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북한산 진관사-마실길-삼천사
29. 북한산 진관사-마실길-삼천사
  •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 승인 2016.03.0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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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설원서 거룩한 함성 ‘대한독립’을 듣다

▲ 진관사는 대랑원군 시절 피신하다 훗날 고려 왕위에 오른 현종이 숨어 지낸 사찰이다. 또한 불교계의 항일운동 선구자 초월 스님이 주석했던 산사다.

1919년 3월 1일. 그날, 거룩한 함성이 일었다.

“대한독립 만세!”

2016년 3월 1일. 진관사가 자리한 서울 은평구 중심 도로엔 현재의 태극기와 다른 형태의 빛바랜 태극기가 함께 내걸렸다. 3·1운동 당시 한반도 땅을 뒤덮었던 그 태극기다. 97년 전 그 날의 함성에 더 귀 기울여 보라는 듯 하늘은 눈을 내려 이 땅을 설원으로 바꿔 놓았다.

젊은이들에게 독립 필요성 설파
정재 모아 상해임시정부 지원한
초월 스님 주석했던 서울 진관사
2009년 칠성각 해체·복원하면서
3·1운동때 사용했던 태극기 발견

원효대사 창건한 사찰 삼천사도
서울과 인근지역 승병들 집결지
임진왜란 당시 항일 숨결 남아

진관사 태극기·삼천사 마애불은
빛바랬어도 그때 기운만은 성성

진관사 도량에 한 스님이 서 있다. 각황사, 동학사, 월정사, 봉원사 강단서 이름을 떨쳤던 젊은 대강백이요 불교계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초월 스님이다. 금봉 스님 회고에 따르면 밤하늘 수놓은 별을 보고도 ‘대한 독립’을 읊조렸던 초월 스님이었다고 한다.

“밤하늘의 별은 저렇게 총총한데, 우리나라는 언제 독립을 되찾을 수 있을까! 계란(일본)으로 삼각산(대한제국)을 쳐도 삼각산은 없어질 리 없다.” (김광식 논문 ‘백초월의 항일운동과 진관사’)

 
일제 감시 속에도 초월 스님은 젊은 사람만 만나면 독립을 설파했다. 그의 설법에 감복한 청년들이 만주, 상해로 떠날 때는 계를 내려 수지케 했다. ‘무사히 다녀오라’는 당부이기도 했고, 그들이 걸어야 할 길을 ‘부처님께서 친히 보살펴 달라’는 초월 스님만의 간절한 기도였을 것이다.

진관사 법회서 모아진 정재는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또한 직접 상해로 건너 가 이종욱, 백성욱, 김법윤 등과 함께 불교계의 독립운동 합류 방책도 모색했다. 1919년 11월 15일자 중국 상해신문에 실린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초안도 초월 스님이 작성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평등과 자비는 불법의 종지이다. 일본은 겉으로는 불법을 숭상한다고 하면서 지난 세기의 유물인 침략주의·군국주의에 빠져서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켜 인류의 평화를 교란시켰으며 그 강포(强暴)함만 믿고 과거에 은혜를 받은 이웃나라를 침략하여 멸하고, 그 자유를 빼앗고…… 7천의 대한승려는 결속하고 일어섰으니 큰 소원을 성취하기까지 오직 전진하고 피로서 싸울 뿐이다’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일부)

▲ 하룻밤 폭설에 진관사도 ‘3월의 설원’으로 변했다.

초월 스님은 투옥 돼 모진 고문을 당하며 ‘반병신, 불구,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독립’을 향한 희망의 끈은 절대 놓지 않았다.

초월 스님의 항일운동에 영향을 받은 용산철도국 직원(박수남)이 서울서 만주 봉천으로 가는 기차에 ‘대한독립 만세’를 썼다. 초월 스님은 물론 이 사건으로 무려 70여명의 스님들이 구금(1939년)돼 조사를 받는다. 승려 대부분은 일심교(一心敎) 소속 스님으로 알려졌는데 일심교는 불교계의 독립운동단체였고, 그 일심교를 이끈 지도자가 초월 스님이었다. 박수남과 당시 진관사 마포 포교당 주지(김형기), 이 사건과 연루된 여학생 1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초월 스님은 3년 징역형을 구형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1940년 5월 구금된 후 1943년 4월 출소했지만 독립운동 모금 사건으로 또 다시 체포 구속됐다. 이후 대전교도소를 거쳐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1944년 6월 감옥서 순국했다.

그 언제인가부터 진관사 도량을 걷노라면 어느새 발길은 대웅전 옆 나한전으로 향한다. 6·25한국전쟁 때 진관사 전각은 모두 불탔다. 그나마 남아 있는 전각이 나한전과 독성각, 그리고 칠성각이다. 나한전 나한의 ‘앙증스런 웃음’에 절로 미소를 띠다가도 칠성각을 바라보노라면 이내 자존감과 쓸쓸함이 빚어내는 묘한 기운에 휩싸인다.

▲ 2009년 5월26일 진관사 칠성각서 발견된 태극기가 3월1일 은평구청 외벽에 걸렸다.

2009년 5월 26일. 진관사 칠성각 해체 복원 과정 중 이 나라가 꿋꿋이 서 있는 동안 길이 남을 ‘유물’이 발견됐다. 1919년 3·1운동 당시 쓰였던 태극기 1점과 독립신문 2종 4점, 조선독립신문 5점, 자유신종보 3점, 그리고 경고문 1점이다.

서울 은평구 도로 일대에 걸린 빛바랜 태극기는 진관사서 발견된 그 태극기다. 누군가 그 ‘유물’을 보자기에 싸 칠성각 벽 한 쪽을 뜯어내고는 그 속에 감춰뒀던 것이다. 누굴까? 초월 스님의 항일운동 행적을 고찰하고 있는 ‘백초월-독립운동가 초월 스님의 불꽃같은 삶’(민족사) 저자 김광식 선생은 ‘초월 스님’이라고 단언한다.

일본 순사들이 초월 스님을 체포하러 온다는 전언을 들은 초월 스님은 갖고 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을 어딘가 급히 숨겨야 했다. 대웅전에 숨기면 진관사가 독립운동 본거지로 의심받을 터이니 위험하다. 도량서 가장 외진 곳! 혹, 일본순사가 발견한다 해도 외진 전각에 숨겼으니 진관사는 크게 화를 입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칠성각을 택했을 것이다. 6·25한국 전쟁 당시 저 칠성각마저 화마에 재로 변했다면 우리의 독립역사 한 편도 사라졌을 것이다.

▲ 높이 3m의 고려 시대 마애불이다. 조성 당시엔 채색불이었던 듯 벽면 주위엔 아직도 붉은 빛이 감돌고 있다.

그 시대의 아픈 역사 위로라도 하려는 듯,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이 바람에 날려 칠성각 위에 내려앉았다.
북한산 둘레길은 소나무 숲길(1구간)부터 우이령길(21구간)까지 21개의 코스가 있다. 진관사가 포함된 길은 제9구간 ‘마실길’. 효자동으로 걸음 하려다 이내 삼천사로 향했다.

문무왕 1년(661)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한 때 3000명의 스님들이 운집해 살았다 해 삼천사다. 원래의 삼천사는 현 사찰보다 더 위쪽에 자리했었다. 삼천사터엔 지금도 대형 석조와 동종, 연화대좌, 석탑기단석, 대지국사탑비 등이 남아 있다.

진관사에 항일운동의 역사흔적이 남아 있듯, 삼천사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항일운동 숨결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은 1592월 4월13일 일본군이 부산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약 40일만에 평양이 일본군 손에 들어갔다. 한마디로 접전조차 거의 없었다는 반증이다. 관군의 무능을 보다 못한 사람들, 의병이 일어섰다. 그 의병 중심에 서산휴정의 제자 영규대사가 처음으로 조직한 승병이 있다.

영규대사는 빼앗긴 청주성을 되찾자마자 다시 수 백 여 명의 승병을 이끌고 조헌이 이끄는 금산전투에 합류했고 끝까지 항전을 벌이다 조헌과 함께 전사했다. 훗날 조헌 문도들은 이 전장에서 숨진 유생 700명의 시신을 거둬 ‘700의 총’을 조성했다. 그러나  수백 여 명의 승려는 철저하게 외면했다.
삼천사는 서울과 인근지역 승병들의 집결지였다. 금산항전의 승병처럼 외롭게 싸운 스님들의 안식처이자 항일의 의지를 다졌던 절이 삼천사다.

▲ 한 때 3000명의 스님들이 살았다 해서 삼천사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엔 승병 집결지였다.

대웅전 뒤편에 오르면 커다란 ‘병풍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입상(보물 제657호·고려시대)을 친견할 수 있다.

세월에 빛바랜 마애불은 고풍스럽다. 빛바랜 태극기가 자꾸 어린 거린다.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도 눈이 내려 앉아 있겠지!  

채문기 본지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도움말]

 
길라잡이

들머리는 진관사 입구. 일주문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진관사다. 진관사서 삼천사로 향하는 길이 복잡하지는 않지만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북한산 둘레길 중 마실길(9구간)로 향하기 때문에 이정표를 잘 보아야 한다.

진관사 입구 탐방지원센터 앞에 ‘북한산 누리길’입구가 보인다. 이내 은행나무 숲에 이르고 3분여 정도 걸으면 북한산 누리길 9구간인 ‘마실길’ 구간 입구가 보인다. 여기서 200m 가면 삼천사입구 분기점에 이르는데 이정표가 서 있다. 이정표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가면 효자동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둘레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삼천사로 가는 길이다. 삼천사 입구서 삼천사까지의 1Km 구간은 가파른 길이 아니어서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진관사서 삼천사까지 오르는 소요시간은 약 1시간.


이것만은 꼭!

 
나한전과 독성각, 칠성각: 진관사 전각은 6·25한국 전쟁 당시 거의 다 전소됐고 나한전과 독성각, 그리고 칠성각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문화재급 불화 조각품은 대부분 세 전각에 있으니 꼭 참배해야 한다. 특히 나한전 십육나한도(津寬寺羅漢殿十六羅漢圖)는 나한도 네 폭, 제석신중도 한 폭, 사자신중도 한 폭 등 모두 여섯 폭으로 구성되어 있는 불화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독성각 독성도와 소조독성: 독성도는 가로로 긴 화면에 민화풍의 산수를 배경으로 독성과 시자, 동자 등을 그린 가로 약 2.2m, 세로 약 75cm 크기의 대작이다. 왼쪽 하단의 화기에 의하면 이 불화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경기도 일원에서 활약하던 화승 경선당 응석이 그린 것으로 홍순모와 상궁 이씨의 시주에 의해 1907년에 제작됐다. 소조독성은 문화재자료 제11호(서울)다.

 

 

 

 

 
칠성각 석불좌상과 칠성도: 이 불상은 높이 34cm 크기이며 옥석으로 만들었다. 얼굴은 크고 넓적한데 이목구비가 작게 묘사되었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가 일품이다. 전체적으로 친근하면서도 온화한 인상이다. 칠성도는 1910년에 제작된 것이다. 가로가 긴 화면에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칠성과 성군 등이 묘사되었다. 시도 유형문화재147호다.


[1334호 / 2016년 3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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