않다’ 하는 절망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다행인 것은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절망이 깊어질수록 희망에 대한 염원이 샘솟을 수 있습니다.

“그때 위제희는 부처님 세존을 뵙고서는 스스로 (자기가 차고 있던) 영락을 풀어서 (부처님께 공양하고서) 땅에 몸을 던져 (예배를) 하고서는, 울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한 악한 아들(惡子)을 낳았으며, 세존께서는 또한 무슨 인연으로 제바달다와 함께 친족이 되었습니까?’”

이 마음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죽하면, 내가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기에 이런 과보를 받고 있는가 하고 한탄하겠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위제희 부인 스스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도 적지 않은 고뇌가 있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에게도 제바달다 같은 악연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가족으로, 친족으로 만난 악연이 아닙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전생까지 들먹이면서 신세한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서 멈춰 설 순 없습니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오직 원하옵니다. 저를 위해 널리 고뇌 없는 세상을 설해주소서. 저는 마땅히 (그곳으로) 왕생하고자 합니다. 이 염부제의 탁악(濁惡)한 세상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탁악한 세상에는 지옥·아귀·축생이 가득 차 있어서 불선(不善)이 너무 많습니다. 원하옵건대, 저는 미래에는 악한 소리를 듣지 않고 악인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세존께 오체투지의 예배를 드리면서 연민을 구하고자 참회하나이다.”

바로 이 말씀은 정토신앙의 출발이며, 시작입니다. 물론 정토신앙은 법장보살이 48가지 서원을 세움으로써 시작됩니다. 바로 ‘무량수경’에서 설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미타불의 입장에서 정토신앙의 출발을 찾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입장에서 정토신앙의 출발을 찾으려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관경’의 이 장면입니다. 위제희 부인의 절망에서, 또 희망에서 찾아집니다. 그래서 이 ‘관경’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겐신(源信, 942~1017) 스님은 ‘왕생요집(往生要集)’에서 간명하게 정리해 주십니다. “예토를 싫어하고 정토를 구하다(厭離穢土 欣求淨土).” 오늘 우리는 바로 그 장면을 확인하게 됩니다. 예토를 염리하는 마음이 없다면, 정토를 흔구하지 않습니다. 예토에 대한 절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정토를 흔구하는 마음 역시 간절해집니다. 이 예토가 좋다고 한다면 정토를 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요? 여러분은 정토를 흔구하지 않을 정도로,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정토를 사시고 계신지요? 아니면, 예토를 살고 있으면서 염리하고 계시는지요?

김호성 동국대 교수 karuna33@dongguk.edu
 

[1331호 / 2016년 2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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